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진민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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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문
제목과 표지 디자인만 봐서는 책을 펼쳐 읽자마자 부자들을 쏴죽일 태세로 온갖 독설을 남발하리라 생각했는데 저자는 꽤 진지하고 침착하다. 스무고개 게임 하듯이 현실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주장을 차근차근 전개하고 있다. 이 서평에서 나는 저자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고 경제 성장 맹신, 소수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대중, 매체의 현실 왜곡에 대해 한국 현실 사회와 연결하여 생각해보고 저자의 낙천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생각이다.

저자의 주장
저자는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는지 밝히기에 앞서 현재 “환경 위기를 알리는 신호들이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으며” 지구와 인류가 생태학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지하수 오염, 온실 가스 배출, 생활 폐기물, 화학제품 보급,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 오염, 토지 잠식, 방사선 폐기물 등의 문제”로 인한 지구의 기후 변화는 재난을 통해 수많은 인명 피해라는 전적을 남기고 있으며 지금도 그 전적을 계속 쌓아가고 있다. 또 소수의 부를 독점한 이들에 비해 다수가 빈곤에 굶주리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이런 현상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우리가 “생태학적 위기와 사회 문제를 연관 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현상을 정확히 인지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저자는 “위기들이 분리되어 있고 이것들을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며 “사회적 위기와 생태학적 위기를 같은 뿌리를 가진 재난의 두 측면이라는 시각으로 분석해야”하고 “오늘날 지배관계에 대한 철저한 정치적 분석과 연결된 생태학적 관심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목과 같이 지구와 인류에 눈앞에 닥친 생태학적 재난은 소수 지배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체제는 과소비 이데올로기를 사회 전반에 퍼뜨려 과도한 생산으로 생태계의 존속을 위협하고,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런 주장의 정당성을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획득하고 있다.

경제 성장 맹신
경제 성장의 기치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작정한 듯 교육, 의료와 같이 가치를 따져 기회의 불평등을 조장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모두 화폐화 하기 바쁘다. 대학등록금을 빚져서 내야하는 것, 노동자들이 전보다 더 많이 일하지만 그에 맞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도 경제가 성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중산층이 몰락하는 뚜렷한 양극화 현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를 독점한 소수 지배 기득권 세력은 부를 더 빠른 속도로 축적하고 있다. 부와 빈,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산층의 소득이 갑자기 낮아진 것이 아니라 부유층의 소득과 물가가 올랐기 때문에 중산층은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정부는 대중의 왜곡된 요구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에 정권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운세에서 좋은 말만 취사선택 하듯이 수치에 민감한 사람들은 국민 소득 2만 달러가 넘거나 말거나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그 근본 원인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경제 성장에 기대기 시작했다. 부유층의 세습, 상속 메커니즘은 관심 밖이다. 경제 성장을 통해 떨어지는 떡고물, 빵부스러기를 기대한다.

이런 경제 성장에 대한 맹신에 대해 저자는 “소수 지배자들은 사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을 늘려야 한다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데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한 번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고 말하며 “경제 성장은 오늘날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빠져있는 환경에 엄청나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난 몇 십 년 동안 경제 성장이 불평등의 해소, 빈곤의 해결, 생태학적 상황의 개선에 기여한 바가 있냐고 물었을 때 “아니다”라고 말하며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런의 개념을 빌려 “물질 경제 성장을 멈추는 것”만이 이 끔찍한 덫, 즉 경제 성장이라는 가짜 현실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소수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다수
“자본주의 노멘클라투라는 최고 부유층의 사치스러운 소비 규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산층에게 퍼뜨린다. 그리고 중산층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규칙들을 재생산하며, 그 규칙들은 다시 일반 민중이나 빈곤층에 의해 모방된다.”

