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커넥션 미래의 문학 4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출판사 폴라북스의 "미래의 문학" 시리즈로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베스터의 휘황찬란한 영광은 첫 두 장편 소설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작가의 최고작만을 골라 읽으며 눈먼 숭배를 바치고 신성을 부여해대는 건 꼴불견이긴 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지난 10여년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두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SF 작가'로 떠받들어 왔던 사람이, 뒤늦게 소개되는 힘 빠진 후기작 한 권 때문에 '각종 부침이 있었고 후기로 갈수록 기력이 쇠하기는 했지만 전성기에는 빼어난 작품을 내기도 했던 훌륭한 작가' 정도로 격하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분명 있었다. 작품이 별로 안 좋다면 내지 말 것이지, 그걸 굳이 작가 이름 내세워서 팔고 싶을까, 하는 마음에 출판사 폴라북스를 살짝 원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컴퓨터 커넥션을 펴든 다음, 나는 첫 두 문장을 읽고 파안대소했고, 첫 두 장을 읽은 다음에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입에 걸린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쉰 쪽을 읽은 다음에는 이것은 약을 먹고 쓴 책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약을 먹었다느니 약을 빨았다느니 하는 수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작가가 약을 먹고 쓴 것 같은 책은 본 적이 없다. 작가 자신이 약 먹고 쓴 책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네이키드 런치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약 기운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필립 K. 딕의 장편은 약을 먹고 썼다기보다는 그냥 침착하게 돌아버린 작가가 쓴 글이었다. 그밖에 약 먹고 쓴 것 같다는 평을 듣는 책들은 모두 과격함을 정교하게 계산한 '예술품'이거나 위악을 떠는 작품에 가까웠다. 그러나 컴퓨터 커넥션을 약을 먹고 쓴 게 아니라면, 베스터가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상상이 안 된다. 평생을 폭죽과 풍선과 꽃다발과 흰 면장갑과 광대 가면과 훈제 청어와 날파리와 이구아나와 피라냐와 아세톤과 구정물이 가득 들어찬 머리통을 이고 살아가야 했던 어릿광대?

 

 보통 과격하게 돌아버린 책이란 작가가 주변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은 채 한우물만 파다가 정신이 나가서 안드로메다로 가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평소에는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뒀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자' 하는 정신으로 실험을 해대는 책이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그 집요한 일관성과 응집력이 독자를 기진맥진하게 하거나 어처구니없게 한다. 그러나 컴퓨터 커넥션은 일관성을 철저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돌아버린 보기 드문 책이다. 물론 형식상의 줄거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직접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려고 해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컴퓨터 커넥션에 묘사된 사건의 경중을 가리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요악하고 압축하려면 핵심 사건을 추려내고 잔가지를 쳐야 할 텐데, 베스터는 시종일관 잔가지가 더 중요한 듯 굴고 있다. 아니, 차라리 잔가지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련다.

 

 이런 책이라면 명확한 지향점이 없고 횡설수설로만 가득 차서 산만하기만 하다는 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쓰고 쓸쓸히 퇴장함이 마땅하리라. 그런데 베스터는 그걸 끊임없이 눈을 붙드는 신기한 등장인물과 사건과 설정의 폭격과 광포한 속도로 덮어버린다. 역자 해설에서도 작가 자신의 발언을 인용하며 언급하지만, 정말이지 이 사람은 근사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이색적인 아이디어가 끝도 없이 쏟아진다. (어떤 아이디어인지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 자체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서는 오직 작가의 태도에 관해 언급하는 정도로만 만족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자기 아이디어에 심취해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에 파묻힌 채 독자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또 자기 아이디어에 심취해서 한 아이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집착하여 글의 흐름을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카드 한 장을 꺼내 독자를 얼얼하게 한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리고 다음 카드를 꺼내는 모습이 흡사 환절기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가 크리넥스 뽑아 쓰는 꼴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애초에 무언가를 지향했는데 산만해서 못한 게 아니라 아무런 지향점도 없이 아이디어 쏟아내기에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컴퓨터 커넥션의 방향성 부재는 단점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언젠가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말했듯, "푸른 영화를 만들었는데 붉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근사하게 돌아버린 소설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내겐 늘 로저 젤라즈니의 모험 SF/팬터지가 "어릿광대/트릭스터" 이야기의 모범으로 남아 있었는데, 컴퓨터 커넥션의 베스터에 비하면 젤라즈니는 얌전한 모범생에 불과하다. (젤라즈니의 가장 과격한 소설 별을 쫓는 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최종적인 인상을 정리하자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가장 자주 떠올랐던 이미지는조야하지만 눈길을 뗄 수 없는 원색으로 가득한, 그 그림체나 색채 때문에 어딘가 순박하다는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막상 디테일은 언제든 미쳐 돌아갈 준비도 돼 있는, 그러면서 매 화를 계속해서 클리프 행어로 끊는 바람에 독자들이 손톱을 질겅질걸 물어뜯어 가며 다음 호를 기다리도록 하는, 그리고 설령 한 사건이 일단락되더라도 계속해서 다음 사건의 전조가 이어지며 이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는 행복감을 전해주는 (그렇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서 끊어 읽어도 마찬가지인), 최종적으로 그 난장판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화려하고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유대관계인, 옛적 엑스맨연재만화의 모습이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엑스맨: 다크 피닉스 사가같은 거.) 이러한 인상은 실제로 만화계나 라디오 드라마계에서 활동했다는 베스터의 이력에서 어느 정도 기인했겠지만, 그런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꽤 정확한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목표를 두고 내달리며 자신만의 닫힌 세계를 만드는 한 편의 작품이 되기를 거부한 채, 대신 우리 문화의 한 귀퉁이에서 늘 함께하면서 제멋대로 자생한 모습으로만 남아있기를 자청한 듯한 위대한 잡동사니. 이것은 진정 좋은 의미에서 만화적인 소설이다나는 이제 베스터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세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SF 작가'로 떠받들련다. 고마워요, 폴라북스.

