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식으로 책을 읽는 것이 옳을까. 

처음부터 어떤 내용이 다뤄진 것인지를 미리 알아내고 시작해야 할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그저 첫 장의 첫 글자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를 읽을 때의 나는 후자에서 시작했다. 

백지 상태, ‘1990년대 후반 영국’이 적힌 페이지로부터 두 페이지를 넘기고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철저히,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캐시라는 이 여자가 어떤 종류의 간병활동을 하는지,

 그리고 그 경력을 인정받는다는 건 뭘 의미하는지,

 ‘기증자’, ‘회복 과정’, ‘헤일셤 출신’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만

전혀 자세하지 않다. 그냥 그녀의 일상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듣고만 있다.


단어 한둘이 들리지 않는다고

친구의 대화를 끊고 카페를 벅차고 나오진 않는 것 처럼.

하나하나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싫진 않았고 어렵진 않았다.


무얼 이야기하려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18페이지에서야 헤일셤이라는 곳에서의 학창 시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캐시 주변의 또래 아이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그녀의 학교와 기숙사에 핀조명이 흐릿하게 드리워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공동 침실까지 적당히 갖춰진 무대 배경. 

창조적인 활동이 이 학교에서는-적어도 아이들 사이에서는-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고

아이들은 자신의 창조적 활동이 선택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뭘까?)



한참을 읽고 나서야 이 ‘배경’들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캐시의 목소리로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과 

그 장면과 그 순간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 

잘 그려지지 않는 배경 속에 어렴풋한 어떤 학교를 세우고 

캐시의 고백을 들어주는 마음이 되어 둥둥 그 공간을 떠다니는 것이다. 


캐시가 말을 하는 것에 따라 

아이들이 오고가는 복도를... 저 멀리 언덕이 보이는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또 다른 공간에 갔을 때에도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다. 

응, 캐시 넌 그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구나.


사회에 진출하게 된(?) 그들이 

왜 함께 살고 있는 남자나 여자를 ‘선임자’라고 부르는지 

그 부분에서 살짝 갸우뚱하긴 했지만 확연하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고, 

저도 모르게 각자의 꿈을 꾸는 것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러워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왜 모두가 그것에 민감한지, 조심스러워야만 하는지. 

잘 모르는 채 편안하게 빠져들었다. 


소소한 것들에 익숙하고 빠져들면서 당시의 캐시의 마음이 되곤 했다. 

그저 평온하게, 가만가만히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기묘한 동감은 22장에 되어서야, 분리된다. 

희뿌옇게 날아오른 먼지가 가라앉는 걸 본다.

그제서야 캐시가 나와 달라 보인다. 

캐시가 느꼈을 감정이 

혼돈인지 아픔인지 슬픔인지 안도인지 잘 알 수는 없어도, 

그저... 무언가가 명확해진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하면서 독자로서는 좋은 상황. (그제서야 분리된 건가?)

 




가랑비에 옷 젖는 기분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화법(혹은 캐시의 화법?)에 익숙해진 것 같다. 

어떤 말로 소설을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뭔가 명확하고 확실하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많이 많이 읽은 후에야 내 감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이 작가를 더 알고 싶다는 기분.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느낀 건 뿌연 안개(안개 그 자체)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이번에는 선생님이 노퍼크 사진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기대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지휘봉으로 지도 위를 가리키면서 “그리고 여기가 노퍼크다. 무척 멋진 곳이지.”라고 숙고 끝에 나온 듯한 한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그런 다음 기억컨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사진을 보여 주는 대신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두지 않은 듯 했다. 이윽고 선생님은 몽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지도를 두드렸다.

“보다시피 이곳은 동쪽, 곧 바다 쪽에 이 산맥이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사람들은 북쪽이나 남쪽으로(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지휘봉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우회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인 셈이다. 동시에 ‘로스트 코너’같은 곳인 셈이지.”(p.98)

 



부연하자면, 이 선임 커플들에 대해 나는 한 가지 사실, 그들을 연구한 루스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취하던 행동 중 많은 부분이 텔레비전 속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수지와 그렉 커플, 코티지에서 가장 고참으로 그곳을 ‘관장’하고 있다고 모두에게서 인정받던 그 커플을 주의깊게 키켜보면서였다. 그렉이 프루스트나 그 밖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면 수지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눈을 굴리며 입술은 요란하게 움직이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게 “신이여, 도우소서.”라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헤일셤에서 텔레비전 시청은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었고 코티지에서도 그러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본다 해도 막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그런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농가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고 블랙 반에도 또 한 대가 있었다. 나는 이따금 텔레비전을 보았기 때문에 “신이여, 도우소서.”라는 그 대사가 미국 연속극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등장인물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면 청중은 무조건 웃어 대곤 했는데, 수지는 바로 그중 한 등장인물인, 주인공 옆집에 사는 뚱뚱한 여자의 행동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 여자의 남편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려 할 때마다 그녀는 두 눈을 굴리며 “신이여, 도우소서.”라고 말했고 그러면 청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선임 커플들이 그 외에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여러 가지 행동을 흉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한 몸짓, 소파에 함께 앉는 방식이나 심지어는 말다툼을 벌이다가 휭 하고 방을 나가 버리는 행동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p.170~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