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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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박쥐>라는 영화의 모티프로 관심을 받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1867년에 씌여졌다. 프랑스 파리 퐁네트 파사주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병약한 사촌 까미유와 결혼한 테레즈가 남편과는 다른 기질의 로랑과 만나면서 그동안 감추고 있던 자신의 정열을 터뜨리게 되고, 그 불륜의 결과인 살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인으로 인해 테레즈와 로랑의 삶은 몹시도 달라진다.

 

1868년 출간된 제 2판에 실린 서문도 함께 실려 있는데, 180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원초적 욕망과 그 욕망의 결과로 벌어진 살인이라는 내용 자체가 저급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든 현재든간에 우리 인간이 숨기고 싶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에 근접한 예술은 언제든 예술과 외설 사이의 경계를 교묘히 걷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가 구구절절히 밝힌 서문의 내용은 첫 출간 당시 “[테레즈 라캥]의 저자는 포르노그래피를 펼쳐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는 등 비판에 대한 항변이었다.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_ 서문에서

 

그가 밝힌대로 <테레즈 라캥>이라는 소설에서 테레즈와 로랑의 원초적 욕망은 그저 그 욕망에 굴복하고 간통을 저지른 그들이 어떻게는 함께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까미유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난 뒤, 그 극단적인 도덕적 딜레마 상태에서 어떻게 피폐해져가며, 피폐해진 그들의 정신상태로 인하여 어떻게 삶이 변해가는지를 보는 하나의 단서 혹은 명제에 불과하다.

 

어렸을 때 고모인 라캥부인에게 맡겨진 테레즈는 어려서부터 병약하기 그지 없어 어머니의 품을 떠난 적이 없는 까미유와 함께 자란다. 테레즈는 야성적이고 건강한 체질이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고모에게 충성하고자 자신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조용히 자신을 감추고 살아간다. 테레즈가 먹지 않으면 자신도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까미유를 위해 건강한 테레즈는 까미유와 함께 자신에겐 쓸모도 없는 약을 먹어가며 까미유의 병약한 몸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역겨워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살아왔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염려한 라캥부인은 까미유와 테레즈를 결혼시키고, 어머니의 그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까미유는 결혼과 함께 철도청의 말단 직원으로 취직을 하고, 라캥부인은 테레즈와 함께 작은 잡화상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까미유가 데려온 어린 시절의 친구 로랑은 테레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욕망의 불꽃을 보게 된다. 둘은 까미유와 라캥 부인을 속이고 대범한 간통행각을 벌인다. 까미유만 없으면 그 불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로랑은 뱃놀이를 가장해 까미유를 데리고 강 한 가운데로 가 빠뜨려 죽인다. 까미유의 육신은 이제 사라졌지만 로랑과 테레즈의 앞에는 까미유의 육신이 아니라 유령이 존재한다.

 

죽지 않고 살아있던 까미유는 속일 수 있었다. 그는 아침이면 출근을 했고, 그가 출근한 틈을 타서 황홀한 육욕을 채우는 일은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죽어 버린 까미유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다. 라캥 부인을 속여 이제 결혼하게 된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를 안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이 등을 돌리고 돌아 누우면 침대 한 가운데는 물에 빠져 죽어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까미유가 누워 있다.

 

원래가 아버지의 유산이나 받아서 빈둥거리며 쉬운 여자들과 적당히 즐기며 사는 것이 꿈이었던 로랑은 훤칠하고 건장한 몸, 억센 머리와 붉고 혈색있는 얼굴, 굵고 짧은 목과 단단한 몸을 가졌다. 그런 모양새가 늘 파리하기만 한 까미유와 대조되어 숨겨져 있던 테레즈의 욕망을 일깨우는데 한몫했다. 그는 작은 아뜰리에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사실 그닥 유능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테레즈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찾아오는 까미유의 환영으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로 변하게 되고 그런 그의 내면의 변화는 그가 그리던 특색없고 느낌없는 그림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비록 그가 그리는 모든 이가,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든간에 인물이라면 그 누구든지 까미유의 얼굴과 닮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에밀 졸라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간통을 한 남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는 뼈대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하루하루 변해가는 그들의 정신상태를 마치 실험을 하고 난 뒤 정확하고도 디테일하게 연구자료를 만들 듯이 써내려간 이 이야기는 한 편의 긴장감 넘치는 논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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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심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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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bɪ|haɪnd][전치사] (위치가) 뒤에

 

돈도 빽도 없는 카피라이터 김준희의 직장생활 '생존'에 관한 이야기, 비하인드. 그녀의 직장생활 뒷 이야기라서 비하인드인가, 소위 말하는 '빽'에 관한 이야기여서 비하인드인가.

