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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박찬욱 감독의 <박쥐>라는 영화의 모티프로 관심을 받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은 1867년에 씌여졌다. 프랑스 파리 퐁네트 파사주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병약한 사촌 까미유와 결혼한 테레즈가 남편과는 다른 기질의 로랑과 만나면서 그동안 감추고 있던 자신의 정열을 터뜨리게 되고, 그 불륜의 결과인 살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인으로 인해 테레즈와 로랑의 삶은 몹시도 달라진다.
1868년 출간된 제 2판에 실린 서문도 함께 실려 있는데, 180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원초적 욕망과 그 욕망의 결과로 벌어진 살인이라는 내용 자체가 저급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든 현재든간에 우리 인간이 숨기고 싶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에 근접한 예술은 언제든 예술과 외설 사이의 경계를 교묘히 걷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가 구구절절히 밝힌 서문의 내용은 첫 출간 당시 “[테레즈 라캥]의 저자는 포르노그래피를 펼쳐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는 등 비판에 대한 항변이었다.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촉구해야 했던 부분은,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서, 파괴를 지향하는 신경체계의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_ 서문에서
그가 밝힌대로 <테레즈 라캥>이라는 소설에서 테레즈와 로랑의 원초적 욕망은 그저 그 욕망에 굴복하고 간통을 저지른 그들이 어떻게는 함께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까미유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난 뒤, 그 극단적인 도덕적 딜레마 상태에서 어떻게 피폐해져가며, 피폐해진 그들의 정신상태로 인하여 어떻게 삶이 변해가는지를 보는 하나의 단서 혹은 명제에 불과하다.
어렸을 때 고모인 라캥부인에게 맡겨진 테레즈는 어려서부터 병약하기 그지 없어 어머니의 품을 떠난 적이 없는 까미유와 함께 자란다. 테레즈는 야성적이고 건강한 체질이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고모에게 충성하고자 자신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조용히 자신을 감추고 살아간다. 테레즈가 먹지 않으면 자신도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까미유를 위해 건강한 테레즈는 까미유와 함께 자신에겐 쓸모도 없는 약을 먹어가며 까미유의 병약한 몸에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역겨워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살아왔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염려한 라캥부인은 까미유와 테레즈를 결혼시키고, 어머니의 그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까미유는 결혼과 함께 철도청의 말단 직원으로 취직을 하고, 라캥부인은 테레즈와 함께 작은 잡화상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까미유가 데려온 어린 시절의 친구 로랑은 테레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욕망의 불꽃을 보게 된다. 둘은 까미유와 라캥 부인을 속이고 대범한 간통행각을 벌인다. 까미유만 없으면 그 불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로랑은 뱃놀이를 가장해 까미유를 데리고 강 한 가운데로 가 빠뜨려 죽인다. 까미유의 육신은 이제 사라졌지만 로랑과 테레즈의 앞에는 까미유의 육신이 아니라 유령이 존재한다.
죽지 않고 살아있던 까미유는 속일 수 있었다. 그는 아침이면 출근을 했고, 그가 출근한 틈을 타서 황홀한 육욕을 채우는 일은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죽어 버린 까미유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다. 라캥 부인을 속여 이제 결혼하게 된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를 안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이 등을 돌리고 돌아 누우면 침대 한 가운데는 물에 빠져 죽어 푸르죽죽한 얼굴을 한 까미유가 누워 있다.
원래가 아버지의 유산이나 받아서 빈둥거리며 쉬운 여자들과 적당히 즐기며 사는 것이 꿈이었던 로랑은 훤칠하고 건장한 몸, 억센 머리와 붉고 혈색있는 얼굴, 굵고 짧은 목과 단단한 몸을 가졌다. 그런 모양새가 늘 파리하기만 한 까미유와 대조되어 숨겨져 있던 테레즈의 욕망을 일깨우는데 한몫했다. 그는 작은 아뜰리에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사실 그닥 유능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테레즈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찾아오는 까미유의 환영으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로 변하게 되고 그런 그의 내면의 변화는 그가 그리던 특색없고 느낌없는 그림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비록 그가 그리는 모든 이가,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든간에 인물이라면 그 누구든지 까미유의 얼굴과 닮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에밀 졸라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간통을 한 남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는 뼈대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하루하루 변해가는 그들의 정신상태를 마치 실험을 하고 난 뒤 정확하고도 디테일하게 연구자료를 만들 듯이 써내려간 이 이야기는 한 편의 긴장감 넘치는 논문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