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100쇄 기념판)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주부 사표' 나이가 좀 있으신 독자라면 몇 해 전 방영됐던 광고를 기억하실 것이다. 무슨 핸드크림인지 빈혈약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인 즉 가사에 시달린 주부가 남편에게 '주부 사표'를 내미니까 남편이 따뜻하게 손을 어루만지며 아내의 고단함을 알아준다는 내용이었던 듯 하다.

<돼지책>은 위 광고의 내용을 파스텔톤 삽화와 함께 뚝딱 한 그릇 그려낸 비빔밥이다.
동화라고 내용이 말랑말랑 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기자기 귀여운 그림에 글자는 몇 줄 없지만 웬만한 사회학 논문보다 신랄하고 가슴 섬뜩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에서는 가족의 화해로 주부의 피로가 눈 녹듯 녹지만 현실에서는 어림 반푼어치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이는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아빠는 '중요한' 회사에 나가지만, 엄마는 '밥먹고 집에서 하는 일이 뭐 있다고' '백날 해야 티도 안 나는' 집안 일을 담당하기 때문이랄까.

'중요한' 회사와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에게 '밥달라' '이불 개라' 스스럼 없이 주문을 하고, 엄마는 이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묵묵히 감수해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횡포앞에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수행해 내면서 점점 시들어 가는데, 작가의 내공은 여기서 빛이 난다. 글 한 줄 없이도 빛 바랜 사진 톤의 삽화만 보면 엄마가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어떻게 여성과 자아와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지가 4컷의 그림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엄마는 내 맘과 똑같아 무릎을 칠 것이요, 아이들은 무심코 저지른 행동에 미안함과 엄마에 대한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시사토론이나 대학의 여성학에서나 논의되던 여성의 노동과 가부장적 가정의 문제를 아이들 동화에 용감무쌍하게 도입하고, 또 성공해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백날 '엄마 도와 드려라' '네 이불은 네가 개야지' 잔소리를 해대고 싶다가도 문득 이 동화책을 슬쩍 아이의 책상에 놓아두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보는 만큼 느낀다. 때문에 집에서 매일 엄마와 마주하는 아이들에게 여성의 지위 향상은 인생의 시각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 딱딱하고 오래된 고질병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교할 자 누구였던가. 그 몇 십년 불문의 역사를 돼지책이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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