흔히 한국을 ‘짝퉁 천국’이라고 표현한다. 하나에 몇 백 만원을 웃도는 이른바 명품 의류와 각종 액세서리의 외형을 모방해 싸게 파는 것이 짝퉁이다. 짝퉁은 저자가 언급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규칙들을 재생산”하는 것의 적합한 예라 할 수 있다. 짝퉁보다 싸거나 비슷한 가격의 질 좋은 제품을 살 수 있음에도 비싼 값을 주고 질이 떨어지는 짝퉁을 사는 이유는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그것 이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는 이런 부자들의 소비를 모방하는 현상을 해석하는 데 미국 경제학자 베블런의 주장을 이용한다. 저자가 말하길 베블런은 인간의 이익 증대 욕구가 무한하지 않음을 주시했으며, 어느 수준 이상부터는 바로 사회적 장치들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고, 이 욕망은 자극은 과시성 소비의 원리로서 사회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한한 이익 증대의 욕구와 경쟁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경쟁으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뭉뚱그려왔다. 부자들의 과시적인 과소비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생산이 증대하고 이 생산의 증대가 생태계를 위협한다고 할 때 베블런의 주장은 경쟁을 단절하는 또 하나의 기제로 유효할 것이다. 인간의 욕구가 유한하고 어느 수준 이상부터 사회적 장치가 이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면 이 장치의 제거를 통해 불필요한 경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의 현실 왜곡
그런데 대중은 왜 항상 경제 성장과 부자들의 소비 과시에 놀아나는 걸까. 나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미디어의 현실 왜곡이라 생각한다.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를 생산, 배포하는 언론사는 소수 지배 세력과 유착되어 있으며 그들과 영합해 현실을 왜곡하는 보도를 생산, 배포한다. 저자는 그 예로 부시 행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 정신 결여를 예로 들었는데 한국 사회의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보면 그 편파적인 상황 전달과 왜곡이 눈에 띈다. 저자는 이렇게 “미디어가 도덕적으로 취약한 가장 큰 이유”를 “그들의 사장과 위계질서가 스스로를 과두 정치 세력의 완전한 구성원이라고 느끼면서 빈번히 그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이런 미디어의 왜곡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대중이 이런 미디어의 현실 왜곡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상황을 인지하는 분명한 원칙과 맥락을 유연하게 이해하는 사고를 갖춰야 할 것이다. 평소 사회 문제의식을 갖고 꾸준히 고민하며 독서하고 토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게 생각이다.

낙천주의
얼마 전 읽은 《승자독식사회》의 저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도 미래 인류 삶에 대해 낙천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저자는 소수 지배 세력을 제외한 인류는 다수이며, NGO들의 투쟁과 교토 의정서의 유지 같은 국지적인 성과에서 비롯된 시각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결국 그 다수는 사회적으로 합의해 결과를 도출한 일이 드물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에 근거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낙천적일 수 있는 걸까 싶다. 소수의 지배 세력이 미디어를 통한 현실 왜곡으로 죄수의 딜레마의 굴레 안에 다수를 가두어 둘 때 낙천적인 시각은 단순하게 순진한 시각으로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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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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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심화된 경쟁에서 승리하는 소수만이 부를 독점하고 독점한 부를 자기 강화의 과정을 통해 불려나가는 불평등의 사회를 ‘승자독식사회’라고 정의하고 경쟁이 심화된 원인을 2장 「승자독식시장의 출현」과 3장 「왜 승자독식사회는 멈추지 않는가?」에서 보여주고 이후의 장에서 교육계, 법조계, 의료계, 출판계, 문화 · 스포츠계에서의 승자독식현상을 검토, 진단, 평가하고 있으며 마지막 11장 「승자독식사회를 벗어나기 위하여」에서 제목 그대로 승자독식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교육계의 승자독식현상을 진단한 8장 「학벌 전쟁」을 집중적으로 읽었으며 이 서평에서 모든 분야에 대해 언급하고 통찰하려 하기보다 학벌 전쟁에 집중해 다른 분야까지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해 볼 생각이다.