 

 사족을 더하자면, 이 책 뒤에는 SF계 최고의 독설가로 이름난 할란 엘리슨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이 글 또한 본편 못지않게 즐거우며, 내 감상문 따위는 신생아의 옹알이로 느껴지게 할 정도로 호화롭고 눈부시다. 어쩌면 이 책 덕분에 엘리슨의 팬이 늘지도 모르겠다. 제발 엘리슨의 책도 출간되기를. 반면 역자 조호근의 해설은 차분하고 명확하기는 하지만 너무 변명조가 아닌가 싶다. 글쎄, 엘리슨이 컴퓨터 커넥션자체를 찬양하기 어려운 까닭에 베스터라는 작가의 거대함을 에둘러 찬양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그렇게 성격 좋은 인간이 아닐 텐데?)

 

 한편, 지금까지 나온 "미래의 문학" 출간작을 돌아보니 하나같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안드로메다까지 가서 폭발하는(혹은 일단 안드로메다로 가기는 하는데 거기서 피시식 꺼지는) 작품들뿐이다. 독자로서 무척 반갑기는 하다. 그러나 출판사의 판매 부수는 무척 걱정스럽다. SF 소설 선물하기를 즐기는 나만 하더라도 한때 종교학과에 몸담았던 지인에게 정신기생체를 한 권 선물한 적이 있을뿐이니. 다른 책들은 차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엄두를 못 내겠다. (한때 언어학과에 몸담았던 지인에게 바벨-17을 선물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겠으나, 이미 테드 창을 소개한 다음인지라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너무 짧고 굵게 타오르려고만 하지 마시고 적당히 팔릴 만한 책으로 보신도 하시면서 오래 버텨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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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 2013-07-18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 서핑 중 간만에 폭풍처럼 호객 에너지를 발산하는 서평을 읽게 되는군요. 베스터의 후기작들은 워낙 평이 안좋아서 전혀 구매 의지가 없었는데 장바구니에 책을 아니 담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정신기생체 미래의 문학 1
콜린 윌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열두 권짜리 필립 K. 딕 걸작선이라는, 솔직히 말해서 한 예닐곱 권쯤에서 시장 호응 부족으로 중단되지 않을까싶었던 기획을 보란 듯이 계획대로 실천하여 이 회의적인 독자를 부끄럽게 한 폴라북스에서 (쉬지도 않고) 새로이 시작한 SF 시리즈, “미래의 문학첫 번째 작품. 실은 필립 K. 딕 걸작선만으로도 이미 까임방지권을 획득한데다 차후 출간될 미래의 문학작품 목록 또한 반갑기 그지없는 터라, 설령 이번 첫 작품이 좀 성에 차지 않더라도 장차 이어질 폴라북스의 분투를 응원하며운운하는 말로 적당히 둘러댈 마음까지 있었다. 그런데 작품마저 재밌으니, 다시금 부끄러울 뿐이다.

 

* * *

 

 하지만 폴라북스여, 예비 독자의 걱정을 이해해주시길. 출판사 소개만 읽었을 때는 반가움만큼이나 불안이 컸단 말이다.

 

20세기 환상문학의 거인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세계에서 영감을 얻은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의 기본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쓴 독특한 작품이다. SF와 호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읽는 재미'라는 현대적인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품격을 갖춘 걸작으로, 출간되자마자 유럽,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의 문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유사 작품의 창작을 촉발하였다.

