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도 그렇지만 책의 겉표지마저 만화스러운 이 작품은 내용도 참으로 만화스럽다. 차라리 만화였더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던 책. 만화로도 제작된다면 재미있을텐데 하는 느낌의 책이다. 이름도 낯선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북쪽에 존재하는 작은 섬나라의 한 나라. 그 나라의 이름은 '라일왕국'이고 왕국의 왕은 여러명의 아내와 여러명의 공주를 두고 있다. 왕은 병이 깊어 의식불명인 상태이고 각각의 공주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여러 세력들간의 세다툼으로 왕국은 현재 혼탁한 상황이다. 이 왕국의 한 왕비는 일본이 고향이고, 그녀의 딸인 미오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으로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에서는 국가적 상황을 고려하여 어떠한 국가적 차원의 보호도 해 줄 수 없는 상황. 미오왕녀의 보호를 위해 사이키 부자가 떴다.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아버지 사이키 료스케는 그야말로 불량한 사람이다. 아들에게 담배와 술을 권하고 무언가 하지 말라는 말은 해 본 적도 없다. 무역상사 직원으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던 그는 비밀첩보원 혹은 암흑가 또는 국가권력에도 줄이 닿는 것 같은 뒤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헬기도 조정할 줄 안다. 그의 아들인 사이키 류는 고등학생. 대학을 가야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아버지와 함께 세계평화에 이바지한 적도 있다. 그런 사이키 부자에게 미오왕녀의 보호라는 중차대한 임무가 맡겨졌다.

 

비밀리에 일본으로 들어온 미오왕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위험에 빠지게 되고, 예정했던 호텔이나 기타 일정들은 모두 노출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이키 료스케는 왕녀를 데리고 새로운 숙소를 찾아가는데 그 숙소는 러브호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이다. 하지만 료스케는 누구도 왕녀가 이런 곳에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며 왕녀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이 때부터 왕녀를 노리는 사람들의 공격은 시작되고, 그녀를 노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프로라는 것도 알게 된다.

 

한마디로 딱 만화다. 열 여덟 청춘의 아르바이트 탐정 사이키 류와 미오왕녀. 공주로만 자란 미오왕녀는 자신을 위해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류에게 고마움과 동시에 호감을 느끼게 되고, 여태껏 진지하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마음만으로 위해본 적 없던 류도 미오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이키 부자의 활약은 일본을 건너 라일왕국에서까지 계속된다. 과연 엉뚱발랄한 이 사이키부자의 미오왕녀 구출작전은 성공하게 될 것인가!

 

