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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판타지 계열의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트와일라잇>이나 <비스틀리>, <윙스> 등도 판타지 계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책들은 대체적으로 YA, 즉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약간의 로맨스가 곁들여져 있어서인지 전형적인 판타지, 환상문학이라고 정의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 이 작품은 제대로 환상문학이다. 어쩌면 잠깐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잠깐 졸았던 것 같기도 한 찰나의 순간에 내가 무언가를 경험했는지 확실치도 않은 듯한 그런 느낌의 이야기들. 어렸을 때 보았던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물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겁이 많아서 무서운 영화는 보지도 않는 편인데 이 <환상특급>이라는 시리즈는 꼭 챙겨볼만큼 좋아했다. 그러고보니 판타지를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는 말은 내게 있어서는 맞지 않는 말이군!
아무튼, 환상도서관은 말 그대로 여섯개의 환상도서관이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책이 다 있는 [가상 도서관], 우편함을 열 때마다 새로운 책이 들어 있어 그 책을 밤이 새도록 집안에 들여다 놓고 집안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집안 도서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는 [야간 도서관]. 지옥이란 뜨거운 불에 영원히 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책을 읽어야 하는 곳이라는 설정의 [지옥 도서관], 펼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초소형 도서관]. 하드커버의 책만 소장하는 마니아의 아무리해도 죽지 않는 페이퍼백 책과의 혈투를 그린 [위대한 도서관]이 그 환상특급의 기차를 타면 내릴 수 있는 기차역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매우 객관적인 일기지요. 그게 주된 매력입니다.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숨기지도 않고,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지도 않아요. 거기 실린 내용은 완벽하게 사실이지요. 그것만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처럼요. 인생에 관한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책을 보시겠습니까?”
[야간 도서관] 중에서
무료한 주말동안 읽을 책 하나 없다면, 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늦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서관으로 뛰어간다. 다행히도 문이 열리고 책을 골라보려는 순간,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누군가 나타난다. 당연히 도서관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쯤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그 도서관은 야간 도서관이고 거기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다. 당연히 내 책도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 이야기를 보면서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스토킹 혹은 인권유린 아닌가요, 라고 울부짖어본다. 혹시 여기에 갇히는게 아닌가 싶어 날 내보내주세요,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쿨하게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한다. 그렇게 문을 나선다.
“…우리 재소자들 중 정확히 84.12퍼센트가 독서를 혐오하는 특성을 가졌다는 결과가 나오더군. 26.38퍼센트의 경우는 이해가 가. 이 친구들은 문맹이거든. 하지만 47.71퍼센트가 글을 알면서도 책 한 권 집어본 적이 없어. 전염병이라도 걸릴까 봐 그러는 건가? 나머지 10퍼센트가량은 여기저기서 뭔가 읽긴 했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것만 봐서 순전히 시간낭비를 했더군.”
[지옥 도서관] 중에서
누군가 내 어깨에 필요이상으로 힘을 주고 방 안으로 떠민다.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고 묻는 이에게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혹시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니 내 인생에 대해 말할 기회를 줄 수 없느냐고 묻자, 착오 따윈 없다고, 당신이 지옥에 올만한 이유가 담긴 인생을 읽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변명까지 들어야 하냐며 가차없이 지옥행을 명한다. 불지옥 같은 것을 기대(?)하는 이에게 요즘 누가 촌스럽게 그런 벌을 내리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지옥에서 내리는 벌은 '책읽기'이다. 죄인은 '스릴러'장르를 원하지만 처방은 '전원시'이다.
이 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도서관'이라는 것을 맞딱드리게 되는 주인공들은 우리네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제목이나 보내는 이가 불분명한 스팸메일들은 무조건 삭제하지만 '책'이라는 말에는 솔깃하여 지우지 않고 열어보는 [가상 도서관]의 주인공은 나를 떠올리게 했다. [야간 도서관]의 주인공은 스케이트 타러 간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간이 무료하여 책을 꼭 챙기는 나, 핸드폰에 책이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는 것에 기뻐하는 나, 혹은 아파트 우편함에 돈 달라는 고지서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며 슬퍼하는 나는 [집안 도서관]의 주인공과도 비슷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고, 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혹시 누군가는 정말 이런 환상의 세계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하는 신선한 책이다. '환상'이라는 어감이 조금은 '무섭다' 혹은 '두렵다'는 공포를 가지게도 하는데, 이 작품은 생각할수록 유머와 위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