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서평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연관 지어 고미숙의 문체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고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나아가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을 생각이다.


문체

“1780년…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 《열하일기》의 시작이다. 내가 고미숙의 문체를 처음 접한 건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자존심》의 한 꼭지에서였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의 저자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었지만 박노자와 함께 한 강연에서 고미숙은 꽤 딱딱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문체를 접했다기보다 고미숙이라는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을 처음 접한 책이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미숙은 문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이 책이 열하일기를 읽고 싶게 만드는, 열하일기에 접근하기 전 재미를 주는 매개체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고미숙의 문체가 그에 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미숙의 다른 책을 보지 못했지만 이 책에 한 해 고미숙의 문체는 한비야의 문체와 닮은 구석이 많다. 내용 전개 중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적는 것, 그 감정의 표현에 느낌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한비야가 자신의 체험을 글로 그린다면 고미숙은 공부의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고미숙의 문체를 보면서 거슬림과 유치함을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정도의 차이는 엄청나지만 내 자신 또한 정조의 문체반정,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주류 사상이었던 맹목적 고 문체 답습, 현재 한국 사회 주류 대학 지식인들의 고정된 논문체의 보수성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연암 박지원은 이런 주류 사상적 문체와 비주류 소품문체 사이에서 자유롭게 글을 썼다는 것이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고,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의 영향을 받은 고미숙 또한 이런 맹목적으로 고정된 문체를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 의미 있다는 데 이르렀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이 책에서 고미숙이 파 놓은 길대로 쭉 따라가면 책을 읽는 재미와 연암을 알아가는 재미, 간소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삶을 볼 수 있는 재미가 있고, 한 번 읽은 다음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고미숙이 파 놓은 ‘홈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으로 걸어갈 수 있다.


상대주의—계몽주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프랭크 퓨레디는 ‘21세기 무교양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모호함을 현 시대 지식인들이 빠진 ‘허무주의’와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지식인들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교육과 일반 대중에 대한 지식인의 ‘계몽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 진리에 가깝게 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고미숙 또한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nihilism)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vector)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고미숙은 연암을 통해 이런 상대주의적 허무함을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우리와 그들, 무리 짓기에 대한 착각》의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베레비는 그의 책에서 과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며 “질문이 다르면 답도 다르다”고 한다. 어떤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상황마다 다른 무수한 변수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베레비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민족주의는 실재하는가?”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예를 들자면 민족주의는 한국에서 실재할 수 있지만 한국의 그 많은 수영장에 민족주의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현실 상황의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가 존재 하는가를 물어야지 모든 것을 일반화시켜 전체로 싸잡아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면서 위와 같은 예를 든 이유는 상대주의 혹은 계몽주의 또한 한 가지 가치에 맹목적으로 치중해서는 안 된다는 다소 진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한국의 이른바 대중문화는 허무함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적인 허무함과 맹목적인 자본주의에 빠져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배웠다는 지식인들이 이런 한국 문화의 허무함과 맹목적인 돈의 노예화를 연암이나 다산처럼 역설로 혹은 신랄한 비판으로 재단하자는 소품문체의 글을 쓰거나 상소를 올려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들의 그 방자한 태도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들이 과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가를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는 절망뿐인가. 나도 모르겠다. 답을 찾기 위해 꾸준히 ‘간서치’로서 노력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말 그대로 서평인데 책 내용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이 책은 《열하일기》를 정말 읽고 싶게 만들고 연암에 대해 알고 싶게 만들며,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고지식함 혹은 고매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책이다. 게다가 동서양의 아포리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무엇보다 조선시대의 그 뒤통수를 팍 하고 치는 아포리즘을 꽤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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