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두드리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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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치원 입학을 하기 한 해 전 겨울, 우리 가족은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두 동이 마주보고 있던 작은 맨션에서는 이웃 할머니며 옆집 언니 앞집 오빠 가릴 것 없이 맨션 앞 공터에서 늘 함께 지냈었는데, 새로 지어진 이 큰 아파트는 내게 손바닥만한 복도를 선사했다. 처음에는 입주민이 많지 않아 뛰어놀 친구도 사귀지 못했던 나는 우리 동의 경비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경비 아저씨 옆 자리에 앉아 아파트 입구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고 옛날이야기도 들으며. 그마저도 아저씨가 교대근무로 출근하지 않으신 날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얼마 있지 않아 무료함을 깨트릴 놀이를 찾았다. 하나는, 복도로 소리가 나가는 인터폰 방송. 손님이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누구세요?”를 전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던 인터폰은 나 못지않게 외로워 보였다. 나는 인터폰 송화기를 들고 방송을 시작했다. 노래도 했고 인터뷰도 했다. (물론, 인터뷰라는 건 내가 또 다른 목소리를 내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웃집이 하나둘 이사를 들어오면서 이웃에게 소음공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엄마는 내 방송을 금지시켰다. 애청자가 생기길 바랐던 나는 크게 실망했다.

나는 또 하나의 놀이로 복도에서 소리지르기를 선택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우리 층 복도에 아무도 나와있지 않을 때, 소리를 꺅-지르는 거였다. 목청이 좋아서였는지 바로 앞에 다른 동이 마주보고 있어서였는지 내 소리는 두 동 사이를 가로질러 멀리 퍼지곤 했다. 그런데 이 놀이는 5~6년이 다 되도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만이 아는 비밀같은 이 놀이에 나는 푹 빠졌지만 한편으론 ‘사고가 나서 구해달라고 소리를 지르게 되면 누가 오기는 할까?’하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가 장은진이 보내는 지속 가능한 짝사랑에 대한 일곱 개의 안내서!

 

<빈집을 두드리다>는 내가 살던 그 아파트를 떠오르게 했다.

계단 청소는 잘 되어 있는지 입주민들이 쓰레기 분리수거는 잘 하고 있는지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아줌마(‘나쁜 이웃’)나 아무도 보지 않는 때 돌멩이를 던지는 여자('빈집을 두드리는 이유‘), 한 번도 쓰지 않은 화장지를 허공에서 뿌려대는 사람(’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혹은 아파트 어귀에서 책들을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여자(’나무 인형‘), 예쁜 그림 동화책들을 싣고 아파트로 찾아와주는 아저씨( ’찾아가는 도서관‘), 책의 중요 페이지만을 티나지 않게 찢어가는 사람(’페이지들‘)들이, 때로는 자신만의 꿈(夢)을 찾고 싶어 하며 잠드는 사람(’나는 나를 가둔다‘)들이 우리 아파트 단지를 들락날락 거렸을 것만 같다. 그래, 아파트의 꽉 짜여진 잔잔한 일상에 파란(波瀾)의 일렁임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 분명 살았다. 가만가만히 훔쳐보면서 천천히 다가가 의미있는 사람이 될 때를 노리는, 마음앓이의 소심한 주인공같은 우리가.

 

 

지붕에 앉아 아파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휴지 조각을 바라보던 남자가 기억에 남는다. 무엇 때문에 지붕에 앉아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을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놈으로 말로 쥐어박히면서 그는 뭘 생각할까.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면서도 굳이 지붕에 외떨어진채 지내는 것이 궁금했다. 그러다가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와 발 부분만 하얀 그 고양이를 보면서 남자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을 엿보았다. 고양이의 습성을 가진 그녀, 결혼은 했지만 ‘아내’나 ‘집사람’으로 불리기 싫어한 여자. 그녀 때문에 힘든걸까. 화장지에 립스틱 자국을 남기기도 하고 메모를 남기기도 하는, 십사층의 ‘새로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소설 속의 티슈와 고양이에 넋을 놓고 빠져 소설이 끝나가는 줄도 모를 때쯤, 소설 속의 장치를 부지런히 숨겨둔 작가의 손길을 발견했다. 그의 -누구를 향한? (읽으면서 파악해보세요) -짝사랑 속에서 머리를 콩 쥐어박는 작가의 장난을 발견한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고 궁금해한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그게 증오든 미움이든. 나는 나를 찾는 사람에게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내 페이지를 궁금해하듯 나 또한 그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난 나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장은진 소설집 <빈집을 두드리다> 중 ‘페이지들’ 일부 p.179

‘페이지’ 속의 그처럼, 한 권의 책 안에서 몇장 정도를 찢어도 된다면 나는 <빈집을 두드리다>의 192쪽을 살짝 찢고는, 떠돌이 책장수-그녀가 늘어놓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P가 다가와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기다리곤 할 것이다.