총탄이 난무하고 헬기를 띄우고, 독화살을 목에 쏘고 한마디로 이야기는 초특급 울트라 액션스릴러를 방불케한다. 하지만 불량한 아버지 사이키 료스케와 그런 아버지와 살면서 이미 고등학생 같은 모습따위는 애저녁에 사라진 애늙은이 사이키 류와의 만담과도 같은 대화와 스타일이 이야기를 만화같이 가벼운 느낌으로 이끌어간다. 가독성이 무척이나 좋으며 가볍게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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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평생을 돈 걱정 없이 살면서 일흔 다섯번째 생일을 맞게 된 '할머니' 엘리는 자신의 나이가 정말 싫다. 일흔 다섯보다는 훨씬 젊어보인다는 말을 들어도 싫다. 끔찍하게 싫다. 이제 막 갓 피어난 꽃처럼 탱탱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손녀딸 루시가 미치게 부럽다. 그래서 엘리는 일흔 다섯번째 생일날, 생일 케익위에 일흔 다섯개를 꽂수가 없어서 선택 된 숫자, 스물 아홉개의 촛불을 끄며 빌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스물 아홉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정말 스물 아홉살의 엘리가 되어버린 아침. 여전히 일흔 다섯의 정신인 엘리는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다. 딸 바바라가 알기 전에 얼른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바바라와 통화를 하고, 가장 친한 친구 프리다의 전화를 받았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이 괴상한 상황을 벗어나야 겠다고 생각한 엘리는 동네 케익집에서 미니케익을 여러개 사서 다시 한 번 소원을 빌어보기로 했다. 소원을 빌어보기도 전에 손녀딸 루시에게 들켜버리고 만 엘리는 루시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고 함께 이 난관을 헤쳐나가자고 하지만 루시는 할머니가 진정으로 원한 일이 아니었다면 왜 촛불앞에서 그런 소원을 빌었느냐며 하루만이라도 할머니 자신만을 위해 스물 아홉으로 살아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엘리는 스물 아홉의 너무나도 젊고 예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마구 뛰어도 관절이 아프지 않고 숨이 차지 않는 자신의 몸에 기뻐하며 그 하루를 만끽할 준비를 한다. 일흔 다섯의 정신에 스물 아홉의 몸을 가진 할머니 엘리, 그녀의 하루는 과연 어떻게 진행될까?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 한 동안은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하면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 "공부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정말 열심히, 후회없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다시 또 누군가 묻는다면 스무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 것 같다. 공부보다는 놀고 싶기 때문일까? 한참 청춘일 때 법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면 무엇이든 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학교에서 집, 집에서 또 학교, 다람쥐 쳇바퀴 돌듯 평범한 일상을 살았던 나에게 일탈이라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조용조용히 인생길에 있어 진흙탕은 피해가며 조심조심 걸어온 나에게 일탈이라는 것은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와서 가던 동네 오락실, 교재 산다고 말하고 교재값을 더 부풀렸던 기억쯤이지 다른 것은 없다. 만약 다시 청춘이 된다면 그렇게 조용조용 말고, 조금은 소란스러운 청춘을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사실 생각뿐 다시 청춘이 된다해도 오롯이 나 혼자가 아니라면, 주위의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아마 또 똑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고 늙었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 늙었다는 것 말이야. 늙은이처럼 사는 것이 지겹다면 그걸 바꿀 순 있겠지. 그거라면 할 거야.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이미 다 해봤어. 너도 날 잘 알잖아. 나는 TV를 볼 때도 재방송은 안 봐. 이미 본 거니까. 한번 지나간 건, 그냥 지나간 거야."

-p. 289

 

나도 그렇다. 물론 이 할머니들처럼 이미 일흔이 훨씬 넘어버린 할머니는 아니지만 나도 내 나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줌마가 되어버린 나이. 누가 봐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마. 눈가에 잔주름이 굵어지기 시작하고 머리 어딘가에서 흰 머리가 자주 출몰하는 나이. 몸의 탄력도 예전같지 않고 아픈 데도 많은 것 같아지는 나이. 그런 나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게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가슴이 소란해지고 불안하고 떨리던, 아무것도 안정된 것 같지 않던 그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더욱이 내게 있어 스물 아홉은 아마도 여태까지의 내 인생 중에 가장 힘든 한해였으리라. 그러므로 더더욱 스물 아홉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열아홉이라면 모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특권이다. 젊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것이 용서되고 이해된다. 역자후기에 인용된 세익스피어의 말을 보고 가슴을 쳤다.

 

