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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읽고 쓴 "tv속 가상의 인터뷰. 그걸 흘려듣는 나"의 상황. 시작. -----
과거를 지운 여자, 그 분과의 인터뷰가 지금 공개됩니다!!
-인터뷰 타이틀 한 번 요란스럽다.
잠시 후,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화면 안엔 활기찬 인상을 가진 빨강머리 여자가
그녀의 에너지를 모두 다 쏟아 내게 주고 싶다는 듯
좀 오버스럽다 싶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인터뷰를 '이끌어' 가고 있다.(진행자의 기(氣)를 넘어선 느낌?)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오, 제게 그 일들을 그대로 얘기하라구요?
농담이시죠?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으실텐데.
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샤를로타 마이바흐예요.
샤를로타라는 화려한 공주풍의 이름에 혹하진 마세요, 그냥 편하게 찰리라 불러요."
(나레이션)
고등학교 졸업 10주년 동창회의 초대장에
변변한 직업, 제대로 된 거주지 하나 올리지 못한 여자.
그녀가 바로 샤를로타 마이바흐다.
로비 윌리엄스의 'Feel'같은 노래가 없었으면 그저 그런 남자와 하룻밤을 보낼 일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영화 <매트릭스> o.s.t.의 'Clubbed to death'를 들으며 하루를 '버틸' 용기를 얻고,
첫사랑 모리츠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재닛 잭슨의 'Again'이 머릿 속에 떠오르곤 하는 여자, 그런 평범한 여자다.
물론 낯설고 변변찮은 남자와 꿀꿀한 아침을 맞는 일이 빈번히 있다는 것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남자들을 쫓아내는 아침엔
편한 -하필이면 '헤픈 여자'가 프린트된-티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그녀가 속해있는 유일한 곳 '드링크스&모어'로 길을 나선다는 것만 빼면.
p.19
그는 늘 오래된 신문을 읽었다.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신문 기사를 읽다가 뭔가에 흥분하다가도,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일이라는 것을 알면 금방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전 드링크스&모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여기 사장이자 제 친구인 팀은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가게를 차렸어요. 팀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가만..저기 저 분 보이시나요? 저기 조금 촌스러운 교수님같이 생기신 분이요, 4주가 지난 일간지를 읽고 계시나 봐요. 게오르크씨세요. 우리 '드링크스&모어'에 딱 어울리는 분이랄까. 팀(사장)과 제가 아웅다웅 서로의 약을 올리느라 한참 기운 빼는 걸 보면서 유일하게 즐기는 분이예요. 저 분이 계산을 하려고 돈을 올려놓으면 번번히 아저씨 손에 다시 돈을 쥐어주는 사람이 바로 팀이구요.......이 가게 하면 팀과 게오르크씨가 떠올라요.(잠시 침묵. 그리고 웃음)
제가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걸 좋아했냐구요? 글쎄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진......생각해보진 않았던 것 같군요"
-여자가 갑자기 조심스럽게 말소리를 줄였다.
흘리듯 듣고 있다가 괜시리 힐끗 그녀를 본다.
그 일이 뭔데? 과거를 지우게 된 일?
그래, 말이라도 해줘, 나도 과거 몇 개 좀 잊어보게.
(인터뷰 계속)
"어느 날, 헤드헌팅 회사에 갈 일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과거 중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을 지워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하더군요. 처음엔 그 여자가 정신이 나간 사람인 줄 알았어요."
p.125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놀이터를 지나다가 벤치에 잠시 앉아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을 지켜봤다. 다시 저런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오늘 날의 지식만 그대로 갖고 있다면.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을 조금 더 잘 듣는다면.
(샤를로타 마이바흐 인터뷰)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이 열가지 정도는 떠오르더군요.
최악 중에 최악이라 다시 말하고 싶진 않지만...굳이 꼽자면, 10년만에 간 동창회에서 마이크를 쥐고 신나게 술주정을 한 일? 첫사랑 모리츠와 둘만의 비밀로 갖고 싶었던 차고 데이트(?)를 다른 사람에게 들킨 일? 어쩌면 이 일 때문에 동창회에서 저만 그렇게 '멘붕'이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아무튼 정말 깡그리째 날려버리고 싶은 '그것들'이 떠오르자 당장 달려갔어요. '찌질이'로 계속 살고 싶진 않았거든요."
-찰리라는 여자, 잘은 모르지만 의욕이 앞서는 사람같다.
저 여자가 말하는 '그 일'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걸까.
목소리가 지나치게 격양되어 있다. 뭐랄까, 조금은 신나있는 것도 같고.
책을 읽어봐야겠다. 저 여자의 들뜬 목소리로는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 것 같으니.
자기 이야기가 어느 책에 있다고 했는데.
아, 여기있구나.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 이 소설을 읽고 쓴 "tv속 가상의 인터뷰. 그걸 흘려듣는 나"의 상황. 끝 -----
과연, 과거의 내 기억들을 지우는 걸로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그 때,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섬광처럼 불빛이 '펑'하고 내 눈 앞에서 터지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맨인 블랙>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던 사람과의 가억을 지우는 업체가 밤새 의뢰인의 머리에 장치를 연결하고 기계를 작동시키던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화가 떠오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작가 비프케 로렌츠를 얕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토록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즐거운 소설을 만들어냈으니! 분명 '소설'이라는 장르를 가지고도 앞서 말한 영화들보다 더 활기찬 호흡을 보여준 건 작가만의 실력이다.(오죽하면 내가 위에서처럼 '가상 인터뷰'를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물론, 간간히 주인공의 심정을 반영하는 노래/음악들 때문에 더 실감나게 읽혀지기도 했다.^^
찌질한 과거를 지운 찰리-아니, 미스 샤를로타-가 과연 어떤 인생을 새로이 시작할지 얼마든지 궁금해해도 좋다.
결과가 어쨌건 분명 읽는 이에게 주는 느낌(!)은 강렬하니까.
p.286
문득 어떤 생각이 분명해졌다. 이 한 가지 사건만을 삭제했다고 이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모리츠의 집 차고에서 내가 모리츠와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책장을 덮고 난 후, 가만히 천장을 본다.
난 이럴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알 이즈 웰*" *: 인도 영화 <3 Idiots(2009)>에 등장하는 신나는 곡.
-블로그 동시 게재 http://ohho02.blog.me/1001577609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