 

 

아파트 복도엔 가끔 비둘기가 놀러오곤 했다. 가끔이라도 꾸준히 찾아와주는 비둘기와 친해지려고 마음먹었다. 먹이가 있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나는 비둘기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몇 권의 어린이 도서를 뒤척이던 나는 드디어 방법을 알아내었다. 어렵지 않다,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면서 먹이를 찾고 있을 때 너무 성급하지 않게 그리고 그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게 다가가면 된다. 내가 하던 동작이나 말, 그것의 리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심조심. 네 평화로움을 깨트리지 않는다는 걸 인식시키면서 천천히. 그렇게 다가가면 비둘기는 푸드닥거리며 요란스레 날아가버리지 않는다. 거리는 그렇게 좁혀가는 것이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무료함을, 빈 마음을, 허전한 눈길을 가진 그들을 나는 짝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속 가능한 짝사랑에 대한 여덟 번째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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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고백
조두진 지음 / 예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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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여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해프닝들이 주된 이야기 줄기인데, 하나의 드라마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시선이 느껴지곤 한다. 이 드라마 안에는 대립되는 사람들 사이의 알력이 심한 편이다. 간혹 서로 ‘다른 입장‘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지, 이래서 맞고 저래서 맞게 해석이 되는 이야기가 불쑥불쑥 나오곤 한다. 쏠쏠한 재미가 툭툭 튀어나온다. 어느 하나 진실이 아닌 것은 없다, 확대/축소 해석되는 ’사실‘만 있을 뿐? 그런 면에서 이 책<진실한 고백>은 그 드라마와 통하는 면이 있다.

  

 

-끼끗한 여자/ 시인의 탄생/ 진실한 고백/ 장인정신/ 이정희 선생님/ 뻐꾸기를 보다

 

이 여섯 개의 단편 소설들은 모두 말 그대로 ‘진실한 고백’이다. 물론 잘 살펴보면 그 고백 안에 있는 것은 ‘진심어린Sincere' 고백이긴 하지만, 결코 ’사실Fact'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백하듯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어 늘어놓는데, 묵은 양심의 먼지와 진실한 반성의 때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

 

 

 

 

“끼끗한 여자” 속의 서현과 희주는 닮았다. 걸 그룹 ‘마녀’로 활동하면서도 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통하는 것은 그 둘만의 비밀로 남아 있다. 그대가 형사라고 해도 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알아낼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침묵을 깨지 않는 한.

 

웃음이 큭큭 미어터지는 블랙 코미디를 읽고 싶다면, “장인정신”을 보라. ‘친구는 그것이 도박판의 특징이라고 했다. 따도 따도 돈이 되지 않는 곳. 그러나 세상의 거래는 다르다고 했다. 잔인한 승부처이고, 개평조차 없는 곳이며 지면 모든 것을 잃는 곳이지만, 따는 한 그 돈이 모두 자신의 돈이며, 오늘 딴 돈은 내일 잃을 돈이 아니며, 영원히 내 주머니에 들어와 앉을 돈이라고 했다. 물론 그만큼 돈을 따기 힘든 곳이며, 노름판처럼 한쪽이 잃으면 다른 쪽이 반드시 따는 게 아니라, 양쪽 모두 잃기만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고 했다.(p.174~175)' 이 말을 듣고 ’성자‘는 세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도박판에 뛰어 든다. 좋은 길목에 좋은 재료에 좋은 식단에, 정성까지 모아 그녀는 칼국수 집을 열기로 마음 먹는다. ’성자‘는 노력했다 오죽하면 왼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하였으랴. (’할머니는 왼손잡이다. 할머니의 칼국수는 맛있다. 고로 나도 왼손에 힘을 더 주면 맛있는 칼국수를 만들 수 있다.(p.181)')

