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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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으로 책을 읽는 것이 옳을까. 

처음부터 어떤 내용이 다뤄진 것인지를 미리 알아내고 시작해야 할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첫 장의 첫 글자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를 읽을 때의 나는 후자에서 시작했다. 

백지 상태, ‘1990년대 후반 영국’이 적힌 페이지로부터 두 페이지를 넘기고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철저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캐시라는 이 여자가 어떤 종류의 간병활동을 하는지,

 그리고 그 경력을 인정받는다는 건 뭘 의미하는지,

 ‘기증자’, ‘회복 과정’, ‘헤일셤 출신’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만

전혀 자세하지 않다. 그냥 그녀의 일상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듣고만 있다.


단어 한둘이 들리지 않는다고

친구의 대화를 끊고 카페를 벅차고 나오진 않는 것 처럼.

하나하나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싫진 않았고 어렵진 않았다.


무얼 이야기하려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18페이지에서야 헤일셤이라는 곳에서의 학창 시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캐시 주변의 또래 아이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그녀의 학교와 기숙사에 핀조명이 흐릿하게 드리워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공동 침실까지 적당히 갖춰진 무대 배경. 

창조적인 활동이 이 학교에서는-적어도 아이들 사이에서는-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고

아이들은 자신의 창조적 활동이 선택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뭘까?)



한참을 읽고 나서야 이 ‘배경’들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캐시의 목소리로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과 

그 장면과 그 순간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 

잘 그려지지 않는 배경 속에 어렴풋한 어떤 학교를 세우고 

캐시의 고백을 들어주는 마음이 되어 둥둥 그 공간을 떠다니는 것이다. 


캐시가 말을 하는 것에 따라 

아이들이 오고가는 복도를... 저 멀리 언덕이 보이는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또 다른 공간에 갔을 때에도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다. 

응, 캐시 넌 그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구나.


사회에 진출하게 된(?) 그들이 

왜 함께 살고 있는 남자나 여자를 ‘선임자’라고 부르는지 

그 부분에서 살짝 갸우뚱하긴 했지만 확연하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저도 모르게 각자의 꿈을 꾸는 것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러워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왜 모두가 그것에 민감한지, 조심스러워야만 하는지. 

잘 모르는 채 편안하게 빠져들었다. 


소소한 것들에 익숙하고 빠져들면서 당시의 캐시의 마음이 되곤 했다. 

그저 평온하게, 가만가만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기묘한 동감은 22장에 되어서야, 분리된다. 

희뿌옇게 날아오른 먼지가 가라앉는 걸 본다.

그제서야 캐시가 나와 달라 보인다. 

캐시가 느꼈을 감정이 

혼돈인지 아픔인지 슬픔인지 안도인지 잘 알 수는 없어도, 

그저... 무언가가 명확해진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하면서 독자로서는 좋은 상황. (그제서야 분리된 건가?)

 




가랑비에 옷 젖는 기분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화법(혹은 캐시의 화법?)에 익숙해진 것 같다. 

어떤 말로 소설을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뭔가 명확하고 확실하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많이 많이 읽은 후에야 내 감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이 작가를 더 알고 싶다는 기분.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느낀 건 뿌연 안개(안개 그 자체)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이번에는 선생님이 노퍼크 사진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기대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지휘봉으로 지도 위를 가리키면서 “그리고 여기가 노퍼크다. 무척 멋진 곳이지.”라고 숙고 끝에 나온 듯한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그런 다음 기억컨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사진을 보여 주는 대신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두지 않은 듯 했다. 이윽고 선생님은 몽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지도를 두드렸다.