 

 

벨리코프스키에서 구르지예프까지, 서양 은비학隱秘學과 유사과학을 총망라하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 의식의 무한한 잠재력과 양면성에 대한 윌슨의 신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무릇 저마다 자신이 내는 책이 훌륭하다고 주장하려 애쓰기 마련인 출판사들의 농간에 여러 차례 당해본 독자라면, 이 소개에서 불길한 흔적을 여럿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쓴이라거나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의 품격”, 혹은 신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같은 표현은 어쩌면 이 책이 소설인 척하는 장광설의 향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전율케 한다. 거기다 “‘읽는 재미라는 현대적인 목적에 충실하면서도라는 문구를 굳이 넣었으니, 이 예감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혹시 피해의식이 심한 장르 팬이라면 “SF와 호러소설의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라는 표현이 마치 SF와 호러소설은 철학적 깊이를 포괄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하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의식이 그 정도라면 잠시 책은 덮어두고 자연을 벗 삼아 몸과 마음을 좀 다스리시는 것도 생각해 볼 법하다)

 

 더구나 이 책을 접하는 상당수 독자는 김상훈이라는 번역/기획자의 이름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그리고 아마 출판사와 번역자 자신도) 그렇지 않은, 김상훈이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도 이 책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막강한 번역/기획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김상훈은 쿼런틴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처럼 한국의 많은 SF 독자가 ‘SF란 본디 이런 것이라며 숭앙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스타십 트루퍼스퍼언 연대기혹은 다이디타운, 또는 다아시 경 시리즈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퍽 가볍고 재미있는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와 출판사)를 배려하는 폭넓은 취향을 지니고 있지만, 가끔씩 오로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을 위해서 낸 듯한, ‘갈 데까지 간작품을 기획/번역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H. P. 러브크래프트 풍 공포/SF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가 갑자기 하염없이 우주로 날아가던() 그 소설의 지루함이 안겨준 형언할 수 없는 무정형의 공포는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니 아예 러브크래프트와의 혈연관계를 밝히며 시작하는 + “19세기 철학적 교양소설의 품격을 지녔다는 + 소설보다는 논픽션 작가/비평가로 훨씬 유명한 콜린 윌슨이 쓴 +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역/기획자 김상훈이 오랫동안 출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왔던! 정신기생체를 대하는 마음이 아주 편할 수는 없었던 것도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 * *

 

 , 그때는 그랬다 치고, 그럼 어쨌든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인 지금은 정신기생체를 내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어 할 만큼 좋아하게 되었으니, 나는 기꺼이 다른 예비 독자들의 불안을 해소해줄 수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저 출판사 소개는 상당히 정확하며, 이 책은 손쉽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할 만한 외부적 사건보다는 1인칭 주인공 시점 화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깨달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이란 모름지기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 등 단단한 물리적 실체에 바탕을 두고 뻗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 독자에게는 섣불리 권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계의 집후반부에도 엄연히 물리적 실체를 지닌 행성과 우주가,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나 없는 독자 다 나가떨어지기 전에, 비록 하염없이 이어지는 사변에 의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장황하거나 조잡스런 디테일에 매달리느라 늘어지지는 않으며, 사고의 전개 과정이 종종 당혹스러우리만치 과격한 통에 SF다운 장쾌감을 제공함과 동시에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폭소를 터뜨릴 만큼 웃기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굳이 이 작품을 어떤 분류 속에 집어넣자면 개그-사이비-철학 SF 정도가 될 터인데, 그 뻥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잘 치는 거다.

 

 더불어 그 뻥의 기저에는 (콜린 윌슨의 다른 저작에서도 꾸준히 전개된다는) 쉬이 눈 돌리기 어려운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인고 하니, 대체 왜 지금 이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류는 과거의 인류에 비해서 훨씬 분열적인 모습을 내비치며, 왜 자꾸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일에 쫓겨 살면서 자신을 연민하고 불행의 늪에 빠져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의식이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이 우울증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개개인의 신경증이나 인생 역정으로 돌리고 안주하는 대신 문제의 근원을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대라는 시대 자체로까지 확장해서 질문을 던져보곤 하던 독자라면, (혹은 지루한 일상의 분열과 우울 및 그 회복 방안에 대한 논의에 익숙한 온갖 인문사회학 전공분야의 학도들이라면?) 윌슨이 정신기생체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질이 그 외양만큼 무턱대고 과격하기만 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일상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침체와 자기연민/혐오를 아프게 파고들어 온다는 사실을 실감하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마침 그런 식의 어두컴컴함에 절어 있던 독자였기에, 그 어떤 과격한 전개가 이어지더라도 정신기생체에 대한 공포와 그에 맞선 분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는 거꾸로, 바로 그와 같은 굳건한 줄기가 있기 때문에 다소 황망하고 얄팍한 비약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디테일 부족이나 어설픈 망상의 소산물이라고 꼬집기보다는 오히려 SF 특유의 가슴 탁 트이는 도약으로 여기기도 했고. 외계 문명과 인류의 비밀수준의 음모론(?)과 순진하기 짝이 없는 국제 정세 묘사, 그리고 H. P. 러브크래프트 팬의 가슴을 한껏 부풀어 오르도록 했다가 완전히 엿 먹이는 작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윌슨이 서문에서 말했듯 이것이 구태의연한 러브크래프트 풍 소설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후계자라는 점도 인정해야만 하겠다.)조차 작품의 힘을 떨어뜨린다기보다는 그 막 나가는 걸음걸이에 어울리는 장식물처럼 여겨졌다고나 할까. 하여간 여러모로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SF다운 즐거움이 있는 SF였다.

