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원제는 Twisted Wing, 비틀린 날개라는 뜻이다. 작품 안의 법의학자 매튜가 저술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비틀린 날개'는 기생 곤충의 이름이며, 실제로 날개가 꼬여 있는 형태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 학명으로는 '날게병신목', '부채벌레목'이라고도 불리는 이 곤충은 숙주의 몸을 잡아 먹고 숙주를 완벽하게 의태하여 다른 곤충들 사이에 능란하게 섞여 살아가는 곤으로, 이 작품 안에서는 실제로 우리 주변에 흔히 있고, 편한 친구나 이웃으로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사회적 성격이상자이거나, 살인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의 제목이다. 번역을 통해 원제의 비틀린 날개 대신 '일곱 번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역시 주인공인 올리비아가 가진 이름들이 일곱 개라는 의미, 그리고그 일곱 이름들 중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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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명문 케임브리지를 피로 물들인 여대생 연쇄살인!

아름다운 희생자와 입을 다문 천재들, 그리고 기억을 잃은 목격자!

 

사건 ㅣ 영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일어난 여대생 연쇄살인. 범인은 캠퍼스 한가운데에서 신체 일부를 가져가는 대담함을 보였다.

희생자 ㅣ 케임브리지의 여신 '아만다', 귀여운 소녀 '일라이저', 강인하고 당찬 '준'. 모두 기숙사나 캠퍼스에서 살해됐고, 끔찍하게 훼손되었다.

단서 ㅣ 사라진 머리, 망가진 시신, 기억을 잃은 목격자.

목격자 ㅣ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잠재적 용의자이며 어쩌면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를 작고 연약한 소녀, 올리비아.

일곱 개의 이름 ㅣ '메리, 헬렌, 반나, 주드, 켈리, 크리스티, 그리고 올리비아...그중 어떤 것도 내 진짜 이름은 아니에요." 올리비아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법의학자 매튜, 그녀의 순수한 얼굴 뒤에 감춰진 다른 이름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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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학교. 앞선 살인사건의 희생자 아만다와 일라이저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점을 들어 연쇄살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던 경찰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또 다시 세번째 살인이 일어난다. 사건 현장에는 피에 물들어 시신에서 비어져 나온 내장을 수습하고 있던 닉과 속옷만을 입은 채 역시 피에 물들어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듯한 작고 가녀린 올리비아가 있었다. 경찰은 유일한 목격자인 올리비아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법의학자인 매튜로 하여금 올리비아의 기억을 되짚어 살인이 있었던 순간을 알아내고자 한다.

 

이 과정 중에서 매튜는 올리비아가 닉과 있을 때도 가끔씩 눈이 비어버린 듯한 멍한 표정과 함께 실제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상담을 진행하던 어느 날, 닉이 말하는 그 공허한 표정과 함께 헬렌이 나타났다.

 

"좋아요, 좋아요. 언제쯤 알아채나 궁금했답니다. 제 이름은 헬렌이에요, 데니슨 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식적으로 말이에요."

 

그야말로 학대속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로 오기까지의 모든 시간동안을 성적,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아왔던 올리비아는 해리성 정체 장애, 흔히 다중인격장애라고 알려진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곱 개의 다른 이름, 일곱 개의 다른 자아, 일곱 개의 다른 나이. 5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8세부터는 삼촌이라고 불리는 남자들을 손님으로 받아왔던 올리비아.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집을 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잘려나가고, 수도 없는 자상에, 배를 갈라 창자를 모두 끄집어낸 그 끔찍한 범죄는 모두 올리비아가 저지른 일이었다. 매튜는 너무 끔찍한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올리비아의 다중인격장애를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그녀의 처지를 안쓰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범행을 자백하는 올리비아의 진술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멍들이 존재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스티븐과 매튜는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던 와중, 매튜와 스티븐은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반전, 그리고 반전, 또 반전을 거듭한다. 이야기도 첫 살인사건이 있었던 날부터의 이야기와 세번째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를 교차로 진행시키며 두 이야기의 접점을 향해 흘러가고, 그렇게 두 이야기 사이에서 독자도 함께 단서를 찾아가며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로 치달아간다. 