저자들의 주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핵심은 ‘비효율’이다. 저자들은 경쟁이라는 사회적 기제는 분명히 더 좋은 질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지만 현재 사회는 무분별한 경쟁의 ‘심화’로 인해 경쟁에서 승리하고 큰 사회적 보상을 받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전체 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선별의 과정을 통해 좋은 질로 얻은 이익보다 더 많은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승자독식사회는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소수의 승자가 가져가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매력으로 많은 사람이 경쟁에 몰리게 되고 그로 인해 다른 생산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이 감소하기 때문에 전체 사회로서는 손해라는 것이다.

저자들이 언급하는 사회 각 분야의 승자독식현상은 한국 사회에 살다보면 전혀 신선하지 않다. 오히려 승자독식현상은 지금 한국 사회 전반에 비일비재해서 오히려 심각함보다는 일상적인 푸념거리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소수만 승리하는 경쟁에 뛰어드는 걸까. 좋은 대학 입학 이후엔 토익 고득점과 삼성 입사라는 같은 목표를 두고 그 많은 대학생들이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사회의 지위 기제, 교육의 왜곡, 기회의 불평등 등 많은 문제를 내재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저자들이 그 원인의 하나로 제시하는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의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 즉 “사람들은 자신을 평균 이하로 생각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생각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저자들은 이 워비곤 호수 효과가 인간의 인지 능력 한계와 관련 있다고 하는데 이는 타당해 보인다. 분명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소수다. 예컨대 삼성에서 뽑는 신입사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정은 지원하는 대학생들의 기껏해야 몇 %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너도 나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겠다고 경쟁에 뛰어들고 대학들은 이런 흐름에 뒤쳐질까 최고경영자 과정을 위해 학생들의 등록금을 더 많이 걷어 새로운 건물 짓기에 바쁘다. 과연 최고 경영자가 되겠다고 경쟁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그 경쟁의 정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인간의 인지 능력 한계와 망각의 과정,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어떤 주체성 없이(기껏해야 돈이나 지위를 목표로)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다

저자들은 “사람들은 나중에 받는 보상과 벌보다는 현재 받는 보상과 벌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이는 심리학에서 널리 인용되는 원리다.”라고 적고 있는데 한국 사회의 대학생들은 이와 반대로 현재 엄청난 등록금을 학교에 내고 있으면서 나중에 벌어들일 수 있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목매고 있다. ..

그러나 이런 현상은 대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사설 학원을 24시간 운영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해 불필요한 경쟁을 부추기고, 영어공교육을 통해 영어 사교육 시장 확대에 불을 지피고 있으며 치솟는 대학 등록금과 다수의 빚쟁이 대학생들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조급한 학생들이 승리하는 소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적은 보수로 생활하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부가 경쟁을 부추기는 정책을 통해 오히려 사회 조직 전반의 폭을 좁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육 정책의 문제에 대한 저자들의 대안은 아래와 같다.
1. 모든 주민에게 초등학교와 중등교육을 보장
2. 현대의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전문기술교육 실시
3. 엘리트 교육 보조
4. 등록금 지원

4가지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은 ‘교육 기회의 확대’다. 돈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 받을 수 있게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대책일 것이다. 또한 우수한 학생들의 교육을 지원함으로 전체 사회 생산과 교육의 질을 높이는 대안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들은 교육정책 안에서도 효율성과 형평성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다른 분야에서 언급하는 대안들은 조세 정책 변화에 치중한 경제학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교육 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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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돌출판사 2008-11-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러브마크>를 출간한 서돌출판사입니다. 우선 갑작스런 메일에 놀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온라인 서점에 작성해주신 서평 잘 보았습니다.
더불어 오는 12월 초 『치팅컬쳐-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라는 신간을 출간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신간은 '연예인의 학력위조' '정치인의 거짓말' '운동선수의 약물남용' 처럼 왜 현 사회가 속임수와 편법이 난무하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알아보고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출간 전에 일부 네티즌께 증정도서(샘플도서)를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오는 11월 28일(금)까지 mktg@seodole.co.kr 로 배송정보(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회신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늘 건강하세요.