 

* * *

 

 , 그리고 심지어 역자 해설마저도마치 심연 위의 불길2권 역자 해설의 심심함을 보상이라도 하듯재미있고 유익하다. 특히 콜린 윌슨 약력 읽다가 웃겨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필립 K. 딕 걸작선의 미친 작가 연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참 쓸모없는 디테일이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생계유지라는 가혹하고 분열적인 일상의 조건에 가려져 있기 일쑤인 저 노동이라는 세계의 심연에서, 언젠가 다시 세상을 지배할 날만을 기다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팬심/애정/덕력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옛 존재들"이 아직도 얼마나 숭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 일면을 목격한 듯한 기분.

 

 모쪼록 폴라북스도 그런 팬심/애정/덕력을 바탕으로 계속 독자를 즐겁게 해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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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3-02-1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이계의 집』이라든지…

[스타십 트루퍼스](영화로 땜빵)와 연대기 같은 시리즈물을 빼면 저와 독서 편력이 일치하시네요. 김상훈 그리고 HPL 찬양도 제가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고. 원래 마이너한 분야일수록 팬심이 강력하죠. 여러 모로 비슷한 분을 만나 대단히 반갑습니다.

이 책은 우연히 레이더에 잡혔는데, 마침 대단히 적절한 리뷰가 달려 있으니 주저 없이 사겠습니다. 거듭 반가웠습니다. [이계의 집] 만세.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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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만으로도 수년 동안 보고 싶었던 코넬 울리치의 대표 장편 중 하나. 코넬 울리치는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환상의 여인』이 특히 세계 3대 추리소설 운운하는 명성을 휘날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이 목록에 들어가는 다른 두 작품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을 쓴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처럼 매력적인 탐정을 내세워 트릭을 파해하는 본격 추리스러운 요소에 몰두하기보다는, 기괴하고 음울하며 또한 낭만적인 밤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 시간제한을 두고 벌어지는 서스펜스라는 측면이 더 돋보이는 작가이며, 나는 그렇기에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영화계 쪽에서 출발한 "누아르"라는 표현을 다시 소설 쪽으로 이식해 와서 사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의미에서의 "누아르"에 어울리는 소설을 접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잘못하면 영화 쪽의 "누아르"가 지니는 의미조차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울리치의 작품 만큼은 정진정명 "추리소설"보다는 "누아르"가 더 어울린다. 그의 문장이 그려내는 빛과 어두움의 세계는 마치 손가락으로 차가운 허공을 휘저으면 손끝에 어둠이 검댕처럼 묻어날 것만 같고, 꼭 위험천만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불길함이, 추리소설에 필요한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섭리가 배어나온다. 마치 40년대의 발 루튼 공포영화가 그러하듯. (그렇기에 나는 최고의 울리치 영화는 결국 발 루튼이 제작하고 자크 투르네르가 연출한 〈표범 인간〉(The Leopard Man, 1943)이라고 믿는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울리치의 이러한 특성을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다. 퇴근 후 한 잔 걸치러 가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홀로 고즈넉한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형사가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구한 뒤 사정을 듣는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 온 작은 사건이 그녀를 신비롭고 음울한 예언자에게로 인도했으며, 그녀의 가족이 점점 더 그의 예언에 의지하게 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모 월 모 일 모 시에 사자의 아가리 아래에서 죽으리라는 예언이 던져졌음을. 가족은 도망갈 길 없는 숙명의 무게 아래에 스스로 절망하고, 경찰들은 끝까지 이성을 믿으며 예언을 파해하고자 한다.

 그런데 더없이 울리치스러운 이러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남고 만다. 문제는 울리치스러움의 부재가 아니라 울리치스러움의 과잉에 있다. 그는 모든 순간, 모든 사건을 하염없이 멋을 부려가면서 직설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한사코 피한 채로 어떻게든 간접적으로, 독자가 문장 자체를 음미하되 정보는 뒤늦게 깨닫게끔 글을 이어나간다. 혹은 이미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고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제시한 다음 장면을 고속 촬영하듯 하염없이 느리게 끌고 가면서 세부를 끝없이 묘사한다. 1초 짜리 영상 하나로 족할 것을 100만 장의 연속 스냅 사진으로 찍은 다음 각각의 사진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에 대해서 논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것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감미로운 즐거움을 만들어내지만 500페이지가 넘도록 그러고 있노라면 독자부터 지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풀어내는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하염없이 간단하고 어떤 면에서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진부해서, 다 읽고 나면 절로 본전 생각이 난다. '내가 결국 이걸 위해서 500여 페이지를 붙들고 있었단 말인가.' 오해 마시길. 나는 이야기만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독자는 아니다. 또는 어떤 진부한 이야기도 좋은 이야기꾼의 솜씨 하에서는 거듭 읽어도 재미를 잃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에서 초조하게 억눌린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스타일에 공을 들이는 데에 쓰이는 분량과 그러한 스타일을 정당화 해주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에 쓰이는 분량의 비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율이 맞지 않으며, 결국 작품이 폼 잡기만 남고 사실 할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인상마저 남긴다. 심지어 결말의 모호함에서 오는 아이러니나 비극적인 숙명성조차도 실망감 속에 휘발되고 만다.

