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4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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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시나리오의 난이도는 높아지고, 멸살법을 끝까지 완주한 김독자와 멸망 이전의 세상에서 시나리오 안에 살아 있는 인물들과 애초에 싱숑의 소설 속 게임의 등장인물들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유일한 회귀자인 유중혁의 행동에도 시나리오의 전개에도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독자는 자신이 아는 게임의 전개와 조금씩 다른 점이 생겨도 이제 놀라거나 겁먹지 않을 정도로 게임에 적응했다. 왜냐하면 시나리오대로, 애초의 전개대로라면 김독자 자신을 포함한 이 모든 세계의 운명은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멸망과 함께 그토록 뻔한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미 목도한 바 있는 김독자는 또다른 무리들을 만난다. 그들은 경찰서 같은 곳에서 뜯어온 철창으로 링을 만들고 사람들을 넣어 개싸움을 시킨다. 생각해보면 인간들처럼 잔인한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개를 데려다가도 싸움을 시키고, 소를 데려다가도 싸움을 시키고, 닭을 데려다가도 싸움을 시킨다. 그리고 사람을 데려다가도 싸움을 시킨다. 아주 어렸을 때 권투나 레슬링을 하면서 선수들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이었지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난다. 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어른들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는 걸까, 왜 저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나. 싸우는 건 나쁜 거 아닌가, 궁금하고 무섭고 화가 났다. 아마도 인간들의 어떤 부류는 끔찍이도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예외없이 그런 무리들은 어디에나 있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야야! 장난치냐? 좀 더 격렬하게 싸워야지! 그렇게 미적거리면 누가 코인을 주겠냐?"

철창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상대의 전신을 난자하며 싸웠다. 피가 튀고, 눈이 뽑히고, 내장이 흘러내린 이들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콜로세움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즐거워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04 중 21쪽

여태까지의 미션들은 스스로의 몸을 지키면서 살아남는 것에서부터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까지가 전부였다면 이제 레벨은 점점 더 오르기 시작해서 인간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대적하기 힘든 재앙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독자는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한철을 만나게 되고 그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능력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뭉개지는 송민우의 얼굴을 보며 모처럼 십대의 한철을 떠올렸다.

무력했고 나약했고 책밖에 모르던 나.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안에는 분명 아직도 '열일곱 살 김독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떨리는 주먹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한수영의 말은 옳았다.

세상에 뻔한 트라우마는 없다.

고작 이런 복수로 내 트라우마가 완전히 없어질 리도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악몽을 꿀 것이고, 열입곱 살 김독자는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박제되어 비극을 반복하겠지.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겠지.

그러니 이제는 담대한 마음으로 폭력을 멈춰야 할 때였다.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04 중 70쪽

<전지적독자시점>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웹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RPG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웹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어릴 것이다, 세상을 모를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읽다보니 이 소설은 게임이라는 스타일을 이용했을 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해서 아주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게임을 하는 동안 게임하는 인간들을 후원하는 성좌들을 역사적 인물들이나 신화 속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들의 특성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과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진진하고 재미가 있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버프를 가진 유중혁과 그의 레벨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그의 모든 미래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최대 강점인 김독자를 중심으로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진짜 한가지 방법을 알아내려는 두 사람의 살벌한 브로맨스도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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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3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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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일대 전체에 은근한 전운이 감돌았다. 폭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감. 병장기를 꺼내 드는 소리, 전열을 가다듬는 목소리가 살풍경한 빌딩 숲 사이사이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잠시 후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승진을 위해 경쟁하던 사람들은 진짜 칼을 들고 서로 죽일 것이고, 더 넓은 평수의 집을 원하던 사람들은 더 많은 역을 점거하기 위해 서로 깃발을 빼앗을 것이다.

서로 죽이고, 더 좋은 아이템을 차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전지적독자시점> 3권 중 216쪽