“보다시피 이곳은 동쪽, 곧 바다 쪽에 이 산맥이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사람들은 북쪽이나 남쪽으로(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지휘봉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우회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인 셈이다. 동시에 ‘로스트 코너’같은 곳인 셈이지.”(p.98)

 



부연하자면, 이 선임 커플들에 대해 나는 한 가지 사실, 그들을 연구한 루스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취하던 행동 중 많은 부분이 텔레비전 속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수지와 그렉 커플, 코티지에서 가장 고참으로 그곳을 ‘관장’하고 있다고 모두에게서 인정받던 그 커플을 주의깊게 키켜보면서였다. 그렉이 프루스트나 그 밖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면 수지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눈을 굴리며 입술은 요란하게 움직이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게 “신이여, 도우소서.”라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헤일셤에서 텔레비전 시청은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었고 코티지에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본다 해도 막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그런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농가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고 블랙 반에도 또 한 대가 있었다. 나는 이따금 텔레비전을 보았기 때문에 “신이여, 도우소서.”라는 그 대사가 미국 연속극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등장인물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면 청중은 무조건 웃어 대곤 했는데, 수지는 바로 그중 한 등장인물인, 주인공 옆집에 사는 뚱뚱한 여자의 행동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려 할 때마다 그녀는 두 눈을 굴리며 “신이여, 도우소서.”라고 말했고 그러면 청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선임 커플들이 그 외에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여러 가지 행동을 흉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한 몸짓, 소파에 함께 앉는 방식이나 심지어는 말다툼을 벌이다가 휭 하고 방을 나가 버리는 행동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p.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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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polis 2: The Story of a Return (Hardcover) - The Story of a Return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 Pantheon Books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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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대한 리뷰는 따로 적었다. 여기 (http://blog.aladin.co.kr/ohho02/6881952)-

이란을 떠나 본격적인 십대를 지나면서 마르잔은 어떻게 자라나는지 나는 무척 큰 기대를 했다.

그녀를 맡아주기로 한 조조 아줌마가 돈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아 그녀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니 어쩌면 수녀들 속에서 ‘다름’을 올바로 이해받을 수 있다면 마르잔이 멋지게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학교에서 처음 사귀게 된 그룹을 보면서. 별난녀, 펑크, 두 명의 고아, 그리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제3 세계의 소녀라니. 



마르잔은 균형을 잃지 않고 선구자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줄까?

 

요즘 아주 기운이 없는 것 같더라. 이란에서는 잘 나가는 공인 회계사였지만, 독일에서는 그저 터키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우리 나이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정말 힘들어. 전에 유럽 여행했을 때가 생각난다. 이란 여권만 보여줘도, 레드 카펫을 깔 정도였지. 그때 이란은 부자로 통했으니까… 지금은 국적만 보고 짐을 샅샅이 뒤져. 마치 우리가 모두 테러리스트인 양… 우리를 무슨 전염병 환자처럼 취급한다구.(p.53)

마르잔을 찾아온 엄마는 말한다.

이란에서 빛나는 누군가가 외국에 나와서는 힘을 잃은 외국일 뿐이라고. 

한 때는 빛나는 문명으로(석유로?) 인정받고 대접받던 그들이 국적 때문에 홀대받는 것. 

엄마의 말을 듣는 마르잔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녀는 그렇지 않았냐고? 아니, 엄마가 털어놓지 못할 만큼.. 그녀도 많은 걸 겪었다. 


어릴 때 직접 보아온 장면들, 전쟁의 잔혹함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이란인이라서 무식하다는 모욕을 듣기도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마약에 손대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마리화나의 딜러로서 경력을 굳히게 된다.



이런! 그녀의 실망에 비할 수 있겠냐만은 나 역시도 기분이 묘했다. 

내가 기대했던 선구자, 마르잔은 백일몽이었던 것 뿐인가. 

뭐가 문제일까. 그녀를 잡아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까.


그녀는 결국 몇 번의 사랑에 실패하고 지쳐 거리로 나가 버린다. 

거리에 밤의 어둠을 이불삼아 잠들기를 몇 날. 그녀는 병원에서 눈을 뜬다.

나는 우리 가족 중 몇을 앗아간 혁명을 겪었고, 또한 조국과 가족의 품을 떠나게 했던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다. 

… 그런데 하찮은 연애담 때문에 인생을 마감할 뻔했던 것이다. (p.91)

남은 이야기들 속엔 마르잔의 찬란한 이야기가 있을까? 얼마나 그녀는 아름답게 떠오를까.