 더욱 유감스러운 사실. 그렇게 철저히 스타일에 의지해 나가는 작품이라면 번역이라도 좋아야 할 텐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도저히 못 봐줄 만한 최악의 번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울리치의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뻣뻣하다. 처음에는 이걸 좋은 징조로 보았다. 눈 앞의 사건에 다소 거리를 두고 에둘러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 과잉 친절을 베푸는 역자를 만나게 되면 원래 지니고 있었던 뉘앙스의 맛이 다 날아가 버리는 터라 직역 중심의 역자를 만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국어판의 역자는 지나칠 정도로 영어 문장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어서 문장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전에 문장 자체의 거칠거칠한 면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든다. 예가 한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만 지적하자면 대명사의 지나친 활용이다. 마치 원문에서 사용된 모든 대명사를 다 그대로 옮긴 듯 대명사가 많이 나온다. 자신이 관리하던 암사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조련사의 입에서 "그들이 그녀를 쐈어요."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Come on!

 이 정도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비판은 충분한 듯하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덜 준다는 심정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요즘 출판업계의 관행에 비추어 보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겠으나, 편집을 헐렁헐렁하게 해서 한 쪽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많지 않아 책이 하염없이 두꺼워진 가운데 더구나 판형도 좀 큰 편이다. 종이도 그리 얇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고. 크기에 있어 거의 비슷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상』과 비교해 보면 (마침 내 옆의 책장에 꽂혀 있어서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더구나, 이건 다소 개인적인 느낌에 의거한 소리이기는 하지만, 울리치의 작품은 이렇게 두툼하고 커다랗고 육중한 판형으로 나와 한 번 펼 때마다 각잡고 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원래 분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좀 더 부담이 덜한 책을 만들고자 노력할 수는 없었을까?

 이 책에서 그마나 예상 이상으로 좋았던 부분은 책 말미에 수록된 해설인데, 울리치 소설의 정수를 썩 잘 짚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영화 작품을 인용함에 있어서도 실제로 영화를 좀 알고 썼다는 느낌이 들어서 '번역 솜씨와 별개로 꽤 내공은 있는 역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외국의 울리치 연구가가 쓴 글이었음. 어쨌든 그 글은 괜찮았다. 이것이 이 책을 출간하는 데에 하여튼 노력을 기울였을 분들께 그나마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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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의 집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시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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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양각종의 SF를 좋아하면서도 결국 가장 훌륭한 SF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면 다소 꽉 막힌 원리주의자처럼 "SF의 본질", "SF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드 SF 쪽으로 기울고 마는 성벽과는 반대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이 장르의 팬들이 제일로 치는 즐거움, 즉 사건의 해법을 둘러싸고 작가를 대상으로 벌이는 두뇌 싸움에는 통 관심이 가지 않는 편이다. 몇몇 독자를 농락하는 데에 우수한 솜씨를 발휘하는 퍼즐 미스터리,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을 때면 종종 작가가 유인하는 방향대로 머리를 돌려가며 '이 사람이 범인인가? 아니면 저 사람?'하는 식으로 정답을 추측해 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모 아니면 도, 복권 긁듯 때려 맞추는 기분일 뿐, 나름의 추리력을 동원하여 가설을 세우고 정말로 퍼즐을 풀 때처럼 접근하는 경우는 없다.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꼽아 보아도 서구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혹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대가들이 쓴 작품이 떠오를 뿐이니, 내게 추리소설이란 작가와 독자의 공정한 두뇌 싸움보다는 파편적인 정보를 수집해 가면서 전체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 자체의 모습에 주목하는 장르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앞서 추리소설의 본질은 결국 두뇌 싸움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지만 성급한 판단일수도 있겠다. 추리소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나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공정한 두뇌 싸움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범죄 수사 과정 자체가 암시하는 근대 세계의 풍경이나 세계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까닭에 사회파 추리소설들에 반기를 들고 추리소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며 쏟아져 나온 이른바 본격 추리소설들에는 오히려 정이 안 가는 편이다. 이 방면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 같은 작품을 읽어 보아도, 물론 몇 백 페이지를 할애하여 가열차게 두뇌 게임을 시도하는 그 결기에는 압도당하게 되지만 결국 좀처럼 다시 읽고 싶어지거나 평생 곁에 두고 함께 하고 싶어지지는 않는다고나 할까. 물론 모든 좋은 책이 반드시 그런 매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몇 백 페이지를 따라 왔는데도 결국 미술관 도록을 통해 걸작 명화를 감상하는 듯이 마음은 이만큼 멀리 떨어진 채로 '그것 참 걸작이로고.'한 다음 곧장 옆 페이지로 눈을 돌리는 기분이 들어버리니, 책에게나 나 스스로에게나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하드 SF가 요구하는 박진감 넘치는 사고의 확장에는 적극 동참하면서 본격 추리소설의 게임에는 응하지 못하나. 아마도 하드 SF는 사고의 전환을 함께 해주지 않으면 이야기, 혹은 특정 장면의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반면 퍼즐 미스터리의 경우 독자는 어디까지나 왓슨 박사와 같은 존재로, 사건의 진상을 꼭 파악하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질질 끌리듯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고의 전환은 어디까지나 명탐정이 알아서 해주면 그만이고 독자는 뒤늦게 설명을 받아 먹기만 해도 된다고나 할까. 소설이 제공하는 서사 자체의 추동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태를 정리하고 스스로 답을 찾고 싶게 만드는 호기심을 압도하기 때문인 듯도 한데, 그렇다면 사실 본격 추리소설이 의도하는 바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은 소설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소시적에 나와 같은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곤 했던 퀴즈 형식의 추리 문제집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저런 가설 및 자기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의 애독자라면 줄창 삭막하고 냉엄하고 우울하고 우수에 젖은 하드보일드만 읽어댈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번쯤은 수학 문제집을 다시 들춰 보고 싶어지듯 (나만 그러려나?) 종종 다시 본격 추리소설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시기가 있는데, 최근의 내가 그랬다. 그리하여 몇몇 작은 실패들─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작품들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을 뒤로 하고 집어든 책이 바로 기시 유스케의 신간, 『도깨비불의 집』 이다. 기시 유스케라면 공포소설, SF, 인터랙티브 게임 소설, 본격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필력 있는 작가로 나도 꽤 여러 작품을 읽은 바 있는데, 특히 『도깨비불의 집』의 전편에 해당하는 본격 추리소설 『유리 망치』의 경우는 나도 퍽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생겼다.

