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권희철 평론가의 긴 해설은 읽지 않은 상태에서 리뷰를 쓴다. 뭐라고 이 책을 평론했을지 궁금하지만 내가 느낀 것 이상의 심오한 해석을 읽고 나면 내 단순한 생각이 너무 초라해질 것 같기에.

 

이 책은 '살인'보다는 '기억'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기억과 망각에 관한 이야기들은 흔한 소재인지도 모른다. 잊어버릴 만하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기억상실증' 은 사람간의 갈등과 상처를 만들기 좋은 소재이므로. 사람의 존재라는 게 굉장히 확실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나를 A라고 알고 있지만 나 빼고 모두가 나를 B로 알고 있다면, 나는 나를 A로 확신할 수가 없게 된다. 기억이라는 게 사실 믿을 만한 게 못된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말해온 바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억을 하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지 않은가?

 

70세 노인 김병수 씨는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왔으나 들키지 않은 연쇄살인범이다. 하지만 치매에 걸림으로써 그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기록을 통해서 잃어가는 기억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지만, 그 기록에 쓰여진 것마저 진짜 기억이 아니라고 부정될 때 그 혼란은 얼마나 클 것인가! 치매라는 병이 정말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치매에 걸리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길 소망해본다. 기억이 점차 잊혀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기억을 진짜로 알고 확신하게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으로 그의 살인은 시작된다. 이후의 살인이 왜 계속 이루어지 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마음이 습기 하나 없는 사막 같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는 표현을 보면 첫 살인으로 인한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심각했는데, 그걸 해소할 방법이 하나도 없었던 듯하다. 어머니와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 아니였을까? 서로 마음을 터놓고 해결방법을 찾기보다는 그 사건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냈을 것 같다. 아버지를 내 가족들과 같이 살해했다는 엄청난 비밀을 품고서 아무렇지 않게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악마고 괴물이지 않았을까? 살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또 다른 살인을 계속 부르는 악순환.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비밀에 계속 자기를 묻는다.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과 허무함도 눈덩이처럼 커지겠지.

 

그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모두가 진실이지만 뒤죽박죽 섞여버려 잘못 끼워진 기억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은 다 맞는 걸까? 마흔이 지나면서 건망증도 늘어나고, 생각한 것과 다른 단어가 나오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나의 두뇌는 늙어가고, 망각이 기억을 점점 덮어가는 중이다. 병수 씨의 기록이 왜곡된 기억의 결과가 들어있었다 할지라도, 나는 기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허구의 소설 안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듯이, 나의 기록 안에도 '진짜 나'가 적게라도 들어 있을 것이기에. 더 많이 회상하고 더 많이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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