 

요즘에는 다중인격장애를 다루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충격적인 이야기 구성의 하나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 보편화 되어 있는 상황이라 뻔한 구성이나 반전이라면 오히려 김이 샌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전도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반전에 이르는 동안의 인물구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라서 책을 손에서 놓기 쉬운 책은 아니다.  마지막 50페이지가 이토록 숨 가쁘게 넘어간 책은 없었다는 표지의 광고문구 때문에라도 마지막까지 보고서야 비로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올리비아의 캐릭터는 그녀에게 이끌리는 법의학자 매튜만큼이나 독자들을 쥐었다 폈다 한다.

 

사.족

조금 오래 된 영화이긴 하지만 1996년 작품인 <프라이멀 피어>를 생각나게 하는 구성이다. 리차드 기어가 정신감정을 맡은 박사로, 예일대를 졸업한 수재 에드워드 노튼이 범행 장소에서 피범벅을 한채 도망치던 다중인격을 가진 애런 역으로 나온 영화로 아주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구성이나 편집, 무엇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소름끼치는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덕분에 반전영화, 하면 프라이멀 피어를 떠올리게 된다. <일곱 번째 이름>의 올리비아와 같이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던 애런이 다중인격장애를 호소하게 되면서 그의 정신감정을 맡은 박사는 그에게 동화되어 그를 돕고 싶은 마음에 전적인 신뢰를 보여주게 되고, 그 와중에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충격적인 스토리와 열연에 힘입어 여태까지도 내 마음속의 반전영화 1위인 <프라이멀 피어>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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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틀리
알렉스 플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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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아버지는 방송국 뉴스 앵커야. 사람들이 못생긴 인간을 볼 필요가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그럼 네가 못생기게 별하지 않길 바라는게 좋을 거야, 카일. 넌 지금도 가장 중요한 마음속이 흉측하거든. 만약 네 잘난 외모를 잃게 되면 그걸 되돌릴 수 있을 만큼 영리하지도, 강하지도 않을 게 분명하고. 카일 킹스버리, 넌 야수같아." -p.16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만큼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카일. 그는 왕자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정도로 완벽하다. 빛나는 금발에 푸른 눈,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 돈 많은 앵커 아버지를 둔 부잣집 외동아들. 그 외모와 돈을 권력으로 휘둘러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의 조건을 가졌다. 그런 그 앞에 켄드라 힐퍼티가 나타난다. 늘 머저리들을 걷어차서 울리고, 좀 더 괴롭혀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카일은 고스족에 뚱뚱하고 못생긴 켄드라를 놀려주기로 맘 먹고 파티의 파트너로 초대한다. 사실은 학교의 퀸카 슬로언과 파티에 갈거였으면서 말이다. 단순히 놀려주고 싶었고, 울길 바랬지만 그 여자애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게 진심이었느냐고, 정말 자기를 바보꼴로 만들기 위해 댄스파티 파트너로 초대해놓고는 다른 여자애랑 나타난거냐고. 다른 아이들도 낄낄거리며 켄드라를 비웃고 카일도 켄드라를 바보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켄드라는 울지 않았다. 창피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에 본 오래된 스티븐 킹 영화 <캐리>에 나오는, 염동력으로 싫어하는 애들을 죄다 내던지는 주인공 여자애처럼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켄드라가 정말 그렇게 하는 장면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죽이는 초능력을 사용하는 장면이. 하지만 대신 켄드라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 p.39

 

그리고 그렇게 카일은 괴물이 되었다. 온 몸이 털로 뒤덮이고 송곳니가 앞으로 튀어나오고 손과 발에 손톱과 발톱이 튀어나온, 고릴라도 곰도 아닌 정체불명의 야수로 변한 것이다. 켄드라는 말했다. 카일이 행했던 일들은 모두 못됐지만 그 중 위로가 될만한 작은 착한 일 하나가 있어 기회를 주겠다고. 2년 안에 그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그녀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키스를 하게 되면 원래의 모습을 돌려주겠다고 말이다. 자, 이제 과연 그 누가 있어 입술이라 부를 수도 없이 변해버린 그의 얼굴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키스를 해 줄 것인가!!