 전편과 달리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인 이 작품은 전편의 변호사 아오토 준코와 방범설비 전문가(이자 전직이라고는 하지만 현직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도둑놈) 에노모토 케이 콤비가 일련의 밀실 살인 사건에 도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아 그러십니까,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독이 될 수도 있는 설정이다. 이미 『유리 망치』를 통해 밀실 트릭의 끝을 한 번 본 상황에서 하필 같은 캐릭터를 등장시켜 밀실 트릭을 네 번이나 더 다루다니, 이쯤되면 두뇌 싸움이고 뭐고 하기 이전에 밀실 강박에 대한 패러디처럼 느껴질 법도 하다. 물론 애초에 퍼즐 미스터리의 탐정들이란 범인(凡人)의 상궤를 뛰어 넘는 횟수의 범죄 상황을 꾸준히 맞이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독자들은 아무튼 게임에 말려들고 만다는 사실은 추리 만화의 양대 거두 긴다이치 소년과 소년 탐정 코난이 여실히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여러 작가의 밀실 트릭만 골라 묶은 앤솔로지도 아니고, 똑같은 캐릭터가 계속 등장하는 가운데 밀실 트릭만 네 번을 다루는 단편집이라니, 쓰는 쪽도 읽는 쪽도 식상해지기 십상이며, 처음 한두 사건은 그럭저럭 읽어간다 치더라도 뒤로 갈수록 상황 자체의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흘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기시는 이 점을 충분히 잘 커버해 내고 있다. 이 작가는 퍼즐 미스터리를 다루더라도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작들이 종종 그러하듯 사실상 이름이고 뭐고 상관 없이 "탐정" 내지 "문제 출제자" 정도로만 꼬리표를 달아도 괜찮은 백지장처럼 얇은 캐릭터를 만들지 않고 최소한의 삶을 부여하고 있는데, 일단 이 점이 독자로 하여금 사건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진입로 역할을 해준다. 당장 독자들이 머리를 쥐어 감싸고 신음하는 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캐릭터들이 만나고 사건에 다가가는 과정은 대강대강 해둔 채로 문제를 툭 던지는 대신 주인공들이 평소에 뭘 어떻게 하고 사는 인물인지, 그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런 사건과 얽히게 될 수 있는지를 촘촘히 꾸려 가고, 인물의 성격을 기반으로 해서 그들이 사건에 접근하는 태도와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결정한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 두 번째 단편인 「검은 이빨」이다. 이 단편은 사건이 벌어진 하나의 방 안에 세 등장인물이 함께 있다가 탐정 노릇을 하는 인물이 이따금씩 밖으로 나와서 다른 탐정과 의견을 교환하고, 다시 들어가서 가설을 체크하고 추가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나와서 토론하고, 또 들어가서 가설 체크 및 정보 수집 과정을 거치고… 하는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실로 작위적이기 그지 없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변호사 준코가 어떤 계기로 해서 이 방에 들어서게 되었는가, 그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은 어떤 성격을 지닌 사람인가 등등이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지탱해 주고 있어서 독자는 구조의 인위성을 단점으로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매번 다시 방에 들어가는 준코의 결정에 동의하게 되고, 그 결정이 야기하는 곤란함을 즐기게 된다. 예를 들어 죽은 친구가 남긴 애완동물을 보호하겠노라고 열을 올려대는 막무가내 의뢰인을 만나서 땀을 뻘뻘 흘리는 준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의 도입부는 웬만한 작품들에선 그냥 가벼운 유머나 캐릭터 설정으로만 남았을 터이다. 그러나 기시는 여기서 준코가 "애완동물"의 정체를 오해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해서 의뢰인을 달래고자 섣불리 떠올리게 된 애완동물에 관한 법률 등속을 자잘한 재미로만 남겨두는 대신 그런 자잘한 착오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이어지고, 그 실수에 대한 걱정이 이야기 내내 준코의 심리에 남도록 하면서 그녀가 계속해서 이 밀실에 매달리게 만든다. 밀실 트릭 자체뿐만이 아니라 서사를 끌고 가는 캐릭터 또한 독자로 하여금 현장에 함께 남아 준코와 함께 사고해주기를 요구한다.

