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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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작은 농촌마을, 열살짜리 소녀 야스는 남매의 맏이인 맛히스 오빠가 호수 건너편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나갈 때 따라 나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오빠는 야스가 더 크면 데려가주겠다고, 어둡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나가버렸다. 야스는 곧 크리스마스 만찬식탁에 오를 토끼 디우에르티어 대신 맛히스 오빠를 데려가줄 수 없겠느냐고 빌었다. 맛히스 오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꽁꽁 언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야스는 자신의 기도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야스는 자신이 입었던 빨간 코트를 한여름이 되어도 벗지 못하게 된다.

맛히스를 잃은 후 엄마는 종잇장처럼 말라간다. 맛히스가 앉았던 의자를 그대로 두고 맛히스가 먹었던 잼도 차려놓는다. 누구도 그 의자에 앉지도 건드리지도 않는다. 잼도 열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가족들에게 맛히스의 자리가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누구라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이겠지만 그들은 동시에 또다른 자녀들의 부모이기에 무작정 슬픔 속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다. 모든 것들을 성서의 구절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는 맛히스의 죽음을 하나의 형벌로 해석하고, 엄마는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맛히스의 동생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히스의 죽음에 맞서고 있었다. 야스의 둘째오빠인 오버는 폭력성과 성적욕구를 드러내고 야스와 하나도 그런 오버와 함께 한다.

지독한 괴로움이나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그걸 입밖에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입을 꼭 닫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더 곪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야스의 가족들은 맛히스의 사고가 아예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저 기도하고 성경의 말씀이나 읖조리고 있었다. 겨우 열 몇살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위로도 되어주지 못했다. 자기 가슴 속에 맺힌 아픔이 터져나와 버린 야스는 자해를 통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아픔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자녀들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바라봐줬다면 그들은 어쩌면 서로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스는 두꺼비와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들이 있지만 또 없다고. 보고 있어도 그립다고. 단순히 실제하는 존재로서의 부모가 아니라 가슴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봐주는 부모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안녕, 뺨이 오동통한 아가야, 이제부터 너는 우리 없이도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린 떠난다'라고 한거야? 아니면 7월의 어느 화창한 여름날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부모님이 너희를 수련 잎 위에 놔두고 저 멀리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거야? 마음이 아팠니? 지금도 마음이 아파? 미친 소리처럼 들릴진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을 매일 보는데도 그리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못 하는 것들을 배우고 싶어하는 건가 봐. 우리는 가지지 않은 모든 것을 그리워해. 우리 엄마 아빠는 여기에 있지만 없기도 하거든."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160쪽

야스의 엄마가 눈에 보이게 말라가고 있었다면 야스와 다른 형제들은 보이지 않게 무너지고 부서져있었다. 아직 어린 야스는 자신이 부서져 있다는 것을, 산산조각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맛히스 오빠 때문에 슬프고 무너진 엄마를 위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저 나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자기로 만들어졌고 누군가가 나를 실수로 떨어뜨려 산산조각 낸다면, 그래서 나를 보고 내가 부서졌다는 걸, 포일에 싸인 그 빌어먹을 천사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326쪽

맛히스 오빠가 생각난다. 오빠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오빠의 호흡은 급작스럽게 끊어졌을까? 문득 수의사 아저씨가 에베르천 아저씨와 함께 오빠를 물에서 꺼냈을 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은 도자기처럼 조심조심 다뤄야 해요. 살짝만 건드려도 치명적일 수 있어요"라던. 지금껏 내내 우리는 맛히스 오빠가 우리 머릿속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지 않게끔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뤘다. 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을 만큼.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337쪽

작가는 작품 속의 야스처럼 어린 나이에 오빠를 잃었고, 개혁교회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경험들을 토대로 6년 동안 준비한 작품이라고 한다.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본 형제를 잃은 상실감, 슬픔, 죽음의 색채는 무참히도 어둡고 절망적이다. 게다가 그 절망 속에서 나타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행위들은 부모된 입장에서 볼 때 끔찍할 정도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는 아직은 미성숙한 나이이기 때문에 그토록 선명한 반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어쩌면 그런 슬픔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오로지 기도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귀기울이려는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야스의 어린 영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섰다. 인생이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인해 오게 된 것이고, 그들의 손을 잡고 커나가며 영향을 받고, 또 수많은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고 위로받으며 마지막까지 걸어가게 된다. 가장 어려운 때, 마음이 상처 받았을 때 손내밀어 줄 가족이 이웃이 친구가 없다면 결국 야스처럼 혼자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되고, 그 길의 끝에 행복이란 없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마음아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자기 자신을 찾음으로써 하나님을 잃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을 잃음으로써 하나님까지 잃는 사람들도 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 중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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