유혹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를 배반하고 싶은 것, 청춘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절묘한 말인가 말이다. 그렇다. 누군가 나를 유혹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스스로를 배반하고 싶어지는 뜨거운 불덩이가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청춘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그 뜨거운 불덩이가 조금씩 조금씩 사위어 가는 것이랄까? 그래도 또한 그 불덩이가 죽는 그 날까지 아마도 완전히 꺼지지는 않는 것이라고 안다. 가끔씩 가슴 속에서 후끈 달아오르는 불덩이를 느낄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 그래도 요즘처럼 단풍이 흩날리면서 쓸쓸한 찬바람이 불어올 때는 나도 뜨거운 불덩이에 데여도 좋으니 하루쯤 스무살로 돌아가봤으면 하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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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겉표지는 상큼하고 예쁘지만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니 속까지 상큼하고 예쁘지는 않다. 그녀의 소설은 늘 조금은 어둡고 약간은 음지인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미로시리즈이면서도 미로시리즈와는 약간 다르다. 4편의 이야기들로 묶인 <로즈 가든>은 미로의 여고시절을 그린 이야기부터 미로의 자살한 전남편의 이야기, 그리고 탐정이 된 후의 미로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까지가 옴니버스로 묶여 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이야기는 읽기가 힘이 든다. 오래 전에 동생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보기가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얼마만큼 혹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만의 한계. 그런 한계를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 끌어당기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에 대한 회의랄까, 무서움 같은 걸 느끼게 되어서 편하게 볼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볼 때 동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다른 스릴러물이나 사이코패스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혹은 실화등을 접했을 때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에서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도덕성이 망가졌으며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범주에 있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왠지 나의 경우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볼 때 더 힘이 든다. 아마도 '미로'라는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로'라는 캐릭터에 질투를 심하게 느껴서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미로는 나와 너무나 다른 캐릭터이다. 사실 소설 속의 캐릭터는 나와 너무 달라서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나와 너무 비슷하여 동질감을 느낀 나머지 몰입하게 되는 경우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미로의 경우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캐릭터이다. 여태까지 미로시리즈를 보아온 바에 의하면 미로는 스스로의 감정에 굉장히 충실한 사람이다. 우리나라 여자, 특히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40대 주부가 감정에 충실하다는 건 어느 정도는 죄악이다. 더구나 80년대 후반에 대학생활을 한 나로써는 결혼 전이었다고 해도 특별이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오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이른 바 탐정이라는 사람이 사건을 맡아 놓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를 않나, 가까이 지내는 게이 남자에게 연정을 품기도 하고 질투를 하기도 한다.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을 감추지 않는 미로를 보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 내심으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고 어떨 때는 내 기분에 따라 화가 날 때도 있다. 게다가 그녀가 더듬어 가는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황량한 곳,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곳이라 정말 저런 세상이 있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이번에 단편으로 들어 있던 미로의 고등학교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미로의 죽은 전남편의 입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전남편은 자살을 했다. 그가 자살한 것이 미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그 단편의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다. 탐정이 된 미로에게 가끔씩 무심한 듯 소스를 던져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는 은퇴한 탐정 무라젠, 그와 미로가 친부녀지간이 아니라는 것 외에도 금기시 된 그 무언가가 있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놀랍다기보다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기에겐 없는 그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고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그런 엿보기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가독성이 좋은 그녀의 소설이 끊임없이 인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 <다크>라는 작품을 접하고 다시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도 꾸준히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고 <물의 잠, 재의 꿈> 같은 경우는 최고의 별점을 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로즈 가든> 역시 단편식으로 묶여 있어 가독성도 좋고 재미도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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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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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의 편견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독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옷처럼 입어보고 살 수도 없는 책, 그저 제목과 띠지, 선전문구, 작가등을 보고 골라야 하는 독서생활은 자신의 성향이 어떤가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물론 아무 책이라도, 어떤 장르라도 상관없다며 무조건 책이라면 집어 들고 읽는 잡식성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앞서 비채의 다른 책인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서평을 쓸 때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호러와 SF장르는 선호하지 않는다. 완곡한 표현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는 것이지 실제로 싫어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역시나 앞서 말한 바대로 <산마처럼 비웃는 것>과 <일곱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사람의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과 책은 읽어봐야 아는 것이라는 것, 또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따로 있으며(이제 알았던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그 장르가 어떠하던 간에 책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SF소설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모두 안다는 다나카 요시키라는 작가를 나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였다. 또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책도 접해보지 못했다. 하여 SF라는 장르에 편견이 있었지만 다나카 요시키라는 작가에 관한 한 어떠한 정보도 편견도 없었던 나는 책을 펼치고 첫 두번째 장까지 읽은 후에 말했다. "이 사람, 하~ 진짜 글 잘 쓰네."라고. 무슨 말을 써도 문장문장이 그렇게 맛깔나고 재미지게 썼을 수가 없다.