 

그리고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 “진실한 고백”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무기징역 수감자 ‘장세달’의 진실한 자기 고백을 들을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고아원 아이를 괴롭혔던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비겁한 짓을 할 수(p.160)’ 없었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그 사건에 대해 장세달은 늘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고 있다. 과연 그의 범행 동기는 뭐였을까? 얼마나 비겁하지 않은 행동을 보여, 최초의 비겁한 행동을 사죄하려 하였을까?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시로 승화시키는 시인, 정경숙은 ‘나’와 어느 날 조우한다. ‘요즘도 곤충채집을 다니느냐?’며 ‘나’를 알아봐주더니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시를 쓰면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것들이 하나 둘 둥둥 떠오른다는 그녀의 기억력은 완벽에 가까운 걸까?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세상에는 사실이 두 개일 수도 있다, 저장기록에 따라. (“시인의 탄생”)

 

두 서 없이 우리의 뒤통수에 꽂히는 진실한 고백들에 인상이 조금 찌뿌려진들 어떠하리. 이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뻐꾸기를 보다”를 보면서 우린 즐거운 공상에 잠길 수 있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로 시작하던 재미있던 이야기들 역시 진실한(!) 고백들이란 걸 깨닫게 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기분 좋은 일인가. 그 이야기들도 실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해 그렇지 진실이었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진실이건 사실이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흠집을 낸다거나 슬픈 멍울을 남기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기억되는 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때로는 곱게 다듬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좀 더 섬세하게 꾸며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세상 거의 모든 일은, 어느 시선에서 보는 지에 따라 사실이 두 개가 될 수도 있고 세 개가 될 수도 있다. 무슨 일이건 의심하여 봐도 좋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에서 뿌리를 찾아야 하는 이야기들이라면 진실/사실 여부에 연연해하진 말자. 우린 결국 자기변명에 능한, ‘고백’자라는 걸 벗어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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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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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싶어 했던 것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고, 익숙하고 좋아하지만 주변에서 만류하는 것들이 자꾸 내게 들붙는 것만 같던 어느 날, 내 시선의 끝에 작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가 와닿았다. 그 유명한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절 Belle Epoque'을 살았던 여자. 작가였고 댄서와 배우였으며 공쿠르 아카데미 회장이었으며 자신의 장례식이 프랑스 국장으로 치뤄진 여자. 남자들이 지금보다 더 어깨에 힘주고 목소리 높이던 그 시절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여자,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삶과 그녀의 글과 그 사이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그녀의 그 ’무언가‘가 내게도 해결책이 되어줄 것만 같다는 기대로.

 

‘나’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두 번의 결혼을 경험하고 사랑으로부터 지쳤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삶을 살기 위해 프로방스 바닷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집일까?’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소금기 어린 이 푸른 해안, 토마토와 피망을 먹으면서 더없이 행복할 수 있는 이곳은 이중으로 나의 고향이 된다. 얼마나 큰 호사인가! 그것도 모른 채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던가! (p.19)

 

이 한가로운 곳에서 얻은 소박한 행복은 별다른 것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불행한 ‘나’를 연민하며 바라봐 주던 고양이들과 개들, 프로방스의 대자연에 순종하며 우아한 게으름을 즐기는 이웃 사람들의 방문이 전부다. 그리고 그 이웃 중에는 비알, 엘렌 클레망 같은 젊은이들도 있다. 서른 대여섯 쯤의 나이인 비알은 균형잡힌 잘 생긴 얼굴이다. 아니, ‘나’는 잘 모르겠다. ‘이곳에 한 달만 있으면 모든 남자들은 다 멋있고 잘 생겨지니까. 태양의 열기 때문에, 바다 때문에, 그리고 벗은 몸 때문에(p.50)'. 스물 다섯의 클레망은 ’단지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성실(p.62)'한 ‘덩치만 큰 처녀아이(p.93)'이다. 하지만 싫지도 좋지도 않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없고 싶다. ‘나’의 나른하고도 평온한 삶에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푸른 바다가 내 앞에 있는 걸.

“모든 것이 덜 파래.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가......푸른 색은 정신적이거든. 그래서 식욕도, 관능에 대한 욕구도 죽여버려. 푸른 방은 살 만한 곳이 못 되지......”