 

5년차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김준희. 그녀는 고아다. 고아원의 얼음장 같은 골방, 창가로 가 영화에서 봤던 월스트리트라는 곳처럼 화려한 불빛을 상상하며 다짐했다. "난 커서 꼭......회사원이 될거야." 친오빠와 다름없는 H와 서류에 결제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란 그녀는 이제 정말 회사원이 되었지만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마냥 멋있지만은 않다. "넌 아까부터 여기 서서 뭐하는 거야. 혼자 뭘 중얼거려. 아이디어 내랬더니 똥을 싸네, 똥을 싸." 같은 폭언에 피튀기는 PT에, 밥 먹듯 하는 야근까지. 하지만 그녀는 운명처럼 직장에서 다시 만난 대학 때의 첫사랑 기획팀 최대리를 생각하면 웃으며 퇴근할 수도 있을만큼 어느 정도 적응한 도시의  커리어우먼으로 생각하고 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 예쁜 구두, 유행하는 옷도 입었지만 조직내에서는 여전히 힘없고 빽없는 평범한 '사원'에 불과하다.  조직내에는 여늬 직장에서처럼  '줄' 혹은 '라인'이 존재하고 본부장의 권유로 옮긴 이 직장에서는 본의아니게 본부장라인을 타게 되었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승진 시켜주겠다는 본부장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이직을 했건만 본부장은 사장과의 의견차로 회사를 떠나고, 김준희는 그야말로 끈떨어진 연 신세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 인생 최악의 상사, 사라가 나타난다. 부회장의 딸이라는 '빽'을 등에 엎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로열 패밀리, 사라는 그녀의 카피에 일일이 태클을 걸고, 직장 생활의 유일한 오아시스와도 같았던 그녀의 남자 최대리마저 빼앗아 간다. 더럽고 치사하니 다 때려치고 싶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므로 자존심 따위는 굽히고 예스맨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인가를 날마다 고민하는 그녀. 능력만으로 사라를 이겨보겠다고 발버둥치며 복수를 계획한다.

 

세상은 참 만만치 않다.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니라 시골의 어느 비포장 도로를 자전거 타고 가는 것처럼 어느 순간 어디에서, 자전거 바퀴에 돌이 걸릴지 모르는게 세상살이다. 꼭 이 소설 안의 김준희처럼 고아라는 독한 설정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냥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 남편, 혹은 내 동생 그리고 나까지를 포함한 우리가 다 그렇다. 어렵게 공부하고 어렵게 회사원이 되었지만 식구들에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윗사람에게 깨지고, 아랫사람은 밀고 올라온다. 나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나보다 먼저 진급한다. 누군가는 윗사람의 친인척이라며 고속 승진을 한다. 내가 낸 기획서는 내 바로 윗사람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공이 날아가기도 한다. 저렇게까지 해야 해, 라며 흠잡았던 사람의 아부는 승진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사람을 비난하던 나는 분위기도 맞출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 대꾸가 되고, 착하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과 같아지는 이상한 세상. 어쩌면 김준희의 고민이 이 세상의 고민일런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된 입장으로 그래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어느 순간 정도만을 걷는 아이가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정도만을 걷는 것이 꼭 옳은 것이냐고, 성실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어떻게 정열과 성실만으로 성공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답할 수 있을런지. 그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변명 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플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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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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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개인적으로 판타지 계열의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트와일라잇>이나 <비스틀리>, <윙스> 등도 판타지 계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은 대체적으로 YA, 즉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약간의 로맨스가 곁들여져 있어서인지 전형적인 판타지, 환상문학이라고 정의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대로 환상문학이다. 어쩌면 잠깐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잠깐 졸았던 것 같기도 한 찰나의 순간에 내가 무언가를 경험했는지 확실치도 않은 듯한 그런 느낌의 이야기들. 어렸을 때 보았던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물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겁이 많아서 무서운 영화는 보지도 않는 편인데 이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는 꼭 챙겨볼만큼 좋아했다. 그러고보니 판타지를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는 말은 내게 있어서는 맞지 않는 말이군!

