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두드리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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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치원 입학을 하기 한 해 전 겨울, 우리 가족은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두 동이 마주보고 있던 작은 맨션에서는 이웃 할머니며 옆집 언니 앞집 오빠 가릴 것 없이 맨션 앞 공터에서 늘 함께 지냈었는데, 새로 지어진 이 큰 아파트는 내게 손바닥만한 복도를 선사했다. 처음에는 입주민이 많지 않아 뛰어놀 친구도 사귀지 못했던 나는 우리 동의 경비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경비 아저씨 옆 자리에 앉아 아파트 입구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얘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고 옛날이야기도 들으며. 그마저도 아저씨가 교대근무로 출근하지 않으신 날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얼마 있지 않아 무료함을 깨트릴 놀이를 찾았다. 하나는, 복도로 소리가 나가는 인터폰 방송. 손님이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누구세요?”를 전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던 인터폰은 나 못지않게 외로워 보였다. 나는 인터폰 송화기를 들고 방송을 시작했다. 노래도 했고 인터뷰도 했다. (물론, 인터뷰라는 건 내가 또 다른 목소리를 내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웃집이 하나둘 이사를 들어오면서 이웃에게 소음공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엄마는 내 방송을 금지시켰다. 애청자가 생기길 바랐던 나는 크게 실망했다.

나는 또 하나의 놀이로 복도에서 소리지르기를 선택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우리 층 복도에 아무도 나와있지 않을 때, 소리를 꺅-지르는 거였다. 목청이 좋아서였는지 바로 앞에 다른 동이 마주보고 있어서였는지 내 소리는 두 동 사이를 가로질러 멀리 퍼지곤 했다. 그런데 이 놀이는 5~6년이 다 되도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만이 아는 비밀같은 이 놀이에 나는 푹 빠졌지만 한편으론 ‘사고가 나서 구해달라고 소리를 지르게 되면 누가 오기는 할까?’하는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가 장은진이 보내는 지속 가능한 짝사랑에 대한 일곱 개의 안내서!

 

<빈집을 두드리다>는 내가 살던 그 아파트를 떠오르게 했다.

계단 청소는 잘 되어 있는지 입주민들이 쓰레기 분리수거는 잘 하고 있는지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아줌마(‘나쁜 이웃’)나 아무도 보지 않는 때 돌멩이를 던지는 여자('빈집을 두드리는 이유‘), 한 번도 쓰지 않은 화장지를 허공에서 뿌려대는 사람(’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혹은 아파트 어귀에서 책들을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여자(’나무 인형‘), 예쁜 그림 동화책들을 싣고 아파트로 찾아와주는 아저씨( ’찾아가는 도서관‘), 책의 중요 페이지만을 티나지 않게 찢어가는 사람(’페이지들‘)들이, 때로는 자신만의 꿈(夢)을 찾고 싶어 하며 잠드는 사람(’나는 나를 가둔다‘)들이 우리 아파트 단지를 들락날락 거렸을 것만 같다. 그래, 아파트의 꽉 짜여진 잔잔한 일상에 파란(波瀾)의 일렁임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 분명 살았다. 가만가만히 훔쳐보면서 천천히 다가가 의미있는 사람이 될 때를 노리는, 마음앓이의 소심한 주인공같은 우리가.

 

 

지붕에 앉아 아파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휴지 조각을 바라보던 남자가 기억에 남는다. 무엇 때문에 지붕에 앉아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을까.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놈으로 말로 쥐어박히면서 그는 뭘 생각할까. 부모님과 한 집에 살면서도 굳이 지붕에 외떨어진채 지내는 것이 궁금했다. 그러다가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와 발 부분만 하얀 그 고양이를 보면서 남자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을 엿보았다. 고양이의 습성을 가진 그녀, 결혼은 했지만 ‘아내’나 ‘집사람’으로 불리기 싫어한 여자. 그녀 때문에 힘든걸까. 화장지에 립스틱 자국을 남기기도 하고 메모를 남기기도 하는, 십사층의 ‘새로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소설 속의 티슈와 고양이에 넋을 놓고 빠져 소설이 끝나가는 줄도 모를 때쯤, 소설 속의 장치를 부지런히 숨겨둔 작가의 손길을 발견했다. 그의 -누구를 향한? (읽으면서 파악해보세요) -짝사랑 속에서 머리를 콩 쥐어박는 작가의 장난을 발견한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고 궁금해한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그게 증오든 미움이든. 나는 나를 찾는 사람에게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내 페이지를 궁금해하듯 나 또한 그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난 나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장은진 소설집 <빈집을 두드리다> 중 ‘페이지들’ 일부 p.179

‘페이지’ 속의 그처럼, 한 권의 책 안에서 몇장 정도를 찢어도 된다면 나는 <빈집을 두드리다>의 192쪽을 살짝 찢고는, 떠돌이 책장수-그녀가 늘어놓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P가 다가와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기다리곤 할 것이다.

 

 

아파트 복도엔 가끔 비둘기가 놀러오곤 했다. 가끔이라도 꾸준히 찾아와주는 비둘기와 친해지려고 마음먹었다. 먹이가 있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나는 비둘기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몇 권의 어린이 도서를 뒤척이던 나는 드디어 방법을 알아내었다. 어렵지 않다,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면서 먹이를 찾고 있을 때 너무 성급하지 않게 그리고 그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게 다가가면 된다. 내가 하던 동작이나 말, 그것의 리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심조심. 네 평화로움을 깨트리지 않는다는 걸 인식시키면서 천천히. 그렇게 다가가면 비둘기는 푸드닥거리며 요란스레 날아가버리지 않는다. 거리는 그렇게 좁혀가는 것이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무료함을, 빈 마음을, 허전한 눈길을 가진 그들을 나는 짝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속 가능한 짝사랑에 대한 여덟 번째 이야기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

 

블로그 동시 게재: http://ohho02.blog.me/100173854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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