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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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가짜일지 몰라도 저주를 건 사람의 악의는 진짜잖아요?"

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간의 악의보다 더 무서운 건 없어요, 후후."

소녀의 동공이 커지고 목소리가 낮고 공허하게 변했다. 물 아래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여러분은 저주를 기획할 때 자신들이 인간의 '악의'라는 벌집을 쑤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아무리 간접적이라고 해도 부정적인 일이 생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쾌 - 젓가락 괴담 경연> 중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예터우즈 321쪽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밥에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세로로 꽂으면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이 줄었기도 하고 그 형식도 간소화 되어서 그런지 아예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이 소설을 보고 나니 밥에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세로로 꽂는 행위는 아마도 동양권에서는 비슷하게 죽은 자에게 바치는 밥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표지가 예뻐서 사는 책은 별로 없지만 표지가 너무 혐오스럽거나 무서우면 구매를 망설이거나 꼭 사야 하는 경우라면 다른 표지로 가려두기도 하는데 부제에 딸린 '괴담경연'이라는 말과 영화 <장화홍련전>을 떠오르게 하는 표지가 무서워서 책을 뒷면으로 뒤집어 놓은 채 자꾸만 읽기를 뒤로 미뤘더랬다. 무서운 이야기일까봐서. 용기를 내서 엊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예전에 영어를 배우면서 선생님이 첫 문장을 주면 우리가 돌아가면서 한 문장씩 덧붙여 이야기를 만드는 수업을 하곤 했었다. 우리의 영어실력이 짧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부재로 인해 늘 이야기는 산으로 가거나 뻔하디 뻔한 문장들만이 반복되곤 했었다. 그런데 젓가락 괴담이라는 테마를 두고 릴레이 소설, 연작소설의 형식으로 일본과 중국, 대만의 유명 추리소설 작가들이 만들어 낸 조화는 놀라웠다. 각국이 가진 젓가락이라는 보편적인 사물에 얽힌 미신이나 괴담들을 절묘하게 버무려 다섯 편의 단편이면서 동시에 한편의 딱 들어맞는 추리소설로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미쓰다 신조의 <젓가락님>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젓가락에 소원을 빌기 시작하면서 악몽을 꾸게 된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각해보면 대체로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랄 때 우리의 기도는 뭐랄까 조금 더 공개적이고 당당하다. 교회에 간다거나, 절이 가서 기도를 드린다거나 요즘식으로 대체하자면 SNS에 해시태그를 붙인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해하고 싶다거나 내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처럼 부정적인 바람은 그와 반대이다. 자신의 그런 음습한 마음이나 바람 따위를 누군가에게 드러내고 싶은 사람도 없으려니와 아마도 대부분은 양심이라는 것이 그것을 숨기고 싶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바람은 오래 전에 이런저런 방법이 있었다더라, 하는 미신이나 민속적인 괴담 등에서 그 방법을 차용한다.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른다거나,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붉은 색으로 적어 불에 태운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젓가락'이라는 흔해빠진 도구를 이용해서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다는 것이 소름끼치는 이유는 아마도 일상성 때문일 것이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사용하는 젓가락,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의심없이 사용했지만 그것으로 내 가까운 누군가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동안 젊은 방송인들이 연달아 자살하면서 방송연예 기사에 댓글을 막게 되었다. 젓가락 같은 도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는 수많은 도구들을 가까이 두었다. 간혹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독기'를 품었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독이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인데 그만큼 강력한 기운을 품었다는 것은 그것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게 강력한 독이 내 안에 있다는 뜻도 된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도 해로운 일이 된다는 뜻일테다. 다섯 편의 괴담 미스터리 안의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저주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저주를 받았지만 결국 저주를 건 사람도, 저주를 받은 사람도 모두가 행복하지는 못했고 그 사연들은 시대를 흐르고 인연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괴담이라는 것을 차용하면서도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을 각기 다른 작가들이 릴레이로 이어간 이 다섯 편의 소설 속에 '인간'의 강렬한 바람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형태를 만들어 내고, 그 형태가 발현하면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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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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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일하던 트레이시는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죽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동생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끝내지 못했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남자는 이미 20년째 복역중이지만 어설픈 재판과 무언가 숨기는 듯한 마을 사람들로 인해 트레이시는 선생일을 그만두고 형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동생 세라의 주검이 20년 만에 나타났다. 세라를 찾아냈으니 이제 진실을 찾아야 할 때라고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세라 린 크로스화이트

더 키드

대런이 말했다. "네가 언짢지 않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 세라를 그렇게 기억하거든.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온 동네를 쏘다니던 꼬맹이, 더 키드로."