- 서돌출판사 드림

legows 2008-11-2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 보냈습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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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연관 지어 고미숙의 문체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고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나아가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을 생각이다.


문체

“1780년…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 《열하일기》의 시작이다. 내가 고미숙의 문체를 처음 접한 건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자존심》의 한 꼭지에서였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저자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었지만 박노자와 함께 한 강연에서 고미숙은 꽤 딱딱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문체를 접했다기보다 고미숙이라는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을 처음 접한 책이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미숙은 문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이 책이 열하일기를 읽고 싶게 만드는, 열하일기에 접근하기 전 재미를 주는 매개체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고미숙의 문체가 그에 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미숙의 다른 책을 보지 못했지만 이 책에 한 해 고미숙의 문체는 한비야의 문체와 닮은 구석이 많다. 내용 전개 중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적는 것, 그 감정의 표현에 느낌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한비야가 자신의 체험을 글로 그린다면 고미숙은 공부의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고미숙의 문체를 보면서 거슬림과 유치함을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정도의 차이는 엄청나지만 내 자신 또한 정조의 문체반정,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주류 사상이었던 맹목적 고 문체 답습, 현재 한국 사회 주류 대학 지식인들의 고정된 논문체의 보수성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연암 박지원은 이런 주류 사상적 문체와 비주류 소품문체 사이에서 자유롭게 글을 썼다는 것이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고,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의 영향을 받은 고미숙 또한 이런 맹목적으로 고정된 문체를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 의미 있다는 데 이르렀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이 책에서 고미숙이 파 놓은 길대로 쭉 따라가면 책을 읽는 재미와 연암을 알아가는 재미, 간소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삶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고, 한 번 읽은 다음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고미숙이 파 놓은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으로 걸어갈 수 있다.


상대주의—계몽주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프랭크 퓨레디는 ‘21세기 무교양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모호함을 현 시대 지식인들이 빠진 ‘허무주의’와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지식인들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교육과 일반 대중에 대한 지식인의 ‘계몽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 진리에 가깝게 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고미숙 또한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nihilism)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vector)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고미숙은 연암을 통해 이런 상대주의적 허무함을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와 그들, 무리 짓기에 대한 착각》의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베레비는 그의 책에서 과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질문이 다르면 답도 다르다”고 한다. 어떤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상황마다 다른 무수한 변수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베레비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민족주의는 실재하는가?”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예를 들자면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실재할 수 있지만 한국의 그 많은 수영장에 민족주의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현실 상황의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가 존재 하는가를 물어야지 모든 것을 일반화시켜 전체로 싸잡아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면서 위와 같은 예를 든 이유는 상대주의 혹은 계몽주의 또한 한 가지 가치에 맹목적으로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다소 진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한국의 이른바 대중문화는 허무함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적인 허무함과 맹목적인 자본주의에 빠져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이런 한국 문화의 허무함과 맹목적인 돈의 노예화를 연암이나 다산처럼 역설로 혹은 신랄한 비판으로 재단하자는 소품문체의 글을 쓰거나 상소를 올려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들의 그 방자한 태도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들이 과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가를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는 절망뿐인가. 나도 모르겠다. 답을 찾기 위해 꾸준히 ‘간서치’로서 노력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말 그대로 서평인데 책 내용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이 책은 《열하일기》를 정말 읽고 싶게 만들고 연암에 대해 알고 싶게 만들며,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고지식함 혹은 고매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책이다. 게다가 동서양의 아포리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무엇보다 조선시대의 그 뒤통수를 팍 하고 치는 아포리즘을 꽤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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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 21세기의 무교양주의에 맞서다
프랭크 퓨레디 지음, 정병선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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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문에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인이라는 개념과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 원인,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1. 지식인
이 책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저자 프랭크 퓨레디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식인이라는 부류에 대한 개념 이해가 필요하다. 저자는 지식인이 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를 인식하는 태도와 활동 방식, 지지하는 가치에 따라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대학 교수가 된다고 해서 곧바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문화의 생산자들이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속한 특정한 문화 영역의 구체적인 전문지식과 권위를 그 외부의 정치적 활동을 통해 전개해야만 한다.’