 

21세기, 뉴욕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미녀와 야수>인 <비스틀리>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만 본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왕자님, 카일. 그는 개구리 왕자처럼 혹은 거대한 성안에 홀로 버려진 야수처럼 마음 착한 공주님을 찾아 2년을 헤매인다. 사실 개구리왕자님은 그렇게 마음씨 좋은 공주님을 만난 것도 아니다. 공을 주워주면 같이 밥도 먹어주고, 잠도 자주겠다고 했으면서 공주님은 공을 주워주자마자 집으로 내빼버렸고, 지성을 가진 임금님께서 그나마 달래고 달래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다 그만 화가 폭발하여 개구리왕자님을 벽으로 집어 던져버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어이없게도 그 순간 왕자님으로 변했고, 왕자님으로 변한 순간에 왕자님의 미모에 반한 공주님은 사랑을 맹세하고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나마 <미녀와  야수>의 야수는 벨이라는 마음 착한 소녀와 사랑을 이루는 과정이 눈물겹고 진실하다.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 채 성에 홀로이 살 던 왕자님은 정원의 꽃을 꺾던 벨의 아버지에게 벨을 데려오라고 하고, 벨은 야수와 함께 성에서 살아가다 집으로 도망쳐 온다. 그러다 다시 돌아가보니 야수는 아파 쓰러져 있고, 그런 야수를 본 벨은 그간 정이 들었는지 눈물을 흘리며 마음 아파하고, 야수에게 마음을 담은 키스를 하고 그 키스에 야수는 왕자님으로 거듭나고 해피엔딩.

 

카일도 벨과 같은 여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그동안 무기로 삼았던 외모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다. 돈이면 다 해결될 것 같았지만, 돈으로도 자신의 외모를 처음으로 돌릴 수도 없으며 더구나 돈으로 사랑을 살수는 더더욱 없다. 그동안 자신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하며 자신의 곁에 있고 싶어했던 슬로언도 자신의 괴물같은 모습에 몸서리치며 도망쳐버렸다. 아버지라는 사람도 가정부와 눈먼 가정교사를 붙여 감옥같은 집에 버리고 가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도, 그런 자신을 사랑해 줄 여인을 찾을 수도,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다. 카일에게 빛나는 햇살같은 날은 돌아올 것인가.

 

동화 <미녀와 야수>를 현대판으로 각색했다고 하는 것이 딱 맞을 것 같은 청춘판타지 소설쯤 된다. 이미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세상을 이제 반쯤 살았다고 생각하는 '아줌마'본색을 드러내자면 사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카일이 벌을 받는다는 의미로(그간 돈 많은 멋진 남자라는 걸 무기로 마구 휘둘렀다는) 괴물로 변했으며, 외모라는 것은 사실 사라져버리는 그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랑을 말할 때조차 외모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그 잘난 마음을 버리라고 그렇게 과한 벌을 준거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카일이 가진 그 무한한 富는 어쩔 셈인지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괴물로 변한 카일이 사는 집은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살던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가정부가 있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몇 배쯤 되는 돈을 받으며 미래를 보장받기로 약속한 가정교사가 있다. 카일의 마음에 드는 여자애를 데려오기 위해 아버지가 카일을 버려둔 죄책감으로 두고 간 신용카드를 무한정 긁어 완벽한 인테리어를 해둔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깨닫고 착한 남자로 변했다고 해도 그 남자가 가난하다면, 어느 슬럼가에 데려다 놓고 사랑을 고백한다고 해도 그 사랑이 먹힐까 싶은거다.

 

출간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바로 3월이면 영화가 개봉을 한다고 한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남자배우 알렉스 패티퍼와 스타일리쉬의 대명사 바네사 허진스, 백만장자 쌍둥이 중 메리케이트 올슨이 주연을 맡았다고 하니 헐리우드에선 정말 핫한 영화로 손꼽히지 않을까 싶다. 책에 붙은 띠지 위의 포스터를 봤을 땐 바네사가 마녀인 줄 알았다. 
 

 

 

 

 

 

 

 

 

 

 

 

 

 

 

 

 

 

 

 

※카일의 가정교사로 나오는 윌역의 이 남자, 누군지 기억나시나요?  보는 이가 연식이 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이 남자

      정답은? ->[ 천재소년 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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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모어 이모탈 시리즈 1
앨리슨 노엘 지음, 김경순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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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당한 교통사고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에버는 사후경험을 겪은 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부르게 될만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타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 색채의 소용돌이를 감지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들렸고, 누군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인생사가 보였으며, 죽은 여동생 라일리의 주기적인 방문을 즐기게 되었다. 에버는 더이상 평범하지 않은 여고생이 된 것이다. 끈임없이 들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에버는 이어폰을 꽂았고,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고, 그런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후드티로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 왕따의 길을 걸었다. 그런 그녀 앞에 놀랄만큼 잘 생겼으며, 완벽하기까지한 데이먼이 나타난다. 에버의 가슴이 뛰는 건 꼭 그가 잘생긴 남자여서뿐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오라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현란한 색채의 소용돌이...감정이 변할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오라가 없다. 에버가 아는 한, 여태 알았던 모든 사람 중에 오라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 뿐이다.

