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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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처음 <양을 쫓는 모험>으로 접하였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여 다른 책은 사지 않아도 하루키의 책은 꼭 사보곤 하는데, 나도 어느새 하루키의 책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문장들을 베껴 편지에도 많이 써먹었다. 주로 장편집을 가지고 있고, 단편집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도서관에 가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려온 아이가 바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회고록 혹은 자서전을 쓰지 않겠다고 한 하루키이기 때문에 이 책이 일종의 하루키 회고록, 혹은 자서전으로 갈음할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하루키이고 문학계에서 아시아인으로는 드물게 아주 크게 성공한 작가기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하루키의 개인적 감정이나 회고록을 애타게 기다려온 독자는 아닌 다음에야, 회고록이라든가 자서전이라든가 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아주 훌륭한 작가의 자서전을 읽었다는 기쁨보다는 인생에 대한 심도있는 조언을 얻었다는 느낌, 그리고 어떠한 자기계발서 한 권을 읽은 것보다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컸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축으로 하여 하루키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달리기라는 것과 책을 쓰는 일이 단순히 달리기, 책 쓰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므로  나와는 관련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인간사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폐쇄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의 하루키가 하루 종일 앉아서 글을 쓰다보니 살이 찌게 되었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글을 쓰려면 운동을 해야겠는데, 다른 도구나 상대가 필요하지 않은 조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온몸의 근육들이 소리를 지르며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고 파업을 하려할 때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위안하며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하루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만트라(신들에 대하여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인 어구)를 나도 인생이라는 달리기에 있어 만트라로 되뇌이게 되었다. 바로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번역으로는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이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극히 간단하게 번역하면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라는 의미가 된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p. 9)

 여기에는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해도, 어떤 종류의 경험칙과 같은 것은 얼마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의 신체를 실제로 움직임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잘 응용할 수 있는 범용성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p. 서문)

 


그렇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달리기, 글쓰기는 하루키에게만 해당하는 일일지 모르지만 하루키의 철학이 나에게 부합하는 범용성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인생이란 장거리 달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키가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하고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기는 것..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장거리 러너 라는 것.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p. 258)

 


바로 앞에 읽었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이 생각났다.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하루키는 달리기를 통해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장거리 달리기는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다. 나 스스로의 거리를 충분히 열심히 달려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남이 내 앞을 추월해서 달려간다고 해서 나를 자책하거나 앞서간 다른 사람을 배아파하고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고 나는 내 길을 달려가는 것이다. 충분히 열심히 달리는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   

소설로만 알던 하루키와는 완전히 다른 하루키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하루키는 자신이 가진 문학적 위상보다는 훨씬 겸손한 사람인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또다른 욕심과 부질없는 자존심을 덜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곱씹어 볼수록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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