 



1권과 2권 각각의 역자가 다르다는 것이 뭘 의미할까. (신기하게 느껴졌다.) 

같은 언어라도 소녀의 언어와 성인의 언어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 길이 없다. 해독 불가의 꼬부랑(?) 글씨로 느껴졌으므로.^^;;


선지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소녀 마르잔은 관습적인 것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녀의 순수한 눈길 속에 담긴 이란의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적으로 끊임없이 자라날 수 있게 그녀를 지지해주는, 

무척이나 성숙하고 위엄이 있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계시다. 

반항적인 뜻을 품은 자녀를 가진 완고한 부모가 아니고, 

혁신적인 뜻을 가진 부모에게 사회의 변화에 무딘 자녀가 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나도 한때 -지나치게 반항적인 청소년이었을 때, 그것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어른들의 반응에 얼마나 실망스러웠던지.) 


엄마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권 p.52)'고 말한다. 

할머니는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1권 p.156)'이라 말하며 안아준다. 

마르잔에게 그런 따뜻한 기억조차 없다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두려움이 우리의 양심을 잃어버리게 한(2권 p.148)'다고 한다. 

우리 역시 두려움 때문에 겁쟁이로 변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쟁의 잔혹함도 두려움이고, 낯선 나라에서의 경험들은 모두 두려움일 것이다. 

살기위해 넘어온 나라에서는 이방인, 태어난 나라에는 ’외국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면 우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존재에 대해 어디에서도 날선 눈빛을 보내온다면? 

마르잔이 이란을 떠나기 전 거울을 보며 다짐하던 말-스스로에게 항상 진실하겠다던 다짐이 떠오른다. 

다른 누구도 대신해서 속을 채워줄 수 없듯이 오직 자신만이 해낼 수 있다.

 


이란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신화처럼(?) 이어질 줄 알았다. 

(마르잔이라는 소녀가 선구자로 우뚝 서는 놀라운 신화를?! ㅋ)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의 초점은 ‘이란’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란인 마르잔의 ‘성장기’?! 

투박스러운 그림이지만 작가 마르잔의 삶이 진득히 우러나기에 진실되게 잘 읽힌다. 

낯선 세계의 역사에 다가가는 책이라 생각해도 나쁘진 않지만 

마르잔이 이란을 떠난 1984년 이후부터는 -다소 부족하므로-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 주의!


 

동명의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2007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2007 벤쿠버국제영화제 인기상 수상, 

2008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 노미네이트까지. 

경력이 화려한 이 애니메이션을 구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살아 숨쉬는 마르잔은 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_+)


기대하지 않았지만 몹시 흡족한 작품, 이 만화 특유의 화법에 반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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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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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만화책이다. 만화를 만나기도 전에 만났던 글이 하나같이 새롭고도 낯선 것이었으므로.


‘이란Iran'이라는 말은 ’아이리아나 바에조Ayryana Vaejo'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리안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유목민적인 이 사람들은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조상이었다. 메디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에 처음으로 이란 국가를 세웠다. 그리고 키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기원전 6세기 키로스 대황은 고대의 가장 큰 제국 중 하나가 되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란은 1935년 마지막 샤*의 아버지인 레자 샤갸 국호를 ‘이란’이라고 부르게 하기 전까지 보통 그리스식 명칭인 ‘페르시아’라고 불렸다. (p.4)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의 말대로 이 거대한 문명의 나라는 과거의 명성과는 무관하게 기억되고 있다. 

‘폭력’과 ‘혼란’으로 기억되기 이전에 그곳에는 분명 폭력과는 무관한 다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우린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물음은 검은 베일에 대한 기억을 술회하는, 1권의 첫장면에서부터 강하게 울려진다.





나는 온전히 신의 정의이며 사랑, 그리고 응징이고 싶었다.(p.15)

그녀 여섯 살 때부터 장래희망은 선지자였다. 

매일 밤 하느님과 대화를 했고 자신이 경전을 만들기도 했다, 비록 그 책의 존재는 할머니만 아는 것이었지만.

 

잠재적인 강간의 위험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여성이 의무적으로 베일을 써야 한다고 선포했다.