현대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을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비록 출발점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사회로 나오면 연봉으로, 타고 다니는 차의 배기량으로, 살고 있는 집의 평수로, 늙어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비교하고 비교당하면서 그렇게 줄세우기를 시작한다. 타고 난 배경에 따라 누군가는 흙수저로 불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금수저, 다이아몬드 수저라고 불린다. 똑같이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들어가서 누군가는 편하게 공부만 하면서 쉽게 스펙 쌓으면서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일찌감치 빚쟁이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니 강남의 높은 빌딩 숲과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 아파트들이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고 편히 쉴 안식처 같은 곳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자신들의 숨을 조일 듯 짓누르는 거대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 시내 주요 지하철 역사들을 점령하고 그곳에 승전기를 꽂으면 그 역사의 왕이 되고, 더 많은 역사를 점령하면 할수록 깃발은 그 색을 달리하게 되고, 왕의 스펙도 올라가게 된다. 김독자도 진짜 전투를 치르며 역사들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누구보다 한발이라도 앞서가기 위해 온갖 스펙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 결과로 김독자와 같이 계약직으로 입사했지만 이제 정직원이 된 유상아와 왕따를 당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정직원이 되기엔 스펙도 뭣도 모자라던 김독자의 처지는 이제 완전히 뒤바뀌어 멸살법을 완독한 김독자는 무리의 왕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유상아도 현실 속에서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실력을 발휘하여 이 새로운 세상에도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20개의 역사를 점령한 왕들끼리의 전투. 말하자면 왕중왕전이랄까. 그 전투에서 살아남게 된 마지막 하나의 왕은 절대왕좌에 앉을 수 있게 되고, 김독자는 그 하나의 왕이 된다. 그리고 그는 유중혁이 걸었던 그 길이 이 세상을 반전시킬 수 있었는지를 곰곰 생각하고는 여태까지 아무도 내리지 않았던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체 언제까지 도깨비들 '시나리오'에 무력하게 끌려다닐 겁니까? 누군가 절대왕좌에 앉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모릅니까?"

한번 '복종'에 길든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전지적독자시점> 3권 중 333쪽

세계관 자체가 게임베이스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드라마화 된다면 아마도 가장 인기있는 캐릭터 중 하나일 '정희원'은 매권마다 불타는 정의감으로 사이다를 날려준다.

"세계가 어떻게 변해도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어요. 전 분명 그런 게 있다고 믿어요."

<전지적독자시점> 3권 중 335쪽

세상이 변했으니, 이젠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여태까지의 모든 윤리니 도덕이니를 다 벗어던진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희원처럼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전지적독자시점>의 세계처럼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반전이 아니라도 지금의 세상은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상식'이라는 선이 어딘가 조금 다른 곳에 그어져 있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된다. 어쩌면 내가 꼰대라서 일수도 있고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가치관이란 '인간성'과 '도덕성'에 근본을 두고 있고 그래서 결국 세계가 멸망을 하든, 아무리 발전을 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정희원의 말처럼 '잊지 말아야 할 가치'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독자에게 다음 회차가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다음 회차란 없고 그래서 김독자와 마찬가지로 우린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해야 하는 법이니까. 우리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가 써내려가야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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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2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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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가 읽고 있던 소설 속 멸망한 세상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는 바로 김독자 자신. 그는 작가에게서 받은 선물을 최대한 활용해가며 시나리오들을 클리어 해나가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게임의 치트키를 쓰는 셈이겠지.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자가 과거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 미래의 이야기가 뒤바뀌듯이 김독자의 활약과 김독자와 함께 하는 인물들의 약진으로 이야기는 조금씩 변주되기 시작한다. 기본 틀은 바뀌지 않지만 김독자의 인물정보열람에 뜨지 않는 즉 김독자가 읽었던 소설 속에서는 비중이 없었거나 이미 죽었어야 하는 인물들이 김독자와 함께 퀘스트를 클리어 하면서 레벨업 하게 되는가 하면 오리지널 소설 속의 최강자 유중혁과 함께 하면서 진즉 레벨 상위권으로 도약했어야 할 인물이 더디게 레벨업이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2권에서는 이제 유약한 마음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주요인물들이 김독자를 신뢰하면서 함께 팀을 이루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른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여 그것의 뼈로 살상무기를 만들거나 익혀 먹으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문명사회에서 교육받았던대로 혹은 그들의 본성대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되도록이면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김독자는 이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누구를 떼어내고 누구를 처치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가며 앞서 행동하지만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팀을 이루고 있는 정희원과 길영이, 유상아, 이현성의 캐릭터를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파악하여 그들의 레벨을 효과적으로 올리는 것도 김독자 본인이 필요에 의해서이지만 결국 팀원들은 김독자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게 한다는 것도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하철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2권에서 건물주 조합이 나온다. 1권에 나왔던 회사 부장 한명오처럼 세상이 멸망했는데도 자기들이 건물주라면서 위세를 떠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 참 우습다. 게임을 하듯 시나리오가 배달되고 그 시나리오를 전달하는 것은 도깨비들이 운영하는 채널이다. 그 채널들을 보고 성좌들이 게임을 실행하는 인간들을 후원하고 하는 것들이 흡사 가장 최근의 <오징어 게임>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헝거게임>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가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게임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인데도 그들을 후원하는 성좌들 중에는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있다. 그들을 '절대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왜 발동이 안 되는 거죠? 그놈들도 분명 악인인데?"