에버모어는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던 것의 실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불사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여 상상력을 확장시킨 이야기이다. 에버가 죽음을 경험하면서 갔었던 죽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의 경계에 있는 공간과 공간사이의 서머랜드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미드 '고스트위스퍼러'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다. 죽은 사람이라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옳지만 무언가 '이 세상'에 아쉬움을 남기고 온 이들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아 영혼이 떠돌게 된다. 우리 말로는 '구천을 헤맨다' 정도가 될까?? 에버의 동생 '라일리'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된 언니와 교감하며 이승을 떠돌게 된다. 여기에 나타난 데이먼은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에버의 곁을 맴돌던 '불사자'이다.

고전적인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치명적인 비밀과 어둠, 미스터리한 존재와 초능력, 완벽한 아름다움과 부를 소유한 남자와의 로맨스. 그와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또다른 연적..끝나지 않는 네버엔딩 러브스토리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에버와 데이먼의 러브스토리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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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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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콘로이는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사우스브로드>를 읽기 시작한 때부터 끝난 때까지 느낀 가장 큰 느낌은 팻 콘로이라는 작가가 적절한 유머와 유려한 말솜씨로 긴 호흡의 서사를 풀어내는데 아주 훌륭한 작가라는 점이었다. <사우스브로드>는 레오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1969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지는 어찌보면 개인사, 어찌보면 남부의 찰스턴이라는 지방의 지역사, 또 어찌보면 아직도 남부적 이미지를 가진 역사속의 한 시대를 다룬 시대사라고도 볼 수 있는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생각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소설로 치자면 <토지>의 한 부분이거나 <왕룽일가>같은 분위기랄까?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이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 이야기는 찰스턴이라는 곳이 남북전쟁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먼저 알려주고 시작한다. 노예해방이라는 것이 이루어진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레오가 살고 있는 찰스턴이라는 곳은 아주 찰스턴스러운 사람들이 만들어 온 지극히 찰스턴스러운 동네이다. 레오의 가정은 어찌보면 완벽하다. 자상한 아버지,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어머니, 금발에 운동을 잘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형,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레오를 걱정하며 보호해주는 영웅과도 같은 형, 그리고 레오. 너무나 완벽해 질투를 할 수도 자격지심을 느낄 수도 없었던 형이 죽고 난 뒤 레오의 가족은 집단 신경쇠약에 걸린 것 같았고 레오는 표류하기 시작한다. 형의 자리를 대신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레오를 어머니는 분노했고 경멸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었고, 찰스턴 사람들 모두를 취하게 만들만큼의 마약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이유로 보호관찰까지 받았던 레오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기로 결정한다.

1969년 6월 16일. 그 날은 레오의 어머니가 신앙처럼 받드는 어느 작가를 위한 날로 블룸스데이라고 불리는 날이었다. 그 날, 서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사우스브로드>의 주된 줄거리가 된다. 레오의 앞집으로 이사를 온 한 가족, 성유다 고아원에 도착한 두 명의 고아, 마약단속에 걸린 고등학생 두 명, 그리고 어머니가 수녀였다는 사실. 레오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만나게 된 이 관련없던 다른 고등학생들이 레오의 인생을 지탱하는 우정이 되고 사랑이 된다. 알콜에 찌든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사랑스러운 시다 포와 트레버 포라는 남녀쌍둥이, 공립학교 최초의 흑인풋볼 코치와 그의 무뚝뚝한 아들 아이크, 고아원의 나일즈와 스탈라 남매, 찰스턴 상류사회의 표지와 휘장을 두른 것 같은 채드와 몰리까지.. 그들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이었지만 두꺼비 레오라고 불리는 한 소년으로 인해 친구가 되었고, 한 시대의 벽을 뚫고 다른 시대로 가는 인물들이 되었다.

