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던가. 원치 않는 감투 노릇만큼 괴로운 게 있을까. 무슨 소리냐고? 회의내용 잘 듣지도 않았는데 발표자로 지목된 괴로움을 아는가? 야유회 때 개중 젤 젊다는 이유로 선택의 여지없이 무반주 서태지랩을 불러야 했던 슬픔은? 매달 공과금 까먹기 일순데 단지 남방단추 끝까지 채웠다는 이유로 동기모임 회비 걷는 총무가 되는 건 어떻고? 하자니 성미 안 맞고 안 하자니 욕먹을 것 같은 울며 겨자 먹기 식 감투…그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 그런데…옴머나…고양이도 알더라.

발톱 빠진 대장 고양이
집에 발톱 빠진 고양이 한 놈이 있다. 사람 문에 발가락 껴서 거멓게 죽다가 새로 나려고 빠지듯 빠진 것은 아니고, 처음 데려왔을 때 너무 어린 조카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발톱 제거 수술을 시킨 것이다. 이 수술은 적잖이 시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반대인 편이다. 시술 이유란 게 애들 할퀴거나, 소파 뜯는다는 건데 이건 잘만 교육시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30여분 동안 생 발톱을 잘라내는 시술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로서는 너무 미안해서 뒤꿈치로 발등을 찧도록 후회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죄라고 결국 발톱 빠진 고양이가 된 설탕이. 이것도 모자라 이후 그녀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 친구 만들어 준답시고 동생 고양이 7마리를 줄줄이 들임으로써 설탕이는 어쩌다 최고 연장자가 되어 발톱 빠진 상태로 ‘대빵’이 된 것이다. 대장이라는 권력만 주고 왕 발톱이라는 무기는 안 준 허수아비 노릇이랄까….쩝~


그녀의 딜레마
설탕이는 발톱도 없거니와 성격도 그다지 권위적인 놈이 아니다. 고양이들도 모두 성격이 달라서 나이 들고도 순하게 져주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어려도 절대 지고 못사는 권위의 화신들이 있다. 그녀는 원래 누굴 부릴 생각도 부림을 당할 생각도 없이 유유자적하는 강호 스타일인데 줄줄이 밑으로 부하들이 생긴 것이 그녀의 딜레마였다. 대장 노릇을 하자니 심지가 약하고, 안 하자니 버릇없는 천방지축 어린 것들이 자기 멸치며, 난로 옆자리 등 좋은 것을 염치불구 빼앗는 것이 아닌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 순한 설탕이도 이제는 제법 대장노릇을 한다. 자기가 밥 먹기 전에 누군가 주둥일 대면 예외 없이 고양이 펀치를 ‘퍽퍽’ 날리고, 화장실 청소를 해 주면 제일 먼저 들어가 제일 먼저 ‘찜’을 한다. 나름대로 그녀가 이뤄낸 부단한 자기 트레이닝의 결과에 박수를 ‘짝짝’ 보내고 싶지만 문제는 그녀가 발톱 없는 고양이라는 점. ㅜ.ㅜ. 이것이 진정 그녀의 딜레마인 것이었다.

솜방망이 펀치의 슬픔
고양이들은 높은 자리 올라가기, 밥에 먼저 입대기, 여기저기 자기 냄새 묻히기 정도로 권위를 행사한다. 이 법칙을 어긴 놈은 가차없이 고양이 펀치를 맞게 되는데 그게 비록 코딱지만한 고양이 발이지만 꽤 멀리서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파워 있다. 더구나 버릇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경고를 할 때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그야말로 위엄 ‘짱’이다.
그러나 발톱 없는 설탕이의 헛발질이 무서울 리는 만무. 동생 고양이들은 자기 마음  좋을 때면 대장을 무서워해주고, 기분 나쁘면 그냥 무시하곤 한다. ㅠ.ㅠ   솜방망이 펀치가 ‘팩팩’와도 그냥 ‘뭐가 지나갔나…’ 하는 표정을 지을 뿐. 심지어 어떤 막가파는 으르렁대며 맞공격을 해대 설탕이의 털을 한 웅큼씩 뽑아낸다. 한 밤중 이 소동이 나면 집안은 삽시간에 으르렁 소리로 ‘나이트 사파리’가 되어 버려 버스 몰고 집안이라도 한바퀴 돌고싶은 심정이다. 허울뿐인 대장은 서지 않는 권위에 광분하다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 냄새 묻히기 작전 돌입! -_-+ 오줌을 싸는 것이다.

오줌싸개 대장 고양이
좀 볼품 없지만 오줌이라도 싸서 제 체면이 좀 선다면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벗뜨, 고양이의 배설은 영역표시! 영역싸움은 금싸라기 땅부터 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언제나 좋은 자리 - 높거나  따뜻하고 포근한 자리에만 용변을 보신다. 생각해보라, 집안에서 그런 곳이 과연 어디일지? 발판, 소파, 침대 되겠다. 어떨 땐 내 무릎에 오줌을 싸는 적도 있다.(나를 가구로 보는 걸까, 단순한 소유욕일까?)  세워지지 않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밤낮으로 오줌을 싸대는 우리들의 허수아비 대장 설탕이! 그러나 어쩌랴. 이는 권력만 주고 무기는 주지 않은 이 못난 어미가 져야 할 십자가인 것을.
오늘도 설탕이는 오줌을 싼다. 빨래라도 해서 제 냄새가 지워지기만 하면 기를 쓰고 싼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빨래를 한다. 이불, 침대시트, 방석…가리지 않고 빨래를 한다. 이불 빨래가 하도 잦아 옆집에서 애 키우는 새댁인줄 알거나 말거나, 날 좋으면 놀러 갈 생각 대신 이불 빨래 생각만 드는 아줌마가 되거나 말거나 발톱 빠진 대장 고양이, 설탕이의 권력투쟁을 위해 오늘도 밤낮 없이 빨래를 한다!!
설탕이가 하야하고 노후를 편안히 보낼 그 날까지 나는야 신명나게 빨래를 한다!!


<뚱보를 혼내는 대장고양이 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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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개 책방 2003-12-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때만 해도 설탕이 약발이 먹혔는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