이런 지식인이라는 부류도 다시 분류 가능하다. 저자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책 전체의 맥락 속에서 교육자, 정치인, 예술가를 지식인으로 재분류하고 있다. 저자는 교육자와 대학, 학생에 대해 중점적으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기도 한데, 교육자를 다시 두 부류로 분류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두 부류의 위치를 진단한 강유원의 글 일부를 보자.

우리는 교수나 시간 강사 집단을 이른바 지식인이라고 한다. 이들 지식인들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것은 이들이 대학 당국이나 국가로부터 먹고 살 수 있는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도 이걸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분석이 정확한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는 두 가지 정도 있다. 하나는 대학의 교수가 외부의 사기업 등으로부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이다. 이 때 교수는 대학 당국이나 국가 외에 사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기 때문에 그가 위하는 곳은 두 군데가 된다. 다른 하나는 시간 강사인데 이들은 자기에게 돈을 주는 대학 당국이나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수 집단에 넣어줄 수 있는 집단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것에 덧붙여 강유원은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그의 학교생활과 바깥활동 등을 모두 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기 전에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 일이며, 그런 조사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으면 일단 칭호를 주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적고 있다.

위의 인용 글을 통해 지식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저자와 강유원의 이해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용 글을 제외한 나머지 문맥도 저자와 강유원의 교육자에 대한 주장은 우연인지 아닌지 상당히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다.

2.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 원인
이런 지식인의 개념과 더불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시장의 압박과 정치적 공공정책 입안을 위한 ‘대중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지식인들의 사회, 문화적인 진보적 성찰과 행동은 사라졌으며 대중은 대중의 능력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지식인들의 이런 포용 의제에 의해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점점 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장과 대중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식인들이 진리의 상대주의에 빠져 개인적 경험을 중요시하다 보니 기준이 모호해지고 교육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니 개인의 가치에 들어맞는 선택을 하면’되는 것으로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저자의 계몽적인 주장을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한 혐오가 담긴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육이 인간 삶과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다할 때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식인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지식인이 시장의 압력에 순응한다고 할 때 저자 자신이 원인과 설명을 혼돈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시장의 압력에 순응적인 지식인의 탄생은 시장 구조의 재편에 따른 지식인들의 선택일 따름이다. 지식인의 가치 하락 또한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지식인이 직업적 전문가가 되어 시장과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무교양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다.

그러나 지식인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시장이 아니다. 과거에 지식인들은 시장에 저항하면서 성장했다.

저자가 이런 무교양주의가 시장(자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는 데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짐작컨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과 순응, 다시 말해 저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순응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 무교양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순서상 적절하다. 시장에 저항하면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당장 먹고 사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장 구조의 재편이 먼저임에도 시장 구조보다 지식인들의 사상과 행동의 각성, 계몽주의를 통한 대중의 깨달음에 기대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공공의 지적 작업에 대한 제도적이고 구체적인 승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공공적 작업을 높이 평가하고 장려하는 활동 모두가 포함된다.

한 마디로 사회 전체가 지식인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지켜주며, 지식인의 시장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 저항적, 생산적 연구를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시장주의 경쟁 사회 구조 속에서 경쟁의 방해물이 되는 의견과 주장은 자본에 의해 묵살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너그러운 마음을 바라는 것만큼 순진한 발상도 없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지식인의 각성을 통해 현실 사회 구조의 불온함을 인정하고 그 불온함 속에서 하나하나 노력으로 바꿔나갈 때 대중은 지식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다만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식인의 가치 하락이냐 시장의 압박이냐고 했을 때 시장의 압박이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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