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만으로도 수년 동안 보고 싶었던 코넬 울리치의 대표 장편 중 하나. 코넬 울리치는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환상의 여인』이 특히 세계 3대 추리소설 운운하는 명성을 휘날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이 목록에 들어가는 다른 두 작품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을 쓴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처럼 매력적인 탐정을 내세워 트릭을 파해하는 본격 추리스러운 요소에 몰두하기보다는, 기괴하고 음울하며 또한 낭만적인 밤의 분위기와 그 안에서 시간제한을 두고 벌어지는 서스펜스라는 측면이 더 돋보이는 작가이며, 나는 그렇기에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영화계 쪽에서 출발한 "누아르"라는 표현을 다시 소설 쪽으로 이식해 와서 사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의미에서의 "누아르"에 어울리는 소설을 접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잘못하면 영화 쪽의 "누아르"가 지니는 의미조차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울리치의 작품 만큼은 정진정명 "추리소설"보다는 "누아르"가 더 어울린다. 그의 문장이 그려내는 빛과 어두움의 세계는 마치 손가락으로 차가운 허공을 휘저으면 손끝에 어둠이 검댕처럼 묻어날 것만 같고, 꼭 위험천만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불길함이, 추리소설에 필요한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섭리가 배어나온다. 마치 40년대의 발 루튼 공포영화가 그러하듯. (그렇기에 나는 최고의 울리치 영화는 결국 발 루튼이 제작하고 자크 투르네르가 연출한 〈표범 인간〉(The Leopard Man, 1943)이라고 믿는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울리치의 이러한 특성을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다. 퇴근 후 한 잔 걸치러 가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홀로 고즈넉한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형사가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구한 뒤 사정을 듣는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 온 작은 사건이 그녀를 신비롭고 음울한 예언자에게로 인도했으며, 그녀의 가족이 점점 더 그의 예언에 의지하게 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모 월 모 일 모 시에 사자의 아가리 아래에서 죽으리라는 예언이 던져졌음을. 가족은 도망갈 길 없는 숙명의 무게 아래에 스스로 절망하고, 경찰들은 끝까지 이성을 믿으며 예언을 파해하고자 한다.

 그런데 더없이 울리치스러운 이러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남고 만다. 문제는 울리치스러움의 부재가 아니라 울리치스러움의 과잉에 있다. 그는 모든 순간, 모든 사건을 하염없이 멋을 부려가면서 직설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한사코 피한 채로 어떻게든 간접적으로, 독자가 문장 자체를 음미하되 정보는 뒤늦게 깨닫게끔 글을 이어나간다. 혹은 이미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고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제시한 다음 장면을 고속 촬영하듯 하염없이 느리게 끌고 가면서 세부를 끝없이 묘사한다. 1초 짜리 영상 하나로 족할 것을 100만 장의 연속 스냅 사진으로 찍은 다음 각각의 사진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에 대해서 논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것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감미로운 즐거움을 만들어내지만 500페이지가 넘도록 그러고 있노라면 독자부터 지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풀어내는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하염없이 간단하고 어떤 면에서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진부해서, 다 읽고 나면 절로 본전 생각이 난다. '내가 결국 이걸 위해서 500여 페이지를 붙들고 있었단 말인가.' 오해 마시길. 나는 이야기만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독자는 아니다. 또는 어떤 진부한 이야기도 좋은 이야기꾼의 솜씨 하에서는 거듭 읽어도 재미를 잃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에서 초조하게 억눌린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스타일에 공을 들이는 데에 쓰이는 분량과 그러한 스타일을 정당화 해주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에 쓰이는 분량의 비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율이 맞지 않으며, 결국 작품이 폼 잡기만 남고 사실 할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인상마저 남긴다. 심지어 결말의 모호함에서 오는 아이러니나 비극적인 숙명성조차도 실망감 속에 휘발되고 만다.

 더욱 유감스러운 사실. 그렇게 철저히 스타일에 의지해 나가는 작품이라면 번역이라도 좋아야 할 텐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도저히 못 봐줄 만한 최악의 번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울리치의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뻣뻣하다. 처음에는 이걸 좋은 징조로 보았다. 눈 앞의 사건에 다소 거리를 두고 에둘러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 과잉 친절을 베푸는 역자를 만나게 되면 원래 지니고 있었던 뉘앙스의 맛이 다 날아가 버리는 터라 직역 중심의 역자를 만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국어판의 역자는 지나칠 정도로 영어 문장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어서 문장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전에 문장 자체의 거칠거칠한 면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든다. 예가 한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만 지적하자면 대명사의 지나친 활용이다. 마치 원문에서 사용된 모든 대명사를 다 그대로 옮긴 듯 대명사가 많이 나온다. 자신이 관리하던 암사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조련사의 입에서 "그들이 그녀를 쐈어요."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Come on!

 이 정도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비판은 충분한 듯하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덜 준다는 심정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요즘 출판업계의 관행에 비추어 보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겠으나, 편집을 헐렁헐렁하게 해서 한 쪽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많지 않아 책이 하염없이 두꺼워진 가운데 더구나 판형도 좀 큰 편이다. 종이도 그리 얇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고. 크기에 있어 거의 비슷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상』과 비교해 보면 (마침 내 옆의 책장에 꽂혀 있어서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더구나, 이건 다소 개인적인 느낌에 의거한 소리이기는 하지만, 울리치의 작품은 이렇게 두툼하고 커다랗고 육중한 판형으로 나와 한 번 펼 때마다 각잡고 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원래 분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좀 더 부담이 덜한 책을 만들고자 노력할 수는 없었을까?

 이 책에서 그마나 예상 이상으로 좋았던 부분은 책 말미에 수록된 해설인데, 울리치 소설의 정수를 썩 잘 짚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영화 작품을 인용함에 있어서도 실제로 영화를 좀 알고 썼다는 느낌이 들어서 '번역 솜씨와 별개로 꽤 내공은 있는 역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외국의 울리치 연구가가 쓴 글이었음. 어쨌든 그 글은 괜찮았다. 이것이 이 책을 출간하는 데에 하여튼 노력을 기울였을 분들께 그나마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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