(TV) 여자의 머리카락은 빛을 내어 남자들을 흥분시킨다. 그게 여자가 베일로 그들의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베일을 쓰지 않는 게 더 문명화된 것이라면,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문명화됐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빠) 말도 안 돼! 놈들은 남자는 다 변태 성도착자로 생각하나 보군!!

(엄마) 당연하죠, 그들이 바로 변태니까!(p.80)

이 얼마나 무서운 강요인가. 이런 이상한 나라에서 마르잔은 여자였고 때문에 베일을 써야 했던 것이다. 

십대의 나이에서부터 남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초의 방어라는 것이 베일이었고 

그걸 거부하는 여성들은 손가락질 받거나 -오해받는 것은 다행이다-위원회애 회부되거나 

되먹지 못한 남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의 엄마는 언어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르잔) 하지만 공정해지자구. 만약 여성이 베일 쓰는 걸 거부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남성들 또한 서구의 상징인 넥타이를 하는 게 금지되어야 해. 그리고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을 흥분시킨다면, 그와 똑같이 남성의 드러난 팔뚝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남성들은 긴팔 옷만 입어야 한다구. 무엇보다도 우선 좀 공평해야겠지.(p.81)

마르잔은 선지자의 자질이 다분한 아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마르잔의 이 말을 들으며 왠지 모를 기대를 하게 되었다. 

고작 열 살 남짓의 나이에 이런 반박을 할 수 있다면 ‘혹시’!



여자애들은 군용 방한모를 만들었지만, 남자애들은 예비병사로서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엄마) 나스린 씨,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네요.

나스린 아줌마는 우리 가정부였다.

(엄마) 말해 보세요. 안 좋은 일이라도…?

(마르잔) 괜찮아요?

(나스린) 아니요, 좋지 않아요. 우리 아들 녀석이… 이게 뭔지 아세요?

(엄마) 금색 칠한 플라스틱 열쇠군요.

(나스린)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이걸 받아 왔지 뭐예요. 전쟁에 나가 운 좋게 죽는다면, 이 열쇠가 천국으로 이끌 거라고 그랬대요.(p.105)

그러나 마르잔은 아직 어렸던 걸까. 

가난한 아이들이 열쇠를 목에 걸고 지뢰밭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를 때, 

마르잔은 파티에 참석할 때 구멍이 송송난 스웨터와 쇠사슬에 징이 박힌 목걸이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펑크록과 어울려서 

기분이 날아오르고 있었을 뿐이다.


전쟁에 어린 아이들을 동원하기 위해 군인은 못할 짓을 한다. 

가난한 동네에서 온 아이들에게 사후의 삶이 ‘디즈닐랜드보다 낫다’고 교육시키고 

끝없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세뇌시키는 것이다. 최면에 걸린 그 아이들은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게 하는 구조. 

조지오웰의 <1984>에서의 세뇌 역시 그런 것 아니었나. 

끝없이 어떤 믿음을 주입하는 것, 자신의 생각을 갖지 못하게 끝없이.


 

1984년.... 이 혁명적 기질이 다분한 소녀는 14세가 되었고 ‘아무 것도 더 이상’ 그녀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p.149)’ 

장신구를 금하려는 교장과 몸싸움을 하기도 하고 

학교의 잘못된 가르침을 듣고는 선생님은 왜 진실을 가르치지 않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 종교적이며 여자에게 지나치게 억압적인 이란에서 딸이 더 위험해질 것을 깨닫고 

오스트리아의 프랑스 학교로 유학을 보내기로 한다.

그녀, 그곳에서 선지자로 자랄 수 있을까?




-2권에 대한 이야기 및 책에 대한 전체 총평은 2권 리뷰에 적도록 하겠다.-


http://blog.aladin.co.kr/ohho02/688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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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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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게 그 둘을 물들였다-『파란색은 따뜻하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때문에 찾게 된 책이다. 

영화 속에서 읽은 블루는 혼돈의 블루, 외로움의 블루(http://ohho02.blog.me/100204940849)였던 것에 비하면 이 책은 파란색을 ‘따뜻하다’라고 인정할 수 있었다. 

