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작은 농촌마을, 열살짜리 소녀 야스는 남매의 맏이인 맛히스 오빠가 호수 건너편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나갈 때 따라 나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빠는 야스가 더 크면 데려가주겠다고, 어둡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나가버렸다. 야스는 곧 크리스마스 만찬식탁에 오를 토끼 디우에르티어 대신 맛히스 오빠를 데려가줄 수 없겠느냐고 빌었다. 맛히스 오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꽁꽁 언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야스는 자신의 기도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야스는 자신이 입었던 빨간 코트를 한여름이 되어도 벗지 못하게 된다.
맛히스를 잃은 후 엄마는 종잇장처럼 말라간다. 맛히스가 앉았던 의자를 그대로 두고 맛히스가 먹었던 잼도 차려놓는다. 누구도 그 의자에 앉지도 건드리지도 않는다. 잼도 열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가족들에게 맛히스의 자리가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누구라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이겠지만 그들은 동시에 또다른 자녀들의 부모이기에 무작정 슬픔 속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것들을 성서의 구절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는 맛히스의 죽음을 하나의 형벌로 해석하고, 엄마는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맛히스의 동생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히스의 죽음에 맞서고 있었다. 야스의 둘째오빠인 오버는 폭력성과 성적욕구를 드러내고 야스와 하나도 그런 오버와 함께 한다.
지독한 괴로움이나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그걸 입밖에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입을 꼭 닫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더 곪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야스의 가족들은 맛히스의 사고가 아예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저 기도하고 성경의 말씀이나 읖조리고 있었다. 겨우 열 몇살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다. 자기 가슴 속에 맺힌 아픔이 터져나와 버린 야스는 자해를 통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자녀들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바라봐줬다면 그들은 어쩌면 서로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스는 두꺼비와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들이 있지만 또 없다고. 보고 있어도 그립다고. 단순히 실제하는 존재로서의 부모가 아니라 가슴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봐주는 부모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