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천운영이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잘 견디는 텍스트라면, 조경란은 정신분석학적 해독을 기다리는 텍스트다. 한강이 적극적으로 무의식을 열어놓는 작가라면, 조경란은 철저하게 무의식을 의식하는 작가다. 프로이트가 "잠시 자네 꿈을 들려주게나, 그러면 내가 자네 마음이 어떠한지 말해 줌세." 라고 한 파프E. R. Pfaff의 말을 인용한다면, 조경란은 "그대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나에게 말해다오. 그러면 내가 그대의 이름을 말해주리라."라는 바슐라르의 말에 기댄다.

조경란의 『혀』는 우리에게 익숙한 광기를 보여준다. 그녀가 '혀' 위에 세운 감각의 제국과 서구 요리의 향연은 이미 '세련된 쾌락'을 모토로 하는 웰빙 잡지에서 심심치 않게 본 것들일 뿐 아니라, 감각의 사치를 동물적 본능과 착종시키며 철학 담론화 하는 『혀』의 화법은 각종 요리 잡지 혹은 신문들의 주말특집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게다가 감각의 향연이 엽기적인 수준으로까지 치달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애인의 혀로 만든 고기, 즉 인육을 먹이는 장면도 동생의 아들 셋을 죽여서 고기 요리로 만들어 동생에게 먹였다는 아트레우스의 이야기가 담긴 오레스테스 신화에서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6년만의 신작에서 이처럼 반전조차 익숙한 광기의 서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말로 자기가 먹은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기나긴 6년을 외롭게 보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욕망하는 자아'였다. 욕망을 억제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며, 뜨거운 욕망에의 추구를 찬양하던 작가의식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 판단행위는 나에게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선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어떤 대상에게 강렬하게 끌렸다는 것,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그것을 꿀꺽 삼켜버리고 싶다는 본능을 일깨워주었다." (66면)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틀림없이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거면 됐다." (261면)

 

작가에게, 그리고 주인공 '나'(지원)에게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잘못된 대상일지라도 헛된 구애행동'을 멈추지 못하는'(191면), "충성심"(71면)과도 거리가 먼, 이토록 그로테스크(하려고 노력했던)한 이별 풍경에 대해 쉽게 내릴 수 있는 진단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식의 상식적인 도덕과 풍문에 기댄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구차할 정도로 떠난 애인에게 집착하는 '나'가 정말로 되찾고 싶었던 것은 변심한 애인의 마음이 아니라, 정신없이 사랑하고 미워했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잃어버려야만 했던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이별은 '어린아이한테서 장난감을 빼앗'(194면)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끝내 타자이기를 거부하고 뼛속까지 주체가 되고 싶어하는 '나'가 되기를 상상하거나, 혹은 자기라고 인식하는 동물이 '가리비'나 '엘크', 혹은 석쇠에 구워지며 날카롭고 단단한 칼에 찔리는 '즙이 말라버린 상한 굴'(180면)과 같은 것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가리비'는 '점점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179면)는 동물이며, '엘크'는 '다리에 마디나 무릎이 없어서 잘 때도 눕지 못하고 충격으로 한번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동물, 아무런 의심 없이 몸을 기대고 있던 나무가 갑자기 쓰러져버리면 힘없이 함께 쿵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248~249면) 동물이다. 엘리엇이 그 자신을 '집게발'에 비유함으로써 능동성과 생명성을 추구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조경란의 비유는 그 대척점에 있다. 그녀가 이처럼 수동적이고 유약한 동물들을 꿈꾸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인식을 행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수세에 몰린 자아를 설정함으로써 '순결하고' '욕심 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한 방어적 포즈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햄릿을 자처하는 '나'의 고질병이 있다. 문제는 '집착'이 아니라 '가장된 욕망'이다.

따라서 감각에 충실한 것이 곧 본능이라고 믿는 그녀에게는, 사실 감각도 위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흥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내 후각과 미각 촉각 시각 청각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65면)이라고 그녀가 말하듯, 그녀가 정말 무기로 삼고 싶은 것은 필요에 따라, 혹은 "진짜 사랑인가 아닌가? 당신은 날 사랑하는가 아닌가?"(66면)라는 거짓 질문에 따라 '호출된 감각'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문제다.'


"내가 달라진 게 사실이라면 요리에 대한 내 생각과 도마 위에 놓인 내 손가락들을 더 차갑고 냉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부엌과 달리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192면)


'나'는 한번도 '그'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 집착의 대상이자 빼앗긴 장난감에 대해서는 애당초 그녀의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버려졌다는 느낌"(37면) 혹은 "어쩐 일인지 내가 졌다는 느낌"(219면)과 같은 패배의식만이 그녀를 지배했을 뿐이며,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녀의 슬픔 역시 오직 그녀 자신만의 것이다. 연못을 만든다며 흙에 물을 붓는 행위를 그만 두었을 때,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그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그건 미묘하고도 개인적인 느낌"(187면)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슬픔에 대해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오직 "그게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점"(84면)이다. 그녀가 진정한 슬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그'의 감정 따위는 '죄책감'으로 치부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슬픔을 치료하는 방법이 오직 "일부러 구두를 뒤집어보지 않는다면 바닥에 진주가 붙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디자인"(213면)된 구두를 신음으로써 느끼는 자기만족일 뿐인 것은 당연하다. 이토록 자기완결적인 세계를 꿈꾸는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통제할 수 있는/없는 것들'이다. 세계를 그녀의 두 손으로 요리하고 통제하고 싶을 뿐인 유아기적 욕망을 그녀는,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인간의 본능으로 왜곡한다.

따라서 "추구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욕망이 있다는 것일 거다. 이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싶은 것, 욕망을 갖고 기다리는 시간은 틀림없이 신비로운 시간이 될 거야."(170면)라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녀에게 현명한 어른 지젝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초자아가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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