작가 쥘리마르가 선택한 푸른색의 미세한 톤tone이 신의 한수였던 걸까? :) 

만화책이라 편안하게 들고 다니면서 읽어야지 했는데 조금 크고 표지가 두꺼워서 놀랐다. 밖에 들고 다니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





클레망틴이라는 고등학생이 나오고 엠마라는 대학생이 나온다. 영화 속의 아델 대신 클레망틴이 나오는 것 빼고 설정들은 거의 같다, 각자 문학을 전공하고 미술을 전공하는 것도 영화와 똑같다. 클레망틴의 학교 친구들, 둘의 만남, 둘의 사랑 모두.


물론 다른 것도 있다. 무엇보다 인물의 설정이 다르고 결말도 다르다. 

클레망틴의 일기장을 통해 둘의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영화에서 ‘직접’ 거론되지 않은 세세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결말은 영화보다 극적이어서(책이 영화보다 극적인 건 뭘까?) 아쉬움도 남는다. 영화와는 다른 하나의 작품으로서 먼저 만났더라면, 새롭고 놀라운 소재를 편안하게 다가오게 만들어준 ‘소녀의 체온’이 묻어나는 책이라고 좋아했을 듯 하다. (소녀의 것이라고 해서 상냥하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난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겠지?^^;)




굳이 영화와 이 작품을 좀 더 비교하자면

하나. 클레망틴과 엠마는 평범하고 지극히 평등한 사이에 놓인 듯 하다. 영화에서는 둘의 계층이 다르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들이 꽤나 등장한다, 엠마의 집, 가족들, 그리고 그 친구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엠마의 일상이 그렇게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 두 사람이 모두 겪는 혼란이 둘을 평등한 상태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클레망틴에게는 자신과 성(性)이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혼란이, 엠마에게는 클렘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연인이 곁에 있다’는 혼란이 있다.

(엠마의 혼란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도 주목해볼 만하다. 모두 둘의 ‘이끌림’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둘이 나누는 사랑이 ‘혼자만의 파란색’이 아니라 ‘함께 하는 파란색’이라는 기분이 드는 이유.


둘, 앞서도 밝혔지만 두 캐릭터의 설정이 다르다. 엠마는 다소 우유부단한 면이 있는 성인의 모습, 클레망틴은 엠마를 만나 용기가 생기는 청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아델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엠마와의 생활을 시작한 것 같았는데 여기서의 클레망틴은 그렇지 않다. 클레망틴이 쓰는 일기를 통해 그 내면을 더 많이 내보여주기 때문에 클레망틴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한 듯.


(자꾸 영화라 비교해서 아쉽긴 하지만 영화 속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엠마는 결단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여자였고 아델이 그 매력에 빠져'들어간' 것 같아 보였다. 엠마가 ‘나의 뮤즈’라고 아델을 다른 사람 앞에서 칭송하는 순간 나는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읭?))





p.85

난 왜 걔에게서 이 모든 걸 원하는 거지? 난 왜 온통 이런 생각뿐이지? 그건 정말 끔찍해!

뭐가 끔찍한데?

난 그러면 안 되는데. 걔는 여자애야. 정말 끔찍하다고.

이봐 클렘, 끔찍한 건 말이야, 석유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인종청소를 해대는 거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끔찍한 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건 나쁜 일이라고 사람들이 네게 가르친다는 거지. 그녀가 너와 같은 성(性)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안그래?

클레망틴이 혼란스러워하던 시기에 친구와 나누는 대화다. 엠마가 클레망틴의 엄마에게 하는 말-‘제가 남자였더라도 클렘은 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요(p.14)’에 견줄만한 멋진 대사!









p.s. 