“언제부터 그렇게 됐죠?”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당신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푸른 방에서 살 수 있을 거야......”(p.74~75)

 

그러나 그런 삶이 조금씩 깨어지게 되었다. 엘렌이 ‘화학적인 청색 위에 아연의 청색을 덧발라, 약간 답답할 정도로 진지하게 그려(p.86)’진 바다 그림을 가지고 나를 방문했던 그 날 때문에. 그녀는 ‘내’게 이상한 부탁을 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 오후에 느꼈던 불쾌감을 생각하니 아직도 기분이 나쁘다. 아직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편함, 나도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 그렇게도 단순한 몇 마디를 어색하고 서툴러 발음하는 것, 이 모든 일들의 이유에 이제야 이름 붙일 수 있다. 그것은 ‘수줍음’이라는 단어이다.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사랑의 행위로부터 멀어진 지금 또 다시 그 ‘수줍음’이란 것과 조우했단 말인가?(p.93)

 

이 소설에는 붉은 색의 향연이 한 가득이다. 붉은 선인장 꽃, 빨갛게 빛나는 제라늄, 붉은 벽, 붉은 속살 드러내 보이는 수박, 익어가는 포도와 검붉은 포도주, 불꽃, 아름다운 갈색 피부. 그리고 붉은 이미지들 덕분에 푸른 색은 더욱 강조된다. ‘마치 분을 칠한 듯 뽀얗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저녁의 푸른빛으로 인해, 장식이 거의 없는 벽은 더욱 붉어 보(p.80)'이는 것처럼 두 색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 같다. 푸른 바다를 그려 온 엘렌과 갈색 피부를 가진 비앙 사이에 놓인 ‘나’의 갈등과도 닮았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불꽃들...... 사랑하는 어머니, 당신의 정원까지 뒤흔들어놓은 화재 때문에 엉망이 된 모란꽃들...... 당신은 숟가락을 손에 들고 테이블에 앉아 느긋이 말했었지요. “고작 지푸라기가 탈 뿐인 걸......”(p.92)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같이 붉은데, ‘나’는 좋아하고 싶은 푸른 색의 것들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간다. 그 붉은 것들은 미운 모양이다. 딸 부부의 초대에 붉은 선인장 꽃이 피는 것을 지켜봐야 하기에 갈 수 없다고 거절하신 엄마에 대한 미움이 ‘붉은 색’을 볼 때마다 이는 게 아닐까.

 

붉은 빛과 푸른 빛 뿐 아니라 모든 빛깔이 모이면 그 빛은 점점 밝아진다. 점점 투명해진다. 그리고 붉은 색과 푸른 색의 경계를 푸는 것은, 동이 터올 무렵의 신비로운 순간에 이루어진다. 딱 새벽 세시쯤, 여명의 시간이다!

새벽 세 시는 들판에서 새벽을 맛보는 사람들을, 새벽이 오는 푸른 창 밑에서 몰래 만남을 약속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만든다. 텅 빈 투명한 하늘, 벌써 찾아온 짐승들의 졸음, 꽃잎을 다시 움츠리게 하는 냉랭한 긴장감, 이런 것들은 열정과 타락을 방해한다.(p.27)

엘렌은 젊은 ‘내’가 되고 ‘나’는 엄마가 되고, 황혼이 여명이 되고, 달의 자리가 다시 해의 자리가 되듯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고 싶은 것은 함께 어우러져 결국 화해한다.

 

책을 다 읽고도 수없이 책을 뒤적거렸다. 그녀의 소설과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는 어디에 숨겨진 걸까. 어느 날, 소설의 끝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렇게 서두르지 말자!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순간의 목마름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를! 창에서 뛰어내린, 아직 정체불명의 이 새벽이라는 친구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변화하는 형태를 완성할 시간이 부족했는지, 그것은 땅에 닿은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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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힘을 보낼게, 반짝 - 여자와 공간, 그리고 인연에 대한 공감 에세이
김효정(밤삼킨별) 지음 / 허밍버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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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시다시피(?) 나는 조금 까칠한 독자에 속한다.

 

너무 예쁜 책은 속 빈 강정 같아서 싫고

너무 유명한 책은 나만의 감흥이 떨어질까봐 싫고

너무 으스대는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아 싫다.

