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홀 Blue Hole 1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애니북스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만화 『2001 야화』를 복간했을 때 그 장쾌함에 감탄을 거듭하면서도 이런 내용과 그림체의 만화가 많이 팔려주려나 걱정했건만, 걱정도 잠시, 『2001 야화』의 속편 내지 번외편이라 할 수 있는 『2001+5』가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단편집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도 다시 선보이고, 『블루 홀』까지 출간이 되었다. 이 작가를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작가, SF 작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 쉬워서 SF지 우리나라 SF팬 특유의 고지식한 장르 경계 따지기 버릇에서 충분히 빠져나오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호시노의 작품이 지닌 SF로서의 성격에 대해 한 번쯤 생각을 해보고 싶어진다. 내 경우엔 『2001 야화』를 만났을 때부터 ‘아, 만화라는 매체에서도 이렇게 대담한 SF가 가능하구나’하고 놀랐지만, SF의 “S”를 과학적 엄밀함에서 찾는 독자들에게 호시노의 작품 상당수는 오히려 팬터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설정을 끌고 가서 다른 설정과 맞물리게 하면서 세계의 상황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를 몰고 온다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SF의 방법론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소재 자체는 종종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터무니없거나 오히려 읽는 독자가 민망해질 정도로 고리타분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편집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와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가 그렇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는 그 황당무계하고 과격한 설정들 때문인지 분명 SF의 기풍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무언가 좀 더 옛적의, (골이 빠개지도록 SF의 방법론을 탐구하거나 혹은 묵직한 문학적/철학적/인류학적… 기타 등등 하여간에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있는, “세련된” 작품들 말고,) 마음껏 공상의 날개를 퍼덕이며 돌아다녔던 “공상과학”의 영토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기분이다. (어느 정도는 극화체 작풍과 과격한 생명체 디자인에서 비롯한 느낌인 듯.)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쯤 되면 딱히 SF로서 인지할 필요는 없는 작품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마냥 손 털고 관련 없는 척 하기에도 묘하다. 바다 괴수들을 다루는 몇몇 단편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소년신문에 실리곤 했던 세계의 불가사의랄지 네스 호의 괴물 이야기 따위를 읽던 기억이 물밀 듯 밀려오기 때문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라든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괴수 영화를 볼 때면 딱히 SF팬으로서 각을 잡게 되지는 않더라도 마음 저편에서 남모를 향수를 느끼게 되는데, 호시노의 만화에도 그와 유사한 감흥이 있다. 처음에는 연식이 좀 된 작품이라 그런가 했으나 발표 연도를 살펴보니 그냥 처음부터 그런 전-SF적 소재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확신범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번에 출간된 『블루홀』도 이와 비슷하다. “마의 삼각해역”에 알고 보니 고대의 지구로 이어지는 시공간 이동 통로가 있었고, 사고로 그곳에 들어간 과학자, 군인 집단이 공룡에게 쫓고 쫓기는 모험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하필이면 또 이름이 가이아인데다 하필이면 작중 유일한 아프리카인인 여자가 헐벗은 채로 활이며 창 따위를 만들어 갖고 다니면서 고대 생물들과 교감을 나누고, 탐욕에 눈이 먼 나쁜 과학자와 군인이 먼 옛날의 아름다운 지구를 망치려고 들고… 등등, 지금 써보라고 하면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일단 쪽팔려서 못 쓰겠다 싶은 소재가 한 트럭이다. 그래도 하품이 나오기는커녕 냅다 두 권을 읽어치울 수밖에 없었으니, 이 고리짝 설정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몰입도가 켜켜이 느껴져 그렇다. 〈킹콩〉(King Kong, 1933)이라든가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을 연상시키는 괴수 대격전 및 공룡 모험극의 요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작품의 핵심이 되는 블루홀이라는 아이디어를 이계 진입 통로로 한 번 써먹고 마는 대신 자꾸 그걸로 무언가를 더 해보려고 애쓴 덕분에, 이쪽에서 발견된 사실과 저쪽에서 발견된 사실이 나중에 한 점에서 만나면서 세계관에 지각 변동을 가져올 때 전해지는 SF 특유의 박력이 생겨난다. (설정의 촘촘함에 있어 호시노의 작품이 따라갈 수는 없는 작품이지만) 로버트 J. 소여의 걸작 SF 『멸종』과 궤를 같이 한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뭐야, 『멸종』이 벌써 품절?)

 결과적으로, 호시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하드코어 SF 독자들보다도 (한국 SF 팬 층에서는 어감상의 문제로 기피하고자 하는 표현인) “공상과학”의 구수한 맛까지 포용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더 잘 맞음직한 작품이다. 속편인 『블루월드』 또한 네 권 분량으로 출시가 될 예정이라니, 거기서는 또 이 설정에 뭘 덧붙여서 어디까지 밀고 가 줄지 기대된다. (설마 이제 새로 밝혀낼 점은 없고 그냥 인간들끼리 아귀다툼이나 하는 꼴을 담는 데에 네 권이나 쓰진 않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