트레이시는 눈물을 닦았다. 대런이 말을 이었다.

"이제 세라를 편히 보내주자."

<내 동생의 무덤> 중 99쪽

"그래. 세라를 찾았지. 그러니 죽음이 죽은 자를 묻게 놔둬라."

"전에도 그 말을 하신 적이 있죠. 기억하세요?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게 있어요, 로이 아저씨. 죽음은 죽은 자를 묻지 못해요. 산 자만이 그럴 수 있어요."

<내 동생의 무덤> 중 130쪽

20년 전 사격대회 결승전, 이미 여러차례 우승한 경험이 있는 트레이시는 네살 어린 여동생 세라에게 1년 전 우승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고 한발을 놓친 순간 올해도 우승은 물건너 갔다고 생각했지만 세라는 두발을 놓쳤고 그렇게 트레이시가 우승벨트를 차지했다. 트레이시는 세라가 일부러 져 준 것이라고 확신했고 화가 났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맹이 여동생, 늘 언니 노릇을 톡톡히 하는 트레이시였지만 그날만큼은 정말로 화가 났다.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남자친구 벤과 혼자서 집에 가겠다고 하는 세라 사이에서 갈등하던 트레이시는 세라를 그렇게 혼자 집으로 보냈다. 자신의 우승벨트와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서. 그리고 그날 이후 다시는 세라를 만나지 못했다. 남자친구의 청혼을 받고 행복한 잠에 겨워 있던 트레이시는 결혼기념일 여행으로 하와이에 간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세라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라가 타고 간 트럭이 국도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세라를 찾아 헤맸지만 세라는 그야말로 증발해버렸고, 마침 강간범으로 6년의 복역을 마치고 삼촌네 집에 와있던 에드먼드가 용의자로 떠오른다. 에드먼드는 세라를 강간해서 죽였다고 했지만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던 상황에서 시간은 초조하게 흐르던 차에 한 세일즈맨의 증언으로 사건은 급물살을 타고 에드먼드의 집에서 세라의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에드먼드는 세라의 살인혐으로 복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끝끝내 세라의 시신이 있는 곳을 말해주지 않았고, 그렇게 가족들은 세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세라를 기다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무너져간다. 마을의 사랑받는 가족이었던 트레이시의 가족은 붕괴된다. 명망있는 의사였던 아버지는 엽총을 입에 물고 자살해버리고, 더 이상 그 음울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트레이시는 벤과 결혼하지만 그 결혼도 결국은 깨지고 만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들 가족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트레이시는 세라를 혼자 집에 보낸 것 때문에, 부모님은 그 운명적인 주말에 집에 있지 않고 하와이로 놀러간 것 때문에.

<내 동생의 무덤> 중 162쪽

가족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 더구나 세라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 모두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만약에'라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그 생각에 잠식되어 갔다. 부모님은 자매의 사격대회 결승전이었으니 함께 보고 같이 있어줬더라면, 집에 우리가 데리고 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트레이시는 그날 세라가 져줬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벤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셋이 함께 갔더라면, 하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세라의 불행한 죽음이 사이코패스 살인범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세라를 지켜주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트레이시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재판이 끝난 후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알았기에 스스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형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자료를 모으고 많은 사람을 만나도 세라의 시신을 찾지 못하는 한 결국은 벽에 부딪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라를 찾았다. 그리고 부검을 통해 여태껏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던 재판을 뒤집을 수 있는 단서를 찾아냈다. 당시 보안관이었던 아버지의 친구 캘러웨이와 검사, 변호사까지도 한통속으로 무언가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트레이시.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과연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그 진실이라는 것이 트레이시를 마침내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형사가 된 트레이시의 현재와 아직 세라와 함께 하던 과거, 세라가 실종된 이후의 삶이 교차되면서 사건은 점점 진실을 향해 간다. 조금씩 멀어지다 결국은 깨져버린 부모님과의 기억, 마침내는 남편과의 관계까지 무너져버리게 했던 세라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싶었던 트레이시. 어릴 적 함께 놀던 소꿉친구 댄이 든든한 변호사로 트레이시를 도우면서 형사물은 법정물로 변신한다. 그리고 마지막 대반전의 순간 트레이시가 다시 이야기를 형사물로 되돌려 놓는다.

