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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가 하얀 꽃들과 함께 표지에 있던 <유지니아>를 가지고 있다. 2005년에 출간된 <유지니아>의 개정판은 작품 속에 나오는 하얀 꽃을 보다는 백일홍과 함께 잡을 듯 말 듯한 가녀린 손을 강조하고 있다. 뭔가 더 아련한 느낌이 드는 표지이다. 온다 리쿠는 확실히 입담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솜씨가 뛰어난데다 그만의 특유한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비로운 느낌이 작품마다 묻어있다. 작가의 작품들 중에는 공포나 호러 장르도 있는데 그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홀려 방문을 꼭꼭 닫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유지니아>는 옮긴이의 말에도 씌여 있듯 장르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어떤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왜 일어났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의심할 뿐 동기도 명확하지 않고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다. 추리물로 놓고 보자면 상당히 답답한 전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이토록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다는 면에서는 흥미롭다. 한 마을의 가장 성공한 유지인 아오사와 가의 잔칫날, 그 집안 가족들을 비롯해 일을 돕던 사람들, 놀러 왔던 아이들을 포함해서 열일곱명이 독살을 당한다. 그 집안에서 살아 남은 이는 단 두명. 아오사와 가의 공주님과도 같았던 히사코.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기이하게 몸을 뒤틀고 토악질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 한가운데 있던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또 한사람은 함께 음료를 마셨지만 울리는 전화벨을 향해 가느라 많은 양을 마시지 않았고 중태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아오사와 가의 일을 보아주던 기미 씨. 그리고 현장에는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는 내용의 편지가 남겨져 있었고, 노란 비옷을 입은 남자가 독이 든 음료를 배달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었다. 왜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가던 중 자신이 범인임을 밝히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청년으로 인해 사건은 종결되지만 그가 누구이고, 유지니아는 누구인지, 범인의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것 하나도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끌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인터뷰 같은 입말들을 적어놓은 듯한 글들을 보다 보면 그가 누군지 대충 감이 온다. 그 사건을 소설로 써냈던 마키코, 마키코를 도와 자료조사를 했던 청년, 사건 조사를 했던 담당 형사, 간신히 살아 남은 기미 씨의 딸, 범인으로 확인된 한 남자를 알았던 한 소년 등 사건의 직접 관계자라기 보다는 간접적인 사람들, 주변인들의 인터뷰가 계속된다. 아주 조금씩, 느리게 느리게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모른 척 입을 닫는 느낌이랄까, 애를 태우는 느낌이랄까. 온다 리쿠의 이야기들 자체가 그런 느낌이 강하다. 아슬아슬 애를 태우는 느낌.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확한 사실들을 말하지 못한다. 모호한 대답들 뿐이다. 사건에 대해서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이유는 여러가지다. 사건이 일어난지 이미 세월이 한참 흘렀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기도 했고, 사건의 직접적인 대상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이란 제법 쉽게 오염된다. 당시의 내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갑작스럽게 배달된 독이 든 음료를 마시고 17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렸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라고는 눈먼 소녀 뿐이고, 그녀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있었지만 어떠한 명확한 증거도 동기도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에 대한 의심은 커지지만 왜, 라는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기도방으로 썼다는 그 파란 방이 무슨 도화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가장 마지막에 이런 인터뷰가 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하는 편지가 나온다.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몇몇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왜, 누구에 의해 사건이 일어났느냐와 상관없이 사건은 일어났고, 그 사건의 영향을 오래도록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인터뷰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막상 그 '사건'이란 인터뷰를 받는 사람들의 삶 속의 한 조각일 뿐이기에 그들의 삶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들로 조각맞추기를 하다보면 제법 많은 부분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도 같지만 결국 우리가 추리물에서 가장 원하는 중요한 조각들은 빠져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소설을 추리물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감질나는 마지막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우리가 흔히 접해본 적 없는 음식을 앞에 두고 먹는 법을 설명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옮긴이의 말에는 이 책을 읽는 방법 혹은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더운 바람이 불어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목 뒷덜미엔 머리카락이 달라붙고 쨍한 햇볕에 휘청하니 어지러움까지 느껴지는 한여름의 피로, 그러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로 이어지는 계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황혼 속에서 하늘 끝까지 올라갈 것처럼 그네를 구르는 눈먼 소녀의 환한 미소, 하얀 백일홍과 파란 방과 같은 색채에 대한 묘사. 이 소설은 범인을 찾아내고 동기를 알아내는 여정이라기 보다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20년 전 한 여름의 그날과 그들의 삶에 대해 저마다의 인물들이 가졌던 자기만의 색깔을 읽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