 

때는 서기 2190년. 은하철도999라도 나올 것 같은 년도이다. 지축은 90도 뒤바뀌어 남극과 북극은 적도로 이동하였고 이를 '대전도'라고 한다. 인류의 태반은 멸망하였고 그 멸망을 달에서 바라보던 있는 자들은 세상으로 내려와 일곱 도시를 새로이 건설하고 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월면도시 사람들은 지구를 통제하기 위해 올림포스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는 지구 전체 상공에 레이저 자동 공격 시스템을 설치한 것으로 지구의 어떤 비행체도 500m이상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마치 신에게 닿겠다는 심정으로 바빌론의 탑을 쌓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을 간과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월면도시는 정체미상의 외계바이러스에 의해 파괴되고 올림포스 시스템만이 홀로 건재하다.

 

월면도시가 파괴되자 일곱 도시들은 조금씩 자신들이 우위에 서기 위한 경쟁을 시작한다. 화합보다는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더 많은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회유하고, 속이고 짓밟는다. 분명히 시대는 발달하여 극에 달한 2190년인데 그들의 싸움은 고대시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정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터에 나간 이들은 전쟁에서 대의를 찾지 못해 헤매인다. 정치 이념과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전편에 걸쳐 녹아 있다. 국가적 이념이라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정치인들, 그들의 도구인 군인, 민주시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둔한 군중들의 이야기가 도시마다 다른 색깔로 그려지고 있다. SF소설이지만 SF스럽지 않은, 뭔가 사회학 이야기를 한 편 읽은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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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큰 기대없이 펴들었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허, 이것봐라~ 하는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자리도 옮기지 못한 채 끝을 보고야 말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뫼비우스의 띠가 4차원으로 벌어진다면,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세계, 시청각은 물론이려니와 촉각과 후각, 미각까지도 체험이 가능한 가상현실의 세계. 한 번 빠져들면 도무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현실이 아닌지 구분하기조차 힘든 4차원의 세계가 바로 클라인의 항아리이다.

독일의 수학자 F. 클라인이 고안하였다고 하는데 이 항아리에서는 항아리의 양끝이 접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닫혀 있는데도 사실은 열려 있다. 항아리의 용도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실제하는 클라인의 항아리의 용도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소설 속에서 클라인의 항아리는 모든 것이 체험 가능한 롤플레잉 게임기로 활용된다.

 

주인공 우에스기는 어드벤처 게임북 공모전에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작품을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하지만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작품을 토대로 게임기를 만들겠다는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게임회사에 원작을 넘기게 된다. 게임상용화 전에 테스트 플레이를 하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우에스기는 또다른 아르바이트생 리사와 함께 게임 모니터링을 시작한다. 게임의 엄청난 사실감 앞에서 놀라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우에스기와 리사는 테스트플레이를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에스기는 게임 도중 어떤 경고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함께 테스트를 하던 리사는 아무 소식도 없이 게임 테스트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생각과는 달리 돌아가는 석연치 않는 상황 속에서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회사의 비밀을 캐내겠다고 생각한 우에스기는 그 자신이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일들이 현실인지, 가상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이야기의 산 속, 낡은 건물의 다락방에서 몰래 숨어지내며 자신이 왜 피해있는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왜 도망쳐야만 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우에스기만큼이나 읽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 여기가 현실인지 가상인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다. 우에스기처럼 독자도 클라인의 항아리에 얽힌 처음 그 순간부터 항아리 속에 빨려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우에스기는 말한다.

"처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끝내면 돼."

 

현실이라고 생각한 순간 가상이라고 느끼게 되고, 가상인가 싶은 순간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괴로움에 우에스기는 게임을 종료할 단 한가지 방법을 찾아낸다. 과연 이 게임은 끝날 것인가!

 

처음 말한 것처럼 표지와 제목이 그닥 끌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SF 스타일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라 더욱 별로였다. 하지만 첫 페이지의 계약서, 그리고 시작된 첫 문장이 벌써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끝까지 나를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 편의 영화를 연상하게 하는 긴장감과 스피디한 전개, 그리고 전형적인 이야기꾼으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소설,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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