나는 정희원의 의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우리 인간들 생각이겠죠."

"무슨 소리예요?"

"성좌들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선악이 그들이 아는 선악과 같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

"정의는 때로 다수의 판결일 뿐이에요."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2 중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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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1 전지적 독자 시점 1
싱숑 지음 / 비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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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부터 아들로부터 읽기를 강권당했던 웹소설이 있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당시 나는 기본적으로 독서란 책으로 하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이 아직 깨지지 않은 상태여서 사람들이 그렇게 편하다고 추천하는 전자책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하물며 웹소설이라니, 내 취향이 아니어도 너무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하도 읽어보라고 졸라대는 통에 몇화 읽었는데 RPG게임을 옮겨온 것 같은 레벨이 어쩌고, 흑화가 어쩌고, 업적보상이니 코인획득이니 하는 내용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도 집중해서 읽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게임이라고는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오락실에 가서 기껏해야 헥사, 테트리스 혹시 전투게임이라면 갤러그나 1942 정도나 하던 옛날 사람이 RPG게임 베이스 소설, 그것도 플랫폼 기반 웹소설이라니! 아들은 늘 웹소설을 읽고 아래쪽에 댓글들까지 읽어가며 독파해나가곤 하는데 아, 이래서 세대차이를 느끼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읽게 될 운명이었던 건지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전권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아무렴, 그래도 독서는 종이책이지, 하며 읽기 시작하니 확실히 눈에 더 잘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다.

<전지적 독자 시점> part.1 01 중 77쪽

부부작가 싱과 숑이 함께 쓴 <전지적 독자 시점> 주인공의 이름은 김독자. 그는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3149화의 유일한 독자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작가와 함께 한 선물로 <멸망 이후의 세계>라는 파일을 작가로부터 전송받게 되고, 자신이 보던 웹소설이 유료화 되는 그 시점에 세상이 그 작품 속의 내용과 똑같이 변모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게임을 하게 되면 아무리 단순한 게임이라도 레벨이라는 것이 있고, 그 레벨에서 주어진 내용을 클리어 해야만 레벨업이 가능하게 된다. 제법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멸망시켜버린 이 거대한 게임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그 게임의 스토리와 진행내용을 아는 김독자는 회귀자로 알려진 유중혁과 함께 작품 속 게임을, 그리고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처음엔 나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게임을 바탕으로 한 낯선 용어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었을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 싱숑의 시선은 이미 세상을 향한 통찰이 있는 깊이 있는 것이었기에 느끼는 바가 많았다.

계약 갱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었던 김독자를 향해 함부로 굴던 한명오. 그는 김독자가 다니는 회사의 부장이었고 무너진 세상에서도 자신의 직급타령이나 하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한없이 연약하다는 것에 자조하는 김독자를 보고 있자니 새삼 뻔한 세상의 뻔한 인간들에 대한 실망감이 함께 느껴졌다.

나는 가끔 생각했다.

왜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는 '뻔한 악당'이 등장하는가?

그런 상황에서까지 강간이나 절도 같은 범죄가 무분별하게 일어날 거라 짐작하다니 작가들의 게으름 아닐까? 진짜 '멸망'이 닥치면 인간은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을까.(중략)

새삼 깨닫는다. 인간의 상상력은 진부하고, 실제의 인간은 그 상상보다 더 진부하다는 것을.

<전지적 독자 시점> part.1 01 중 205~206쪽

어쩌면 그렇게 뻔하고 진부한 일들을 벌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곳에서는 다음날을 기약하고, 다른 이와의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예의범절'이라는 것을 앞에 두고 살아가게 된다. 내 진심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멸망'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는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오늘만이 중요할 뿐이다. 당장의 내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 나를 살릴 수 있다면 나보다 약한 자를 먼저 쳐야 한다는 것을 생존본능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귀자로 나오는 유중혁이나 주인공인 김독자 또한 절대적인 선인이 아니다. 결국 최초의 시나리오가 열렸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의 생명을 내손으로 제거해야만 다음 레벨로 진행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멸망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라는 것이 지독히도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결국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삶이란 결국 혼자만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말하는 건 아닐까.