 

 

 

그런 내가 이 책 <당신에게 힘을 보낼게, 반짝>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차와 요리와 사진에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

어떤 책을 선물할까-를 마음에 담고 검색을 시작하던 중에 만난 책.

 

책은 꽤나 예뻤고 나름 유명했고.... 그야말로, 요즘 감각(!)이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친절한(!) 상술에 걸려 - 2013년 달력도 준다는 말에- 홀리 듯이 산 책이다.

까짓거 밑져야 본전이지-하는 마음으로,

이런 '소녀틱한 책' 한 권 소장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하는 마음으로.ㅋ

 

 

 

짜잔~ 책 도착. 11월 29일 목요일.ㅎㅎ

책이 왔다, 밤삼킨별 님이 쓴 책.

그 분이 찍은 사진들로 이뤄진 달력도 왔다.

 

'너무 예쁜 책인데? 이거....은근히..땡겨. 내가 갖는 걸로 할까?'

마음을 30% 정도 뺏겼다.

너무 예쁘고 '요즘 소녀틱'한 이 책에.


함께 온 달력은 2012년 11월분부터 프린팅 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2012년 12월용 사진.

손글씨가 참 예쁜 밤삼킨별 님.


 

늦은 밤.

잠들 기 전의 무료함을 돕겠노라,

이 책 <당신에게 힘을 보낼게, 반짝>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새벽 몇 시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으로 인해 이런 분을 만나게 되었구나. :) '

말 그대로 딱 그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행복했다.

이 책은 이렇고 저렇고 트집잡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 이 언니는 이런 생각을 이렇게 했던 거구나

-나도 그 때 그랬는데. (끄덕끄덕...)

-참 좋은 인연들이 많다, 부럽게.ㅎㅎ

-나도 그 카페 이층에 가보고 싶어.

-아, 저 부엉이....어쩜....>_<

 

마음을 100% 빼앗긴 것이다.

(-_ -줄을 놓았다 싶게, 책 한권에 무장해제 되어 버렸다.)

두근거림과 떨림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뭐랄까-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하는 기분?

 

그리고 아침이 되어, 그 분께 몇몇 오탈자 지적을 핑계삼아 메일을 보냈다.

감사하다고, 기쁘다고, 책이 너무 좋았다고.

 

사실 그 분께 보낸 메일에서도 썼듯이

'어찌보면, '방/공간/카페'로 이어지는... 사람 밤삼킨별 님의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 카페가 만들어지기까지 밤삼킨별 님의 한 결같은 올곧은 생각과 뜻이

즐겁고도 명쾌한 어조로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나는 이 예쁜 책을 속 빈 강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속 빈 강정은 저리가라고!

 

비유컨데, 재료를 직접 가꾸듯 선별하고 속을 가득 채워 맛을 살리고

내어주기 직전의 플레이팅까지 완벽하게 이루어 낸, 완벽한 일품요리* ?!

(질문: 위에서 쓴 '일품요리*'의 뜻은 다음 중에 어떤 뜻을 의미하는 걸까요?ㅋ)

 일품요리: 명사
1 . 각각의 요리마다 값을 매겨 놓고 손님의 주문에 따라 내는 요리.
2 . 가장 맛이 뛰어난 요리.
3 . 주식과 부식 따위의 한 끼 음식을 그릇에 담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요리.
 (출처: 네이버 제공 국어사전)

  

 

 

 

 

 

 

 

 

 

요즘 책 중에는 간혹

'(이것이 정녕)에세이집인지, 사진집인지 구분이 안되는' 책들이 많다.

나 또한 처음에 이 책을 그런 류의 책으로 생각할 뻔 했지만...

이래뵈도 작가 밤삼킨별 님은 잡지 <PAPER>의 필진이시라 그런지

글 속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생동감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귀들은 이 책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다음은 내가 반한 부분들. (책에 인쇄된 상태 그대로를 살려 옮겨 써본다.)

 

 

p.015~016                                                                                           

그렇다. 레이스와 꽃무늬가 가득하고 사랑스럽고 화려한, 그런 어여쁜 소녀 취

향의 방이 아니라 그저 무언가 은밀함을 갖고 싶었다. 혼자 펑펑 울어도 되는 방.