13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던 작가의 책이라 그런지 법정씬이 상당히 비중있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화학교사 전직을 가진 현직 시애틀 경찰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 형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인공 트레이시의 활약도 매서웠다. 미드나 소설 속에서 여성캐릭터가(심지어 본인이 경찰이면서도) 민폐를 끼치거나 남성캐릭터에게 기대는 상황이 많이 나오는데, 이 작품은 내 몸 하나쯤은 내가 지킬 수 있는 캐릭터로 그리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또한 마지막 해결도 자신의 손으로 해내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아, 이래서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었구나 싶었다. 이 작품이 2014년에 나온 작품이고 그 후 매년 트레이시 시리즈가 출간되었다고 하니 이후의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변호사 친구 댄과의 호흡이 계속 이어진다면 형사물에 법정물을 적절히 혼합한 재미있는 시리즈가 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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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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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가 하얀 꽃들과 함께 표지에 있던 <유지니아>를 가지고 있다. 2005년에 출간된 <유지니아>의 개정판은 작품 속에 나오는 하얀 꽃을 보다는 백일홍과 함께 잡을 듯 말 듯한 가녀린 손을 강조하고 있다. 뭔가 더 아련한 느낌이 드는 표지이다. 온다 리쿠는 확실히 입담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솜씨가 뛰어난데다 그만의 특유한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비로운 느낌이 작품마다 묻어있다. 작가의 작품들 중에는 공포나 호러 장르도 있는데 그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홀려 방문을 꼭꼭 닫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유지니아>는 옮긴이의 말에도 씌여 있듯 장르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어떤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왜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의심할 뿐 동기도 명확하지 않고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다. 추리물로 놓고 보자면 상당히 답답한 전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이토록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다는 면에서는 흥미롭다. 한 마을의 가장 성공한 유지인 아오사와 가의 잔칫날, 그 집안 가족들을 비롯해 일을 돕던 사람들, 놀러 왔던 아이들을 포함해서 열일곱명이 독살을 당한다. 그 집안에서 살아 남은 이는 단 두명. 아오사와 가의 공주님과도 같았던 히사코.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기이하게 몸을 뒤틀고 토악질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있던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또 한사람은 함께 음료를 마셨지만 울리는 전화벨을 향해 가느라 많은 양을 마시지 않았고 중태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오사와 가의 일을 보아주던 기미 씨. 그리고 현장에는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는 내용의 편지가 남겨져 있었고, 노란 비옷을 입은 남자가 독이 든 음료를 배달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었다. 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가던 중 자신이 범인임을 밝히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청년으로 인해 사건은 종결되지만 그가 누구이고, 유지니아는 누구인지, 범인의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것 하나도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끌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인터뷰 같은 입말들을 적어놓은 듯한 글들을 보다 보면 그가 누군지 대충 감이 온다. 그 사건을 소설로 써냈던 마키코, 마키코를 도와 자료조사를 했던 청년, 사건 조사를 했던 담당 형사, 간신히 살아 남은 기미 씨의 딸, 범인으로 확인된 한 남자를 알았던 한 소년 등 사건의 직접 관계자라기 보다는 간접적인 사람들, 주변인들의 인터뷰가 계속된다. 아주 조금씩, 느리게 느리게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모른 척 입을 닫는 느낌이랄까, 애를 태우는 느낌이랄까. 온다 리쿠의 이야기들 자체가 그런 느낌이 강하다. 아슬아슬 애를 태우는 느낌.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확한 사실들을 말하지 못한다. 모호한 대답들 뿐이다. 사건에 대해서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이유는 여러가지다. 사건이 일어난지 이미 세월이 한참 흘렀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기도 했고, 사건의 직접적인 대상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이란 제법 쉽게 오염된다. 당시의 내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갑작스럽게 배달된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17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렸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라고는 눈먼 소녀 뿐이고, 그녀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있었지만 어떠한 명확한 증거도 동기도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에 대한 의심은 커지지만 왜, 라는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기도방으로 썼다는 그 파란 방이 무슨 도화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가장 마지막에 이런 인터뷰가 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하는 편지가 나온다.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몇몇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왜, 누구에 의해 사건이 일어났느냐와 상관없이 사건은 일어났고, 그 사건의 영향을 오래도록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인터뷰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막상 그 '사건'이란 인터뷰를 받는 사람들의 삶 속의 한 조각일 뿐이기에 그들의 삶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들로 조각맞추기를 하다보면 제법 많은 부분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도 같지만 결국 우리가 추리물에서 가장 원하는 중요한 조각들은 빠져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소설을 추리물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감질나는 마지막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우리가 흔히 접해본 적 없는 음식을 앞에 두고 먹는 법을 설명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옮긴이의 말에는 이 책을 읽는 방법 혹은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더운 바람이 불어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목 뒷덜미엔 머리카락이 달라붙고 쨍한 햇볕에 휘청하니 어지러움까지 느껴지는 한여름의 피로, 그러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로 이어지는 계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황혼 속에서 하늘 끝까지 올라갈 것처럼 그네를 구르는 눈먼 소녀의 환한 미소, 하얀 백일홍과 파란 방과 같은 색채에 대한 묘사. 이 소설은 범인을 찾아내고 동기를 알아내는 여정이라기 보다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20년 전 한 여름의 그날과 그들의 삶에 대해 저마다의 인물들이 가졌던 자기만의 색깔을 읽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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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수집노트 - a bodyboarder’s notebook
이우일 지음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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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탄다.'