코인을 얻은 자는 살아남았고, 코인을 얻지 못한 자는 죽었다. 그리고 누구도 서로 구원해주지 못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 part.1 01 중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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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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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너무 많은 걸 바랐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걸 잃을 때이다.

당연한 건강, 당연한 세 끼 식사, 당연한 잠자리. 그때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달콤한 숨결> 중 443쪽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후미에는 남편의 월급으로 한푼 두푼 아껴가며 생활을 하지만 육아와 집안일에 지치고 예전과는 달리 후덕해진 몸매에 자존감도 떨어진데다 해리성 장애 진단을 받고 정신적으로도 몹시 약해져 있는 상태이다. 유일한 낙이라면 이런저런 이벤트에 응모해서 작은 선물들을 받곤 하는 것이었는데 한 유명 연예인의 디너쇼 티켓을 이벤트 상품으로 받고 기분전환 겸해서 참석하게 된다. 거기서 우연히 중학교 동창생인 가나코를 만나게 된 후미에. 가나코는 중학교 때 너무나 예뻤던 후미에를 동경했었고,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때 따뜻한 말을 건넸던 후미에에게 더더욱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여태껏 지내왔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그 고마운 마음에 꼭 보답을 하고 싶다며 일자리를 제안하는 가나코. 후미에는 그녀가 잘 기억나지도, 자신이 했다는 그 따뜻한 말도 잘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가나코의 진심어린 말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가나코가 용기를 북돋워 준 덕분에 다이어트에도 성공하고,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되면서 잃었던 자존감도 되살아나고, 거기에 더불어 가나코가 제안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금전적인 풍요로움까지 생기게 된다. 가나코를 만난 이후 좋은 일만 생기기 시작한 후미에는 그간 먹었던 정신과 약에 덜 의존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형사들의 방문, 그리고 그간 후미에가 가나코라고 믿어왔던 여자의 존재를 증명할 그 무엇도 없는데다 후미에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쇼고가 사실은 쇼고라는 인물이 아니라 다자키 미노루라는 이름의 사람이며 형사들은 그가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완벽하게 후미에가 살인범으로 몰리도록 설계된 사건이었다. 다자키 미노루가 살해당할 당시 후미에의 알리바이를 대줄 사람이라고는 후미에의 어린 두 자녀 뿐이었는데, 후미에의 말을 들은 형사들이 찾아들고 온 서류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후미에에겐 어떤 비밀이 있으며, 가나코는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후미에를 그토록 완벽하게 속였을까?

후미에는 조사를 받으며 사실은 가나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나코의 행방에 대해 후미에는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정신과 약의 부작용으로 자신이 혹시 환영을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스스로를 믿지 못할 정도다. 가나코의 뒷조사를 시작한 형사들도 도대체 가나코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생각나기도 했다. 귀신이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듯이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자신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사람. 애초에 시작이 어떤 연유에서였든 결국 자신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짓밟아버렸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진짜 이름이 도모요로 알려진 가나코는 자신의 거짓말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했다. 그렇기에 바보같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을 쉽게 믿어버린 그 사람들이 더 잘못이라고 코웃음치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어쩌면 도둑질보다 더 악질적이고 나쁜 짓이 '사기'일지 모른다고. 왜냐하면 도둑질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누군가의 것을 훔치는 일이지만 사기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 자기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10원이 필요한지, 100원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 그 10원 혹은 100원을 위해서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벌이는 일이라고 했다. 도모요는 각기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인 척 다가가 그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채워주면서 신뢰를 얻었고 그렇게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다. 후미에에게는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더 싼 슈퍼를 찾아다닐 필요없다고 속삭였다. 사고로 두 아이를 잃고 그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후미에의 금이 가버린 유리같은 정신을 파고들었다.

원제는 <네펜테스의 달콤한 숨결>이라고 하는데, 네펜테스는 벌레잡이통풀이다. 잎 가장자리에 달콤한 꿀샘이 있는 이 식물에 이끌려 곤충이 다가오고, 미끄러져 꿀샘 안으로 빠지면 그 곤충을 소화시켜 버린다. 달콤한 숨결, 이라고만 했을 때는 제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네펜테스까지 붙이니 정말 제목으로는 이보다 더 정확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알아내 그걸 모아둔 꿀샘을 만들고 그 꿀샘 안으로 빠져들면 아주 마지막 하나까지 쥐어짜 소화시켜 버리는 범죄를 저질렀던 도모요와 그녀의 범죄를 끝까지 파헤치던 형사 하타와 나쓰키의 조합도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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