 

아무튼, 환상도서관은 말 그대로 여섯개의 환상도서관이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책이 다 있는 [가상 도서관], 우편함을 열 때마다 새로운 책이 들어 있어 그 책을 밤이 새도록 집안에 들여다 놓고 집안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집안 도서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는 [야간 도서관]. 지옥이란 뜨거운 불에 영원히 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책을 읽어야 하는 곳이라는 설정의 [지옥 도서관], 펼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초소형 도서관]. 하드커버의 책만 소장하는 마니아의 아무리해도 죽지 않는 페이퍼백 책과의 혈투를 그린 [위대한 도서관]이 그 환상특급의 기차를 타면 내릴 수 있는 기차역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매우 객관적인 일기지요. 그게 주된 매력입니다.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숨기지도 않고,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지도 않아요. 거기 실린 내용은 완벽하게 사실이지요. 그것만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처럼요. 인생에 관한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책을 보시겠습니까?”
[야간 도서관] 중에서

 

무료한 주말동안 읽을 책 하나 없다면, 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늦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서관으로 뛰어간다. 다행히도 문이 열리고 책을 골라보려는 순간,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난다. 당연히 도서관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쯤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그 도서관은 야간 도서관이고 거기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다. 당연히 내 책도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 이야기를 보면서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스토킹 혹은 인권유린 아닌가요, 라고 울부짖어본다. 혹시 여기에 갇히는게 아닌가 싶어 날 내보내주세요,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쿨하게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한다. 그렇게 문을 나선다.

 

“…우리 재소자들 중 정확히 84.12퍼센트가 독서를 혐오하는 특성을 가졌다는 결과가 나오더군. 26.38퍼센트의 경우는 이해가 가. 이 친구들은 문맹이거든. 하지만 47.71퍼센트가 글을 알면서도 책 한 권 집어본 적이 없어. 전염병이라도 걸릴까 봐 그러는 건가? 나머지 10퍼센트가량은 여기저기서 뭔가 읽긴 했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것만 봐서 순전히 시간낭비를 했더군.”
[지옥 도서관] 중에서

 

누군가 내 어깨에 필요이상으로 힘을 주고 방 안으로 떠민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고 묻는 이에게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혹시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니 내 인생에 대해 말할 기회를 줄 수 없느냐고 묻자, 착오 따윈 없다고, 당신이 지옥에 올만한 이유가 담긴 인생을 읽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변명까지 들어야 하냐며 가차없이 지옥행을 명한다. 불지옥 같은 것을 기대(?)하는 이에게 요즘 누가 촌스럽게 그런 벌을 내리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지옥에서 내리는 벌은 '책읽기'이다. 죄인은 '스릴러'장르를 원하지만 처방은 '전원시'이다.

 

이 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도서관'이라는 것을 맞딱드리게 되는 주인공들은 우리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제목이나 보내는 이가 불분명한 스팸메일들은 무조건 삭제하지만 '책'이라는 말에는 솔깃하여 지우지 않고 열어보는 [가상 도서관]의 주인공은 나를 떠올리게 했다. [야간 도서관]의 주인공은 스케이트 타러 간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이 무료하여 책을 꼭 챙기는 나, 핸드폰에 책이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는 것에 기뻐하는 나, 혹은 아파트 우편함에 돈 달라는 고지서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며 슬퍼하는 나는 [집안 도서관]의 주인공과도 비슷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고, 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혹시 누군가는 정말 이런 환상의 세계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책이다. '환상'이라는 어감이 조금은 '무섭다' 혹은 '두렵다'는 공포를 가지게도 하는데, 이 작품은 생각할수록 유머와 위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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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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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동안 자의로 혹은 타의로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꽤 많이 접했다. <다크>를 시작으로 <얼굴에 흩날리는 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아임 소리 마마> 그리고 이 작품 <물의 잠 재의 꿈>까지. 단언컨대 내가 보았던 다섯 권의 책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겠다. 꼭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중에서, 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서라도 이 작품은 꽤 괜찮은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역시 추리소설이라면 혹은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이라면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선호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쓰는 미로 시리즈의 무라노가 여자이고, 그래서 조금은 연약하고, 감정에 휘둘리기 쉬우며, 상대가 누구라도 가끔은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생긴달까.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두고 섹시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이 든달까, 여튼 그렇다.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적 교육의 폐해를 입은 것인가..)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사건의 모티프가 되었던 '소카 지로'가 이 작품 안에서도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기라노 나쓰오의 '미로 시리즈'의 번외편이라고 하여 미로 시리즈의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인 무라노 젠조의 젊은 시절이 그려지고 있다. 미로 시리즈에서 가끔 미로의 부탁에 마지 못해 들어주거나 혹은 차갑게 거절하기도 하는 말 없고 시크한 타입의 아버지로만 등장하던 그 아버지, 통칭 '무라젠'은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하는 능력을 가진 '특종꾼'의 모습으로 이 작품에서 활약한다.