이 문장엔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다. 홍길동이 구름을 탄다고 할 때의 그런 묘함이다.

<파도수집노트> 중 18쪽

난 미끄러운 것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겨울을 좋아하지만 밖에 나가서 살얼음이 낀 길을 걷거나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혹시나 미끄러질까봐 두려워서 종종걸음을 치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추위에 긴장에 얼어붙어 버려서 몸살을 앓는 것처럼 아파진다. 그렇기에 미끄러지는 종류의 스포츠는 어떤 것도 시도해본 적이 없다. 스케이트, 스키, 보드, 롤러스케이트 같은 것들이 전부 그런 것에 해당한다. 파도타기는 그런 종류 안에 넣어서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넘어졌을 때 위에 열거한 스포츠들보다는 덜 아플테니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짠물을 먹거나 눈에 바닷물이 들어갔을 때의 고통 무엇보다 바다에 빠졌을 때의 두려움을 생각하면 매한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역시 패스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면에서 볼때 작가는 참 용감하다. 제법 연식이 있는 때에 파도타기에 이끌려 배움을 시작했고, 글을 읽다보니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한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의 모양새를 보며 나도 하고 싶다, 는 강렬한 욕망으로 스스로 터득해나갔던 모양인데 그 또한 대단하고 용감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도타기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용감하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인구가 그닥 많지 않을 것이고, 파도타기를 익히며 쓴 일기를 누군가 읽어야 겠다고 마음먹을 인구는 더더군다나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러면에서 용감하고 실천력이 뛰어나신 분이다.

나는 스포츠를 '하기'보다는 '보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프로레슬링, 권투, 야구, 배구, 농구를 꾸준히 봐왔고 특히 야구나 배구, 농구는 직관을 즐겨했던 사람이다. 집에서 TV채널을 돌릴 때도 어설픈 드라마나 웃기지도 않는 예능을 보느니 차라리 스포츠채널을 보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바로 스포츠는 흔한 말로 '각본없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매번 다르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해도 매번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예상을 벗어난다. 결과를 예측하기가 힘든 일들이 벌어진다. 요즘 스포츠계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가 터져나오지만 그래도 스포츠라는 것이 내내 사랑받는 이유는 그안에 우리의 인생과도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좌절이 가장 쉬운 요즘이지만 그래도 노력한만큼 결과를 낼 수 있는 정직한 것이 스포츠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도 파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듯이, 작가도 파도를 타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어느 정도 인생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놓은 작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에서 또다른 배움과 성장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와 비교우위에 서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여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응원하고 싶어진다. 또한 이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그저 흘러가는 듯한 내 인생에도 작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 그저 이렇게 흘러가기만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겠구나, 그러한 노력을 하는 데에 늦은 나이란 없겠구나 하고 말이다.

아아, 파도가 내 몸을 스치는 찰나에 느껴지는 그 허전함이란. 파도를 타기 위한 나의 의미없고 부질없는 몸부림. 물이 다가와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은 너무나 짧고 덧없었다. 나의 무모한 몸짓은 무엇이든 꼭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가득한 내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파도수집노트> 중 20쪽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익숙한 즐거움을 누리며 탈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기술에 도전할 것인가.

파도타기를 하며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고통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로 만족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즐길 것인가. 과연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일까?

