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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역시 법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외면하고, 당연히 재미없을 거라고 나와 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다. 와하하, 보통 사람들은 많이들 이럴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섣부른 단정인가? 실은 상관없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중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자꾸 외면하게 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학생별로 정리를 맡은 구역이 있다. 내가 맡은 구역은 2층의 J부터 PL초반까지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모를테니...에헴. 정치학, 행정학, 법학, 교육학, 언어학, 어학, 음악, 러시아 및 동유럽 문학, 일본 문학 등이다. 딱 봐도 아시겠지만, 일본 문학 부분을 제외하고는 정리할 게 거의 없다. 읽는 사람이 없으니까. 러시아 및 동유럽 문학은 책장 한 줄만큼도 차지하지 않으니 역시나 정리할 게 없다. 번역되어 도서관에 들어온 것의 절대 다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수의 프쉬킨과 고리끼 정도이다. (물론 조금은 더 있지만..) 정치, 행정, 법 이런거 읽는 사람은 이곳에, 특히나 인문사회과학 계열 전공자가 없는 이곳엔 거의 없다.
출간된지 이삼십년은 더 되어 보이는 전집류 법전들은 양장에 한자로 제목이 박혀 있어 나처럼 벼락치기 한자시험 공부 밖에 안 했던 학생에게는 전혀 관심 밖이다. 몇 주가 지나서 가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있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법은 그런 존재이다. 도서관의 분류 K에 처박혀 있는 오래되고 안 섹시하고 엄숙한 책 같은 것.
[헌법의 풍경]은 법학류 K에서도 잡서, 혹은 '보통 사람'들의 교양으로 읽을 만한 책들인 제일 마지막 분류 KPA에 속해있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3류 변호사, 3류 법학 교수가 쓴" 에세이이다. 그렇다면 '3류'가 아닌 법조계 인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양장과 한자를 두르고 보통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고고하게 그들만의 성채를 짓고, 유지하고, 또 그리로 진입하게 되는 과정은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리얼하게 묘사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법대에 가고 사법 시험을 준비한다는 예비 법조인들은, 대학 시절 내내 조사 빼고 전부 한자인 교과서와 독일어, 일본어를 지역해서 만들어진 '법률용어'의 홍수에 익숙해지며 'Legal Mind'를 습득한다. (리갈 마인드란, '잘 훈련된 법률가의 지적, 법률적 능력 또는 입장'이라고 정의되는 어떤 것, 혹은 법률가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한다.) 예비 법조인들은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리갈 마인드를 습득한다고 세뇌하면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상식에 준거한 판단을 법률가의 객관적인 그것으로 합리화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하여 드디어 법조계에 안착한 그들은 사회적 논쟁과 합의를 거쳐 결정되어야 할 문제에까지 리갈 마인드의 보도를 휘두르는 판관이 된다. 사법 연수원이나 군법무관 후보생 훈련처럼, 그들 선택받은 이들은 모여서 자신들의 우정과 파워를 확인하며 특권의식을 더욱 갈고 닦는다.
그런 판관들이 고소하고, 변호하고, 판결하는 법의 세계에서 시민들의 기본권은 우스워진다. 국가기구가 구성원들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느냐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느냐는 논란이 많은 문제이긴 하나, 일단 '존재'한다면 국가기구는 구성원들의 기본권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데에는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특히나 헌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 이후 근대정신의 가장 가시적인 구현이다. 그러나 헌법에 의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할 시민의 기본권은 법의 구현자들에 의해 오히려 앞장서서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은, 아주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제한될 수 있고 이는 철저하게 법률에 의거한 제한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법률에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권이 무시되고, 시민들의 무지와 힘없음을 볼모로 무시된다.
읽으면서 쇼킹했던 부분 중 하나는 진술 거부권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죄추정의 원칙, 미란다 원칙 같은 상식은 법의 구현자들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 공염불이 되기 일쑤이다. 진술 거부권의 행사는 논리적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한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에 방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어 변호인의 참여를 제한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발생하곤 한다. (수사에 방해를 받으라고 변호인을 참여시키는 것인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송두율 교수 사건에서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생겼다. 다행히도, 대법원에서 진술거부권과 그에 따른 변호인 참여의 권리가 헌법에 보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는 "잠자고 있던 권리인 진술 거부권을 되살려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당연한 권리가 얼마나 무시되고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단 대법원의 결정 중 "피의자 신문을 방해하거나 수사기밀을 누설하는 등 염려가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변호사의 참여 제한 가능"의 언급은, 아직까지도 법률에 의거하지 않은 기본권 제한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마지막 장인 "잃어버린 헌법,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는, 공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 사적 영역에서 시민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지를 미국의 시민권법 (Civil Rights Act of 1964)을 통해 모색해보고 있다. 기울어져감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는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최고의 대학과 석학들 엘리트 교육, 외국 유학생들을 끌어들여 자국의 힘으로 만드는 melting pot - 주로 유학다녀온 교수님들, 탄탄한 제조업과 높은 생산성 - 산업공학과 교수님들, 20이 80을 혹은 5가 95를 먹여살리는 고부가가치 산업 - 조중동 신문들... 개똥철학을 하나 보태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 시민권법은 아직까지 건재하는 미국의 저력이 무엇에 기초하는지 보여준다. 흑인민권 운동과 여성운동을 비롯한 시민권 운동의 감동적인 투쟁의 결과물인 시민권법 제정에는 희극적인 일화가 숨겨져있다. 원래 성별에 의한 차별은 포함되지 않았는데, 입법에 불만이 있던 모 하원의원이 성별에 의한 차별을 포함시키면 남성의원들의 반대를 이끌어내 법안 자체를 폐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조항이 그대로 통과됨으로써 성별에 의한 차별을 막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고 하니...
시민권법의 좀더 자세한 내용을 쓰고 싶지만, 여기까지 쓰는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만 매듭짓고 이제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갈길이 멀다. 갈길을 가려면, 이런 책도 많이 나오고, 읽고 생각도 좀더 해보고, 관심도 더 갖고, X같은 검사나 판사들의 행동에 욕도 해주고 해야겠지만, 늘 그렇듯 '의식개혁'만으로는 갈길은 가지지 않는다. 작은 직접행동 혹은 직접 안행동이 우리가 갈길의 구체적인 한보을 내딛게 해준다. 말하지 않을 나의 권리를 인식하고 말 안하기, 나의 권리가 무시되었을 때 항의하고 소송걸기, 권리의 확대를 위해 성채에서 내려온 법률전문가들의 소중한 서비스. 이런 것들이 더 많아져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찬성표 백만개를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