옷을 갈아입다가 깜짝깜짝 놀라지 않아도 될 테고, 남자아이에게 받은 편지를

혼자 오래오래 읽어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 틀어놓은 TV 소리에

섞이지 않은 나만의 독서가 가능할 거라고 기대했다. 나에게 그런 공간이 생긴

다는 것이다.                                                                                    

 

 

p.079                                                                                                  

이제 이 공간은 계절의 생명력과 사람들의 공기를 담으며 그만의 이야기를 시

작할 것이었다. 설령 앞으로 매순간이 모두 행복하지만은 않더라도, 감격스럽

지만은 않더라도, 공사가 끝나 마켓 밤삼킨별과 마주하며 인사하는 그 순간은

오롯한 의미 자체였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p.232~0233                                                                                        

                                                                              내가 가졌을 때보다

상대방이 가졌을 때에 행복하고, 그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닌 상대방

의 것이라는 생각이 그때부터 든 거 같다. 사진이라는 것, 마음이라는 것이 모

두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을 때 더 큰 것임을.                         

 

 

 

책을, 선물하기는 커녕....누가 잠깐 보겠노라 하면

당장 '대출 기록표'를 기록하고 가라고 할 기세.ㅎㅎ

이 책이 참 좋아졌다.


부엉이 소품들이 가득한 카페.

나도 부엉이에 꽂힐 뻔하다가 소품이나 아기자기한 것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접은 일이 있었는데.ㅍ

이 카페에 가면 꼭 부엉이들과 눈싸움을 진득하게 해야지.ㅎㅎㅎㅎ

 

 

 

 

 

 

 

아니....사실 나는.....

작가님께 메일을 쓸 때부터....

이 책을 칭찬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밤삼킨별 님을 응원하고 싶었다.   :)

 

 

이 책은, 책 자체만으로 내게 큰 의미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언니처럼 자신이 바라는 걸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거라고,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아주 작고 소박해보이는 것이라 해도.

결국 그 전체는 한 가지의, 작은 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라고.

 

이 책은 '방'을 갖고 싶었던 한 소녀의 성장 일기 같은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 빛이 마음에 가득차는 걸 느끼게 해 준 책이다. ^-^

 

 

 

(아까 적은....질문의 답은 뭘까요?ㅋ)

 

 

 

블로그 동시 게재 http://ohho02.blog.me/10017286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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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읽고 쓴 "tv속 가상의 인터뷰. 그걸 흘려듣는 나"의 상황. 시작. -----

 

 

 

 

과거를 지운 여자, 그 분과의 인터뷰가 지금 공개됩니다!!

-인터뷰 타이틀 한 번 요란스럽다.

잠시 후,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화면 안엔 활기찬 인상을 가진 빨강머리 여자가

그녀의 에너지를 모두 다 쏟아 내게 주고 싶다는 듯

좀 오버스럽다 싶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인터뷰를 '이끌어' 가고 있다.(진행자의 기(氣)를 넘어선 느낌?)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오, 제게 그 일들을 그대로 얘기하라구요?

농담이시죠?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으실텐데.

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샤를로타 마이바흐예요.

샤를로타라는 화려한 공주풍의 이름에 혹하진 마세요, 그냥 편하게 찰리라 불러요."

 

 

 

(나레이션)

고등학교 졸업 10주년 동창회의 초대장에

변변한 직업, 제대로 된 거주지 하나 올리지 못한 여자.

그녀가 바로 샤를로타 마이바흐다.

로비 윌리엄스의 'Feel'같은 노래가 없었으면 그저 그런 남자와 하룻밤을 보낼 일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영화 <매트릭스> o.s.t.의 'Clubbed to death'를 들으며 하루를 '버틸' 용기를 얻고,

첫사랑 모리츠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재닛 잭슨의 'Again'이 머릿 속에 떠오르곤 하는 여자, 그런 평범한 여자다.

 

물론 낯설고 변변찮은 남자와 꿀꿀한 아침을 맞는 일이 빈번히 있다는 것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남자들을 쫓아내는 아침엔

편한 -하필이면 '헤픈 여자'가 프린트된-티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그녀가 속해있는 유일한 곳 '드링크스&모어'로 길을 나선다는 것만 빼면.