그 가치는 누구의 가치인가. 남들이 인정하는 사회적인 가치인가 스스로 만든 개인적인 가치인가. 어느 한쪽이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없다는 건 아니다. 수학문제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중략)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만의 길을 만드는 삶. 남들이 만들어놓은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찾아가는 삶.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파도수집노트> 중 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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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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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작은 농촌마을, 열살짜리 소녀 야스는 남매의 맏이인 맛히스 오빠가 호수 건너편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나갈 때 따라 나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빠는 야스가 더 크면 데려가주겠다고, 어둡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나가버렸다. 야스는 곧 크리스마스 만찬식탁에 오를 토끼 디우에르티어 대신 맛히스 오빠를 데려가줄 수 없겠느냐고 빌었다. 맛히스 오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꽁꽁 언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야스는 자신의 기도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야스는 자신이 입었던 빨간 코트를 한여름이 되어도 벗지 못하게 된다.

맛히스를 잃은 후 엄마는 종잇장처럼 말라간다. 맛히스가 앉았던 의자를 그대로 두고 맛히스가 먹었던 잼도 차려놓는다. 누구도 그 의자에 앉지도 건드리지도 않는다. 잼도 열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가족들에게 맛히스의 자리가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누구라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이겠지만 그들은 동시에 또다른 자녀들의 부모이기에 무작정 슬픔 속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것들을 성서의 구절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는 맛히스의 죽음을 하나의 형벌로 해석하고, 엄마는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맛히스의 동생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히스의 죽음에 맞서고 있었다. 야스의 둘째오빠인 오버는 폭력성과 성적욕구를 드러내고 야스와 하나도 그런 오버와 함께 한다.

지독한 괴로움이나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그걸 입밖에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입을 꼭 닫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더 곪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야스의 가족들은 맛히스의 사고가 아예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저 기도하고 성경의 말씀이나 읖조리고 있었다. 겨우 열 몇살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다. 자기 가슴 속에 맺힌 아픔이 터져나와 버린 야스는 자해를 통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자녀들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바라봐줬다면 그들은 어쩌면 서로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스는 두꺼비와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들이 있지만 또 없다고. 보고 있어도 그립다고. 단순히 실제하는 존재로서의 부모가 아니라 가슴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봐주는 부모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안녕, 뺨이 오동통한 아가야, 이제부터 너는 우리 없이도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린 떠난다'라고 한거야? 아니면 7월의 어느 화창한 여름날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부모님이 너희를 수련 잎 위에 놔두고 저 멀리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거야? 마음이 아팠니? 지금도 마음이 아파? 미친 소리처럼 들릴진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을 매일 보는데도 그리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못 하는 것들을 배우고 싶어하는 건가 봐. 우리는 가지지 않은 모든 것을 그리워해. 우리 엄마 아빠는 여기에 있지만 없기도 하거든."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160쪽

야스의 엄마가 눈에 보이게 말라가고 있었다면 야스와 다른 형제들은 보이지 않게 무너지고 부서져있었다. 아직 어린 야스는 자신이 부서져 있다는 것을, 산산조각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맛히스 오빠 때문에 슬프고 무너진 엄마를 위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저 나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자기로 만들어졌고 누군가가 나를 실수로 떨어뜨려 산산조각 낸다면, 그래서 나를 보고 내가 부서졌다는 걸, 포일에 싸인 그 빌어먹을 천사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326쪽

맛히스 오빠가 생각난다. 오빠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오빠의 호흡은 급작스럽게 끊어졌을까? 문득 수의사 아저씨가 에베르천 아저씨와 함께 오빠를 물에서 꺼냈을 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은 도자기처럼 조심조심 다뤄야 해요. 살짝만 건드려도 치명적일 수 있어요"라던. 지금껏 내내 우리는 맛히스 오빠가 우리 머릿속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지 않게끔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뤘다. 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을 만큼.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337쪽

작가는 작품 속의 야스처럼 어린 나이에 오빠를 잃었고,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경험들을 토대로 6년 동안 준비한 작품이라고 한다.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본 형제를 잃은 상실감, 슬픔, 죽음의 색채는 무참히도 어둡고 절망적이다. 게다가 그 절망 속에서 나타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행위들은 부모된 입장에서 볼 때 끔찍할 정도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는 아직은 미성숙한 나이이기 때문에 그토록 선명한 반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어쩌면 그런 슬픔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오로지 기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귀기울이려는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야스의 어린 영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섰다. 인생이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인해 오게 된 것이고, 그들의 손을 잡고 커나가며 영향을 받고, 또 수많은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고 위로받으며 마지막까지 걸어가게 된다. 가장 어려운 때, 마음이 상처 받았을 때 손내밀어 줄 가족이 이웃이 친구가 없다면 결국 야스처럼 혼자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되고, 그 길의 끝에 행복이란 없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마음아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하나님을 잃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을 잃음으로써 하나님까지 잃는 사람들도 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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