둘의 사랑이 운명적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초반의 거리씬

영화에서 ‘정말 아름답고 숨막히게’ 표현했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책과 영화를 비교하고 있나봐.(작가 쥘리 마르에게 미안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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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 - 영화심리학자 심영섭의 마음 에세이
심영섭 글.사진 / 페이퍼스토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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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몇 개월 전에 심리학 책을 신통찮아 한 적이 있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심리학 서적을 한 권 집었는데 순전히 영화 얘기가 한 가득 들어있었다. 단편적인 영화 속 장면과 그것은 어떤 증상이라 명명하는(?) 구성, 알고 싶은 이론에 파고들 수 없었기에 책의 평가를 낮게 했다. (책의 겉과 속을 전혀 다르게 분류한 누군가에게 속은 기분이었으므로.) 며칠 전에는 강신주의 저서를 읽었다. 철학이 문학을 안고 있는 형식의 책이었다. 서로 다른 장르가 섞여 있긴 했지만 문학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철학의 입장이 주가 되어 있는 책이었다. 지나치게 흐물거리지 않은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라는 책은 이 둘과 비슷하다. 책이 담고 있는 것이 심리학 같기도 하고 영화 같기도 하다, 아니 감정지침서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분명 다르다, 나를 속였다는 느낌도 주지 않고 지나치게 딱딱한 느낌도 주지 않는다. 영화심리학자가 쓴 ‘마음 에세이’라고 책의 색깔을 제대로 분류 해놓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고 또 때때로 멈추어 놓아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영화를 빌어 쓴, ‘’에 대한 에세이이니까.

 

비교적 최근의 영화 <연애의 온도>나 <건축학개론>에서부터 1946년 작 <멋진 인생>까지 다양한 영화가 실려있다. 영화가 두서없이 실린 건 아니냐고? 그렇다면 나는 분명 지난 번에 읽었던 책처럼 평점을 낮게 매기고 말았겠지. 작가 심영섭이 20년간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인생에 대한 질문들에 맞춰 영화들을 골랐다. 영화와 글이 균형 잡혀 있다. 지극히 인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래서 감히 ‘삶에 대한 에세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영화이자 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잠깐 펼쳐보면, 오필리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도 실려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말-“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버림받음에 의해서, 더 일찍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를 통해 살며시 열쇠를 들어 보인다. ‘아, 그렇지. 이별같은 것 때문에 나도 참 많이 성숙했었는데’하고 마음을 열면서 열쇠를 받아들자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의 일상이 그려진다. (보고 싶었지만 제대로 본 적 없는 영화를 만나 행복한 기분은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이 작품처럼!)


소년 시릴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된다. 빨간 자전거가 버러졌듯 자신 또한 버려졌다는 현실은 시릴을 무너뜨리는 것 같다.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다시 또 넘어지는 시릴,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외면받았던 어린 내가 보이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스산하다. 시릴 마음속에 뚫린 휑한 구멍이 내 것인 양.

이러한 ‘무너짐’의 과정은 버림받은 이들의 가장 고유하고 독특한 심리적 과정이기도 하다. 상실에 대한 슬픔과 저버림과의 차이는 ‘자존감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상실에 대한 슬픔과 저버림과의 차이는 ‘자존감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별의 과정을 거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오히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저버림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폭력이다. 뿌리 깊은 자존감에 일방적인 어퍼컷을 당한 이들은 아픔조차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최승자의 시 <일찍이 나는> 속 버림받은 여자처럼. (p.184)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멈춰있지 말고, 버림받았으므로 저멀리 밀쳐졌으므로 일어나야 한다. 나무에서 떨어진 시릴이 죽은 듯 쓰러져 있다가 전화 벨소리에 거짓말처럼 일어나듯이 책을 읽는 그대(혹은 나)도 그래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철학자는 구명하지만 심리학자는 다독인다, 며칠간 비슷한 구성으로 된 두 책(『강신주의 감정수업』과 심영섭의 『지금 여기 하나뿐인 당신에게』)을 읽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강신주는 강단있게 밝혀내지만 심영섭은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각각의 책이 만족스러운 건 내용도 구성도 각각의 장점이 잘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주는 작가에게 고맙다.

 

 

 






버려져야 선택받는다. 인간은 버려짐을 통해 다시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무쇠처럼 단련한다. 무너짐의 극한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수도, 누군가를 버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난 왜 이렇지?’(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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