 

1963년. 전쟁과 원폭의 피해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도쿄는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도시는 묘하게 들떠 있고 여기저기 올림픽을 준비하는 모양새로 바쁘게 움직인다. 그런 도쿄에 '소카 지로'라는 연쇄폭파범이 등장하고, 경찰도 기자들도 특종꾼들도 '소카 지로'의 실체를 잡아내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런 와중에 변사체로 발견된 여고생은 하필이면 무라젠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난 다음이었고, 시대의 뒤편으로 저물기 시작하는 특종꾼이라는 직업을 가진 무라젠을 위기로 몰아 넣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특종꾼'이라는 직업을 가진 무라젠의 사건 조사능력과 뛰어난 감은 같은 특종꾼들 사이에서도 이미 정평이 난 상태였고, 때로는 경시청 사람들마저도 그의 능력에 시기와 질투를 보낼 정도였다. 그런 그가 소카 지로 사건과 여고생변사사건을 조사하면서 더 이상 특종꾼도 아닌, 경찰도 아닌 '탐정'이 된 사연이 구구절절하면서도 힘있게, 때로는 그의 친구와 여인의 이야기까지 곁들여 가면서 감동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야쿠자 밑에서 일하는 탐정이 되었는지가 상당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어 있다. 게다가 미로의 출생의 비밀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내용이라니. 미리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듯한 탄탄한 구성과 플롯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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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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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좌충우돌 발로 뛰며 취재한 터라 어떤 작품보다도 정이 가는 타이틀입니다. 주인공 미로는 완벽하지 않아 더 사랑스럽고요!" _작가 인터뷰에서


작품 안에서 무라노가 도모와 하는 말이 있다. 현실은 정말 어둡고 비참하고 폭력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아마도 그런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읽는 사람들은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설이 다 있느냐고 할거라고.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실제한다고 믿고 싶지 않을만큼 폭력적이다. 게다가 작가 인터뷰에서 말한 그대로 무라노는 완벽하지 않다.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되도 않는 남자에게 흔들리기도 하고, 그러다 범인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잠도 잔다. 가끔 미스터리물이나 형사물, 스릴러의 남자 주인공들도 의심스러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감정 없이라도 육체적으로 끌려서 밤을 보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여자여서인가,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자로 살아와서인가 그 남자는 용서가 되는데 무라노에게는 정이 가지 않았달까, 용서가 되지 않았달까. 흔들리는 무라노를 보면서 아니, 이런 헤픈 여자 같으니라고 하고 질타를 했더랬다.

 

무라노는 형사가 아니다. 탐정이다. 아버지 무라노 무라젠의 탐정노릇을 어쩌다 보니 이어받게 되었다. 여성작가에 의한 여성탐정 활약물.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 이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 2탄이 이 작품이다. AV비디오에서 레이프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며 이것은 배우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라는 '성인비디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활동가인 와타나베의 의뢰로 성인배우인 잇시키 리나를 찾아 증언을 얻고자 한다. 잇시키 리나를 찾아나설 때까지만 해도 별 일 아니었던 이 의뢰는 비디오제작사와 감독 등을 찾아 전화를 하고 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저녁 죽고 싶냐는 변조음성을 듣는 순간 또다른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게 된다.

 

그녀의 다른 작품인 <다크>, <얼굴에 흩날리는 비>,<아임 소리 마마>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작품 안에는 뒷골목의 어두운 이야기, 매춘과 조직폭력, 가정폭력, 미혼모, 동성애까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무라노 미로라는 여성 탐정이 그런 불온한 거리로 위험을 무릎쓰고 나가 아주 사소한 실마리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아마도 나 자신이 그런 위험에 처한 듯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사건 안으로 파고 들면 들수록 사건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그녀는 그 위험의 한 가운데 자리하게 되며 갖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헐리우드식의 해결방식이나 어떤 드라마틱한 결말보다는 일이든 사랑이든 난관에 빠졌을 때 정직하게,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그녀를 보면서 또한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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