 한편 『유리 망치』에서도 느꼈던 점이지만, 기시의 본격 추리소설은 성실하고 집요한 면이 있다. 작가 자신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들도 그래서,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가능한 온갖 해법을 다 제시하고 그걸 또 일일이 반론을 펴면서 부정한다. 웬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놈 하나가 멀찍이서 이리저리 현장 좀 둘러 보고 "아, 이제 알겠군. 하지만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야."라며 시건방지게 굴지 않아서 좋다. 준코건 케이건 두뇌를 풀가동해서 계속 생각을 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과정이 다 드러난다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도 다 제시해주는 소설보다는 이쪽이 더 '공정'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접근법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주인공들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의 가설을 검토하는 과정을 따라 가고 있노라면 묘하게도 여기에는 단 하나의 해법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의 해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물론 범인이 취한 행동은 분명한 하나의 과거로 남아 있고, 결국 주인공들은 그 행동을 역추적해 찾아내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범인이 취했을 수도 있는 다른 수법'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비록 결말에서 주어지는 정답은 하나일지라도, 폐기된 가설들 또한 정답 못지 않게 풍성하고 합리적이며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경우의 수'임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사고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퍼즐 미스터리가 빚어내기 쉬운, 결말에 집착하는 태도가 흩뜨려지면서 사고 자체의 풍성함을 즐기게 되고, 현실을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된 과거의 무엇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하나의 결과를 둘러싼 여러가지 가능항이라는 형태로 인지하게 된다. 퍼즐 미스터리에서이런 인지적 풍요로움을 맛본 예가 극히 드물기에 놀라운 즐거움이었다.

 더불어 단편이라는 형식 또한 기시에게는 득이 되고 있다. 기시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한다면 성실하게 조사한 내용을 작중에서 몽땅 써먹으려고 드는 태도다. '대체 저런 지식은 어디서 알아 왔을까' 싶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를 대사를 통해 끌어들인 다음 이야기를 펼쳐 나가면서 죄다 실제로 써먹는데, 이게 장편 소설이라는 형식에서는 좀 답답하고 꽉 막힌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가 쉽다. 반면 단편에서는, 특히 본격 추리 단편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정묘한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데에 효과적이다.

 끝으로 특히 마지막 단편에서 드러나는 자의식적 태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작중에서 준코가 '이러다가 밀실 사건 전문 변호사로 찍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목도 여러 번 등장하지만, 점점 더 강도 높은 밀실 트릭을 꾸려 가다가 마지막 단편 「개는 알고 있다」에서 톤을 바꾸면서 밀실 사건만 중첩되는 이런 상황 자체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를 시도하는 솜씨는 흥겹기까지 하다. 이쯤 보여줬으니까 이제 슬슬 밀실에 집착한 우리네의 정신 세계를 두고 함께 웃어 보자는 식인데, 놀라운 점은 그러면서도 또한 여전히 합리적인 밀실 트릭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명탐정의 규칙』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긴 했지만 그 경우 사실상 밀실 트릭을 탐구하는 태도 자체는 포기하고 공허한 패러디로만 남은 반면 기시는 양껏 웃음을 안기면서도 여전히 밀실 트릭을 훌륭히 완성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우수하다.