 

 

p.19

그는 늘 오래된 신문을 읽었다.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신문 기사를 읽다가 뭔가에 흥분하다가도,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일이라는 것을 알면 금방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전 드링크스&모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여기 사장이자 제 친구인 팀은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가게를 차렸어요. 팀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가만..저기 저 분 보이시나요? 저기 조금 촌스러운 교수님같이 생기신 분이요, 4주가 지난 일간지를 읽고 계시나 봐요.  게오르크씨세요. 우리 '드링크스&모어'에 딱 어울리는 분이랄까. 팀(사장)과 제가 아웅다웅 서로의 약을 올리느라 한참 기운 빼는 걸 보면서 유일하게 즐기는 분이예요. 저 분이 계산을 하려고 돈을 올려놓으면 번번히 아저씨 손에 다시 돈을 쥐어주는 사람이 바로 팀이구요.......이 가게 하면 팀과 게오르크씨가 떠올라요.(잠시 침묵. 그리고 웃음)

제가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걸 좋아했냐구요? 글쎄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진......생각해보진 않았던 것 같군요"

 

-여자가 갑자기 조심스럽게 말소리를 줄였다.

흘리듯 듣고 있다가 괜시리 힐끗 그녀를 본다.

그 일이 뭔데? 과거를 지우게 된 일?

그래, 말이라도 해줘, 나도 과거 몇 개 좀 잊어보게.

 

 

 

 

(인터뷰 계속)

"어느 날, 헤드헌팅 회사에 갈 일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과거 중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을 지워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하더군요.  처음엔 그 여자가 정신이 나간 사람인 줄 알았어요."

 

p.125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놀이터를 지나다가 벤치에 잠시 앉아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을 지켜봤다. 다시 저런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오늘 날의 지식만 그대로 갖고 있다면.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을 조금 더 잘 듣는다면.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이 열가지 정도는 떠오르더군요.

최악 중에 최악이라 다시 말하고 싶진 않지만...굳이 꼽자면, 10년만에 간 동창회에서 마이크를 쥐고 신나게 술주정을 한 일? 첫사랑 모리츠와 둘만의 비밀로 갖고 싶었던 차고 데이트(?)를 다른 사람에게 들킨 일? 어쩌면 이 일 때문에 동창회에서 저만 그렇게 '멘붕'이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아무튼 정말 깡그리째 날려버리고 싶은 '그것들'이 떠오르자 당장 달려갔어요. '찌질이'로 계속 살고 싶진 않았거든요."

 

 

 

-찰리라는 여자, 잘은 모르지만 의욕이 앞서는 사람같다.

저 여자가 말하는 '그 일'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걸까.

목소리가 지나치게 격양되어 있다. 뭐랄까, 조금은 신나있는 것도 같고.

 

책을 읽어봐야겠다. 저 여자의 들뜬 목소리로는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 것 같으니.

자기 이야기가 어느 책에 있다고 했는데.

아, 여기있구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  이 소설을 읽고 쓴 "tv속 가상의 인터뷰. 그걸 흘려듣는 나"의 상황. 끝 -----

 

 

과연, 과거의 내 기억들을 지우는 걸로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그 때,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섬광처럼 불빛이 '펑'하고 내 눈 앞에서 터지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맨인 블랙>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과의 가억을 지우는 업체가 밤새 의뢰인의 머리에 장치를 연결하고 기계를 작동시키던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떠오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작가 비프케 로렌츠를 얕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토록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즐거운 소설을 만들어냈으니! 분명 '소설'이라는 장르를 가지고도 앞서 말한 영화들보다 더 활기찬 호흡을 보여준 건 작가만의 실력이다.(오죽하면 내가 위에서처럼 '가상 인터뷰'를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간간히 주인공의 심정을 반영하는 노래/음악들 때문에 더 실감나게 읽혀지기도 했다.^^

 

 

찌질한 과거를 지운 찰리-아니, 미스 샤를로타-가 과연 어떤 인생을 새로이 시작할지 얼마든지 궁금해해도 좋다.

결과가 어쨌건 분명 읽는 이에게 주는 느낌(!)은 강렬하니까.

 

p.286

문득 어떤 생각이 분명해졌다. 이 한 가지 사건만을 삭제했다고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모리츠의 집 차고에서 내가 모리츠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책장을 덮고 난 후, 가만히 천장을 본다.

난 이럴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알 이즈 웰*"                            *: 인도 영화 <3 Idiots(2009)>에 등장하는 신나는 곡.

 

-블로그 동시 게재 http://ohho02.blog.me/100157760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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