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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심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Behind[bɪ|haɪnd][전치사] (위치가) 뒤에
돈도 빽도 없는 카피라이터 김준희의 직장생활 '생존'에 관한 이야기, 비하인드. 그녀의 직장생활 뒷 이야기라서 비하인드인가, 소위 말하는 '빽'에 관한 이야기여서 비하인드인가.
5년차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김준희. 그녀는 고아다. 고아원의 얼음장 같은 골방, 창가로 가 영화에서 봤던 월스트리트라는 곳처럼 화려한 불빛을 상상하며 다짐했다. "난 커서 꼭......회사원이 될거야." 친오빠와 다름없는 H와 서류에 결제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란 그녀는 이제 정말 회사원이 되었지만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마냥 멋있지만은 않다. "넌 아까부터 여기 서서 뭐하는 거야. 혼자 뭘 중얼거려. 아이디어 내랬더니 똥을 싸네, 똥을 싸." 같은 폭언에 피튀기는 PT에, 밥 먹듯 하는 야근까지. 하지만 그녀는 운명처럼 직장에서 다시 만난 대학 때의 첫사랑 기획팀 최대리를 생각하면 웃으며 퇴근할 수도 있을만큼 어느 정도 적응한 도시의 커리어우먼으로 생각하고 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 예쁜 구두, 유행하는 옷도 입었지만 조직내에서는 여전히 힘없고 빽없는 평범한 '사원'에 불과하다. 조직내에는 여늬 직장에서처럼 '줄' 혹은 '라인'이 존재하고 본부장의 권유로 옮긴 이 직장에서는 본의아니게 본부장라인을 타게 되었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승진 시켜주겠다는 본부장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이직을 했건만 본부장은 사장과의 의견차로 회사를 떠나고, 김준희는 그야말로 끈떨어진 연 신세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 인생 최악의 상사, 사라가 나타난다. 부회장의 딸이라는 '빽'을 등에 엎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로열 패밀리, 사라는 그녀의 카피에 일일이 태클을 걸고, 직장 생활의 유일한 오아시스와도 같았던 그녀의 남자 최대리마저 빼앗아 간다. 더럽고 치사하니 다 때려치고 싶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므로 자존심 따위는 굽히고 예스맨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인가를 날마다 고민하는 그녀. 능력만으로 사라를 이겨보겠다고 발버둥치며 복수를 계획한다.
세상은 참 만만치 않다.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니라 시골의 어느 비포장 도로를 자전거 타고 가는 것처럼 어느 순간 어디에서, 자전거 바퀴에 돌이 걸릴지 모르는게 세상살이다. 꼭 이 소설 안의 김준희처럼 고아라는 독한 설정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냥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 남편, 혹은 내 동생 그리고 나까지를 포함한 우리가 다 그렇다. 어렵게 공부하고 어렵게 회사원이 되었지만 식구들에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윗사람에게 깨지고, 아랫사람은 밀고 올라온다. 나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이 나보다 먼저 진급한다. 누군가는 윗사람의 친인척이라며 고속 승진을 한다. 내가 낸 기획서는 내 바로 윗사람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공이 날아가기도 한다. 저렇게까지 해야 해, 라며 흠잡았던 사람의 아부는 승진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사람을 비난하던 나는 분위기도 맞출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 대꾸가 되고, 착하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과 같아지는 이상한 세상. 어쩌면 김준희의 고민이 이 세상의 고민일런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된 입장으로 그래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어느 순간 정도만을 걷는 아이가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정도만을 걷는 것이 꼭 옳은 것이냐고, 성실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어떻게 정열과 성실만으로 성공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답할 수 있을런지. 그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변명 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플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