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 21세기의 무교양주의에 맞서다
프랭크 퓨레디 지음, 정병선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잡문에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인이라는 개념과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 원인,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1. 지식인
이 책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에서 저자 프랭크 퓨레디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식인이라는 부류에 대한 개념 이해가 필요하다. 저자는 지식인이 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를 인식하는 태도와 활동 방식, 지지하는 가치에 따라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대학 교수가 된다고 해서 곧바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문화의 생산자들이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속한 특정한 문화 영역의 구체적인 전문지식과 권위를 그 외부의 정치적 활동을 통해 전개해야만 한다.’

이런 지식인이라는 부류도 다시 분류 가능하다. 저자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책 전체의 맥락 속에서 교육자, 정치인, 예술가를 지식인으로 재분류하고 있다. 저자는 교육자와 대학, 학생에 대해 중점적으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기도 한데, 교육자를 다시 두 부류로 분류하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두 부류의 위치를 진단한 강유원의 글 일부를 보자.

우리는 교수나 시간 강사 집단을 이른바 지식인이라고 한다. 이들 지식인들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것은 이들이 대학 당국이나 국가로부터 먹고 살 수 있는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도 이걸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분석이 정확한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는 두 가지 정도 있다. 하나는 대학의 교수가 외부의 사기업 등으로부터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이다. 이 때 교수는 대학 당국이나 국가 외에 사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기 때문에 그가 위하는 곳은 두 군데가 된다. 다른 하나는 시간 강사인데 이들은 자기에게 돈을 주는 대학 당국이나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교수 집단에 넣어줄 수 있는 집단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것에 덧붙여 강유원은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그의 학교생활과 바깥활동 등을 모두 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기 전에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 일이며, 그런 조사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으면 일단 칭호를 주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적고 있다.

위의 인용 글을 통해 지식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저자와 강유원의 이해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용 글을 제외한 나머지 문맥도 저자와 강유원의 교육자에 대한 주장은 우연인지 아닌지 상당히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다.

2.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 원인
이런 지식인의 개념과 더불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시장의 압박과 정치적 공공정책 입안을 위한 ‘대중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지식인들의 사회, 문화적인 진보적 성찰과 행동은 사라졌으며 대중은 대중의 능력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지식인들의 이런 포용 의제에 의해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점점 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장과 대중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식인들이 진리의 상대주의에 빠져 개인적 경험을 중요시하다 보니 기준이 모호해지고 교육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니 개인의 가치에 들어맞는 선택을 하면’되는 것으로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저자의 계몽적인 주장을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한 혐오가 담긴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육이 인간 삶과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다할 때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식인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지식인이 시장의 압력에 순응한다고 할 때 저자 자신이 원인과 설명을 혼돈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시장의 압력에 순응적인 지식인의 탄생은 시장 구조의 재편에 따른 지식인들의 선택일 따름이다. 지식인의 가치 하락 또한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지식인이 직업적 전문가가 되어 시장과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무교양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반대다.

그러나 지식인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시장이 아니다. 과거에 지식인들은 시장에 저항하면서 성장했다.

저자가 이런 무교양주의가 시장(자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는 데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짐작컨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과 순응, 다시 말해 저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순응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 무교양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순서상 적절하다. 시장에 저항하면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당장 먹고 사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장 구조의 재편이 먼저임에도 시장 구조보다 지식인들의 사상과 행동의 각성, 계몽주의를 통한 대중의 깨달음에 기대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지식인과 대중의 역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공공의 지적 작업에 대한 제도적이고 구체적인 승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공공적 작업을 높이 평가하고 장려하는 활동 모두가 포함된다.

한 마디로 사회 전체가 지식인의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지켜주며, 지식인의 시장과 체제에 대한 비판적, 저항적, 생산적 연구를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시장주의 경쟁 사회 구조 속에서 경쟁의 방해물이 되는 의견과 주장은 자본에 의해 묵살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너그러운 마음을 바라는 것만큼 순진한 발상도 없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지식인의 각성을 통해 현실 사회 구조의 불온함을 인정하고 그 불온함 속에서 하나하나 노력으로 바꿔나갈 때 대중은 지식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다만 지식 실용주의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식인의 가치 하락이냐 시장의 압박이냐고 했을 때 시장의 압박이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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