<사우스브로드>는 레오가 살고 있던 시대와 지방을 이해하는데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인 1969년에 레오는 18살이었으니 그는1950년 생이다. 그의 부모들은 아마 1920년쯤 태어났을 것이다. 찰스턴이라는 남부의 한 지방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은 아직도 남북전쟁이 일어났던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흑인이라든가 고아라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시기이다. 노예는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인종차별은 만연하고, 여성은 남성의 보호아래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습이 있었던 시기. 그러나 여성의 성혁명과 흑인인권운동 같은 것도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회내의 부조리에 의한 갈등이 극심했던 때,  원자폭탄이니 냉전등에 의해 미래가 불분명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한 젊은 이들 사이에서 히피족이나 마약중독과도 같은 문화가 생겨난 그 시절에 정신병력이 있었으며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던 레오, 자유로운 성의식을 가진 여배우 시바, 동성연애자인 트레버, 고아이면서 상류층의 프레이저와 결혼한 나일즈, 흑인풋볼선수에서 경찰이 된 아이크, 상류층 전형의 채드와 몰리, ’어머니’로서의 mother가 아니라 ’수녀님’으로서의 mother역할만을 한 레오의 어머니, 자살을 택했던 형이 꿈에서도 피하고 싶었던 ’Father’의 이중적 의미, 레오의 아르바이트인 신문배달이 가지는 의미등은  <사우스브로드>의 이야기 속에서 많은 시대상황을 한 번에 대변하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레오의 신문배달 자전거를 따라 이야기가 흘러갈 때는  찰스턴을 따라 흐르는 애슐리강이 보이는 듯 부드럽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보여주다가도, 트레버와 시바의 이야기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흘러갈 때는 추리스릴러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레오와 친구들의 대화속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릴만큼 유머와 위트가 넘치기도 한다. 길고 긴 이야기속에서 흐름을 놓치지 않는 비범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팻콘로이의 이야기속으로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가장 민감했던 시기에 부딪쳐야 했던 레오와 그 친구들...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로 인해 힘이 들었던 친구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감싸안아주며 넘기고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는 동안 많은 것을 잃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에선 말이야,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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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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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처음 <양을 쫓는 모험>으로 접하였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여 다른 책은 사지 않아도 하루키의 책은 꼭 사보곤 하는데, 나도 어느새 하루키의 책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문장들을 베껴 편지에도 많이 써먹었다. 주로 장편집을 가지고 있고, 단편집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도서관에 가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려온 아이가 바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회고록 혹은 자서전을 쓰지 않겠다고 한 하루키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일종의 하루키 회고록, 혹은 자서전으로 갈음할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하루키이고 문학계에서 아시아인으로는 드물게 아주 크게 성공한 작가기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하루키의 개인적 감정이나 회고록을 애타게 기다려온 독자는 아닌 다음에야, 회고록이라든가 자서전이라든가 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아주 훌륭한 작가의 자서전을 읽었다는 기쁨보다는 인생에 대한 심도있는 조언을 얻었다는 느낌, 그리고 어떠한 자기계발서 한 권을 읽은 것보다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컸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축으로 하여 하루키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달리기라는 것과 책을 쓰는 일이 단순히 달리기, 책 쓰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므로  나와는 관련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인간사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폐쇄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의 하루키가 하루 종일 앉아서 글을 쓰다보니 살이 찌게 되었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글을 쓰려면 운동을 해야겠는데, 다른 도구나 상대가 필요하지 않은 조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온몸의 근육들이 소리를 지르며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고 파업을 하려할 때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위안하며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하루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만트라(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나도 인생이라는 달리기에 있어 만트라로 되뇌이게 되었다. 바로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번역으로는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이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극히 간단하게 번역하면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가 된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p. 9)

 여기에는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해도, 어떤 종류의 경험칙과 같은 것은 얼마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의 신체를 실제로 움직임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잘 응용할 수 있는 범용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p. 서문)

 


그렇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달리기, 글쓰기는 하루키에게만 해당하는 일일지 모르지만 하루키의 철학이 나에게 부합하는 범용성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인생이란 장거리 달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키가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하고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기는 것..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장거리 러너 라는 것.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p. 258)

 


바로 앞에 읽었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이 생각났다.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하루키는 달리기를 통해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장거리 달리기는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다. 나 스스로의 거리를 충분히 열심히 달려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남이 내 앞을 추월해서 달려간다고 해서 나를 자책하거나 앞서간 다른 사람을 배아파하고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고 나는 내 길을 달려가는 것이다. 충분히 열심히 달리는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   

소설로만 알던 하루키와는 완전히 다른 하루키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하루키는 자신이 가진 문학적 위상보다는 훨씬 겸손한 사람인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또다른 욕심과 부질없는 자존심을 덜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곱씹어 볼수록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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