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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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장하준 씨가 최근 몇년간 각종 매체에 기고한 칼럼들을 엮은 책이다. 얇고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뭔가 뭔지 알 수 없이 미쳐 돌아가는 지금의 나라 경제를 바라볼 수 있는 굉장히 설득력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높은 실업률, 신규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데 이것이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때문인지, 비정규직이 늘어나는데 왜 그런건지, 외국의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인지 대안은 없는건지, 자본의 해외이전은 세계의 통합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인 건지, 혁명 아님 순응 양자택일의 선택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건지... (게다가 전자는 사실상 혹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이니..)

먹고 살기는 점점 힘들어지는 반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세상은 더욱 이해할 수 없고 그만큼 대안도 없어 보이는 요즘. 장하준의 시각은 내가 접한 어떤 시장주의자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조선일보부터 오마이뉴스나 말지에 이르기까지, 책에 등장하는 칼럼들의 다양한 출신성분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는 '스펙트럼'을 구분하기에 애매하다. 굳이 그런 걸 구분해야하는 것도 한숨새어나오는 일이긴 하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는 우파에게는 좌파라는 좌파에게는 우파라는 비난을 받는다. (글들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스펙트럼'에 대한 규정 혹은 애매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할애되어있다.) 

그의 글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주장을 정리해보면. 

1. 주주 자본주의, 무역장벽의 철폐와 자본 및 모든 종류의 상품(인력, 서비스, 문화 등을 포함한)의 자유로운 이동, 정부 규모와 역할의 축소 및 시장에 대한 개입 중지, 전통적인 사회기간망을 포함한 전면적인 민영화, 노동 유연성 극대화 등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로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의 의제에 대해. 과연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인가?  

일단 '글로벌 스탠다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주장되는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 의제들은 실은 미국식 스탠다드일 뿐, 선진국에 해당하는 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경제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영국이나 캐나다만 봐도 신자유주의를 전도하는 이들이 강변하는 스탠다드와는 아주 다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유연성은 두터운 사회안전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경직된' 노동정책을 고수하는 국가들도 많은 것은 물론), 70-80%에 달하는 노조조직률로 대표되는 강력한 시민-노동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경제정책, 기업정책이 결정된다.  

또한 많은 국가에서 공기업이 경제영역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일례로, IMF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부실기업 처리, 외국자본과의 인수합병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인 르노-삼성을 보자. 르노 자동차는 96년까지 프랑스의 공기업이었고 합병 당시에도 정부지분이 절반에 가까운 사실상의 공기업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공기업이라고 하며 (정말 믿거나 말거나에 가까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정부가 기업의 지분을 상당부분 보유함으로써 경영을 안정시키고 기업의 경영이 주주의 사익 추구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견제한다. 

심지어 미국의 경제가 그야말로 순수하게 그들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도 지극히 의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발효하기 시작한 80년대에도 이미 그들은 금융권 부실 때문에 미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을 퍼부은 바 있다. R&D 수행을 위한 연구자금의 2/3 이상이 정부에서 흘러나온다. 세계 식량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만큼 '경쟁력'있다는 그들의 농산물은 엄청난 정부보조금을 받아 생산되고 있다. 

2. '글로벌 스탠다드'는 역사의 산물일 뿐. 이것은 경제공동체의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반드시 이식되어야 하는 규범으로서 가치를 갖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처음부터 자유무역을 그렇게 좋아했나. 자유무역을 전세계에 전도하는데 앞장서는 미국은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을 고수하던 국가였다. 영국은, 양 키워서 모직물 원료 수출을 하던 유럽의 2등 국가 시절 강력한 보호무역과 관세보조금으로 자국의 공업을 발전시켰던 과거가 있다. 자유무역, 자본에 대한 모든 장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오직 그것으로 이득을 볼만큼 경제력이 확실하게 강해질 경우에만 해당될 뿐, 그렇지 않을 당시에는 지금의 선진국들도 모두 철저하게 보호경제를 꾸려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인가. '구'자유주의의 소위 황금기로 꼽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는 이민을 포함한 노동력의 이동, 자본의 이동, 무역량 등 거의 모든 시장 부문에서 거의 현재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세계적 통합이 이루어져 있었다. 통신, 교통 등에서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것이다. 대공황 이후 금본위체제로 옮겨가면서 주요 선진국들이 각국의 시장을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영했었다는 데에서도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세계적 통합의 maximum을 한계지을 뿐 그 정도 자체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3. 제조업은 사양산업이고, 금융업을 비롯한 서비스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허구성.  

금융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은 실제로는 대부분 end-user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미용실이나 편의점이 아닌 이상, 흔히 말하는 금융이나 법률, 컨설팅 등 서비스업의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결국은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제조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라는 싱가포르나, 우리가 서비스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소득을 누린다고 알고 있는 스위스의 예를 든다. 이들 국가 역시 실은 제조업 분야에서 강국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약간은 논외지만, 저자는 이공계 기피문제를 제조업의 몰락에 따른 현상으로 보고 있다. IT같은 분야가 있긴 하지만 절대 다수의 이공계 인력을 사용하는 부분은 공장, 생산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제조업이다. 이공계의 가장 크고 대표적인 부분인 기계전공이 IMF 이후로 학생 수가 거의 20% 이하로 줄어든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들은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 중공업, 자동차 회사 등으로 취직했었는데 얘네들이 다 외국으로 넘어가거나 문을 닫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흔히 주장하는 수요-공급 어쩌구, 과포화, 선진국에서는 다 겪는 일이네 하는 얘기보다 열배는 명확한 주장이다.

 

4. 70-80년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하여. 그것이 정말 그렇게 문제인가? 그것이 IMF의 원인이고 이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시장)민주주의 - 그 정체는 주주 민주(?)주의이다 -, 어떤 '정치적'인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시장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해결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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