 결과적으로 최근에 읽은 일련의 본격 추리소설 작품 중 특히 만족스러웠던 작품으로, 새삼 100% 퍼즐 풀이에만 집착하는 태도보다는 여전히 "소설"로서의 입장을 성실히 의식하면서 인물을 꼼꼼히 구축하고 나아가는 작품 쪽이 결국은 퍼즐 미스터리로서도 성공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되새겨주는 예라 하겠다. 단편인 만큼 휘몰아치는 맛은 없지만, 언뜻 보기에 가벼우면서도 충일감을 제공해주는 독서를 원하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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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홀 Blue Hole 1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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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북스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만화 『2001 야화』를 복간했을 때 그 장쾌함에 감탄을 거듭하면서도 이런 내용과 그림체의 만화가 많이 팔려주려나 걱정했건만, 걱정도 잠시, 『2001 야화』의 속편 내지 번외편이라 할 수 있는 『2001+5』가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단편집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도 다시 선보이고, 『블루 홀』까지 출간이 되었다. 이 작가를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작가, SF 작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 쉬워서 SF지 우리나라 SF팬 특유의 고지식한 장르 경계 따지기 버릇에서 충분히 빠져나오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호시노의 작품이 지닌 SF로서의 성격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을 해보고 싶어진다. 내 경우엔 『2001 야화』를 만났을 때부터 ‘아, 만화라는 매체에서도 이렇게 대담한 SF가 가능하구나’하고 놀랐지만, SF의 “S”를 과학적 엄밀함에서 찾는 독자들에게 호시노의 작품 상당수는 오히려 팬터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설정을 끌고 가서 다른 설정과 맞물리게 하면서 세계의 상황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를 몰고 온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SF의 방법론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소재 자체는 종종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터무니없거나 오히려 읽는 독자가 민망해질 정도로 고리타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편집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가 그렇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는 그 황당무계하고 과격한 설정들 때문인지 분명 SF의 기풍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무언가 좀 더 옛적의, (골이 빠개지도록 SF의 방법론을 탐구하거나 혹은 묵직한 문학적/철학적/인류학적… 기타 등등 하여간에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있는, “세련된” 작품들 말고,) 마음껏 공상의 날개를 퍼덕이며 돌아다녔던 “공상과학”의 영토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기분이다. (어느 정도는 극화체 작풍과 과격한 생명체 디자인에서 비롯한 느낌인 듯.)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쯤 되면 딱히 SF로서 인지할 필요는 없는 작품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마냥 손 털고 관련 없는 척 하기에도 묘하다. 바다 괴수들을 다루는 몇몇 단편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소년신문에 실리곤 했던 세계의 불가사의랄지 네스 호의 괴물 이야기 따위를 읽던 기억이 물밀 듯 밀려오기 때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라든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괴수 영화를 볼 때면 딱히 SF팬으로서 각을 잡게 되지는 않더라도 마음 저편에서 남모를 향수를 느끼게 되는데, 호시노의 만화에도 그와 유사한 감흥이 있다. 처음에는 연식이 좀 된 작품이라 그런가 했으나 발표 연도를 살펴보니 그냥 처음부터 그런 전-SF적 소재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확신범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번에 출간된 『블루홀』도 이와 비슷하다. “마의 삼각해역”에 알고 보니 고대의 지구로 이어지는 시공간 이동 통로가 있었고, 사고로 그곳에 들어간 과학자, 군인 집단이 공룡에게 쫓고 쫓기는 모험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하필이면 또 이름이 가이아인데다 하필이면 작중 유일한 아프리카인인 여자가 헐벗은 채로 활이며 창 따위를 만들어 갖고 다니면서 고대 생물들과 교감을 나누고, 탐욕에 눈이 먼 나쁜 과학자와 군인이 먼 옛날의 아름다운 지구를 망치려고 들고… 등등, 지금 써보라고 하면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일단 쪽팔려서 못 쓰겠다 싶은 소재가 한 트럭이다. 그래도 하품이 나오기는커녕 냅다 두 권을 읽어치울 수밖에 없었으니, 이 고리짝 설정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몰입도가 켜켜이 느껴져 그렇다. 〈킹콩〉(King Kong, 1933)이라든가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을 연상시키는 괴수 대격전 및 공룡 모험극의 요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작품의 핵심이 되는 블루홀이라는 아이디어를 이계 진입 통로로 한 번 써먹고 마는 대신 자꾸 그걸로 무언가를 더 해보려고 애쓴 덕분에, 이쪽에서 발견된 사실과 저쪽에서 발견된 사실이 나중에 한 점에서 만나면서 세계관에 지각 변동을 가져올 때 전해지는 SF 특유의 박력이 생겨난다. (설정의 촘촘함에 있어 호시노의 작품이 따라갈 수는 없는 작품이지만) 로버트 J. 소여의 걸작 SF 『멸종』과 궤를 같이 한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뭐야, 『멸종』이 벌써 품절?)

 결과적으로, 호시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하드코어 SF 독자들보다도 (한국 SF 팬 층에서는 어감상의 문제로 기피하고자 하는 표현인) “공상과학”의 구수한 맛까지 포용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더 잘 맞음직한 작품이다. 속편인 『블루월드』 또한 네 권 분량으로 출시가 될 예정이라니, 거기서는 또 이 설정에 뭘 덧붙여서 어디까지 밀고 가 줄지 기대된다. (설마 이제 새로 밝혀낼 점은 없고 그냥 인간들끼리 아귀다툼이나 하는 꼴을 담는 데에 네 권이나 쓰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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