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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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상(斷想)

성정(性情)은 쉬이 버리지 못한다고, 지탄받을 걸 알면서도 다 떼고 말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이 작품은. ‘단편 하나, 시 한 줄 써본 적 없는 아줌마’, ‘표면장력의 끝’ 운운하는 감동적인 수상소감 등...... 숱한 문청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고자 하)는 수사들 뒤에 숨겨져 있는 작가의 “내심(內心)”만을 문제 삼고 싶다. 수사(修辭)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든 것은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심’이란, 그야말로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어서, 무언가를 ‘통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견고하게 봉해진 판도라의 상자같은 이 작가의 책을 가만히 앞에 두고, 내용물을 궁금해 하던 차에 여기저기 기웃거려 본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작가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적혀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아버지의 가르침을 새겨 말을 먼저 하여 실수하기보다는 속으로 삼켜 문자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 성석제


다언삭궁(多言數窮)의 한자사전식 풀이 :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한 처지에 빠짐.

그러니, 그 입 다물라.....(입 다물고 꽃같이 어여쁘고 조용하게 있음 더 좋고...)

그리고, 그 입 다물고 있음에 대한 중증 노이로제....


내가 함부로 서투른 서평을 쓰려는 것을 알아챈 듯, 이 작가는 내 입을 막는다. 당황한 나는 실어증 환자처럼 버벅거린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말하지 말라는 이 작가의 말이,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아니 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 믿게 할 환원론적 접근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게 이 작가의 작품을 읽는 한 가지 방식일까.

작가는 ‘이해와 오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쓴다고 했다. 꽃에도 앞뒤가 있듯, 뒤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진실성을 인식하라고. 바꿔 말하면,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오해’만이 가능하다면, 그 낙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말’은 필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말하기’ 방식만이 가능한가.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라고 천양희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김진규가 ‘다시’ ‘말했다’. 말없는 이 작가로서는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침묵은 금(金)이자 금(禁) - 과묵함과 실어증 사이

예로부터, 우리는 ‘말없이 통할 수 있는’ 그 고요하면서도 쿨한 인간관계를 열망해왔다. ‘불립문자(不立文字)’, 혹은 ‘염화미소’라 하여 부처님의 말씀은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 하였고, 가장 친한 친구는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상대의 심정을 알 수 있다하여 ‘지음(知音)’이라 불렀다. 자고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도 알아듣는 것이 군자이자 선비의 ‘도(道)’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때는 이런 광고 카피까지 유행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참으로 위험천만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말없이 간담상조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임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취향과 철학, 그리고 수준까지를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지성”을 찾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그것은 상대 역시 위의 항목에 대한 내공을 적어도 ‘나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적 자기인식이 결여된 ‘지음(知音)’찾기의 작업에서 ‘나’는 ‘함부로 말해질 수 없는’ 대상으로 승격된다. 문제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진정한 동반자의 ‘부재(不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하지 않음’이라는 말하기 방식에 있는 것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나에게 남편이 진저리를 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내심을 어떻게든 다 표현하고 살았던 친정어머니의 가벼움을 닮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나는 내 입을 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29면)


“가벼운 게 지천이었다. 한줄기 바람에도 부양이 가능하리만치 몸이 가벼운 아버지가 그 중심이었다. 아버지의 가벼움을 누구보다 독하게 비웃는 어머니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10면)


묘연의 유일한 무기는 ‘침묵’이다. 원래는 ‘역심을 품은 신하’로 보일 정도로 ‘반항심을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반골기질을 지니고 있지만, 그녀는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침묵이 그들로부터 그녀 자신을 구분하고, 보존하며,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묘연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치 한 묶음처럼 ‘가벼운’ 존재들로 동일화하여 치부할 수 있는 것은, 말 많고 경박한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침묵하는 자아’의 숭고한 무게 때문이다. 그녀에게 천박한 그들과 말을 섞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들은 말로써 스스로의 ‘방정맞음’과 ‘퇴폐성’을 드러내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이다.

침묵하는 주체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내밀한 사정이 숨겨져 있음을 호소하는 무언(無言)의 천명(天命)이다. 그 입이 열리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내 안에는 형언(形言)할 수조차 없는 ’진실‘이 숨겨져 있었어.’ 일 것이다. 때문에 침묵하는 주체는 폭력적이다. 오직 그 자신만이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는 ‘진짜’ 진실을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의(秘意)’적 존재로 드높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엔 이면이 있다. 못의 하나인 광두정은 대가리가 둥글고 넓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의 뾰족함이 덜한 것은 아니다. 연근은 단단하다. 미끄러진 칼날에 깊게 다친 큰형수의 기다란 손가락을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속은 빈 구멍투성이다. 나는 겉으로는 아버지 율관 박경열과 어머니 홍씨의 다섯째 아들 여문이다. 하지만 내 속엔 향이밖에 없다.” (76~77면)


또한 말없는 자는 다 아는 자다. 묘연은 “희우는 내 속을 몰라도 나는 아들의 속이 다 보였다.“(67면)고 말한다. 상서로운 침묵의 고요한 ‘아우라’가 그 ‘앎’을 확신하게 한다. 그런데 그 상서롭고 숭고한 기운(氣)이자 아우라는 동시에 ‘환상’이기도 해서, 뜻하지 않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묘연과 희우가 나누는 혼담을 듣는 난이의 경우를 보자. 모자(母子)의 대화가 "오라버니와 내가 오누이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사자들끼리의 최면"(181면)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이는 "연기를 뱉지 않는 싸리불처럼 그렇게 속으로, 속으로" 자신을 태웠다. 이렇게 빚어진 난이와 희우의 비극이 어땠는지는 그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침묵은, 금(金)이면서 금(線)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금(禁)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말없이 삭히는 사람들은 멋있고 기품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의 인물군이 최상류층 영의정부터 중인인 역관까지 포진되어 있는데도 모두 한 사람처럼 ‘선비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곡되고 오염된 말들 속에서 입을 다물기는 차라리 쉽다. 난세(亂世)일수록 성인들은 산에 들어가 속세의 언어를 멀리하며 살았다. 그러나 말을 끊는다고, 욕망까지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력된 것은 반드시 출력될’ 수밖에 없듯이, 그 욕망은 다른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배설되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들은 말해지지 않은 자기의 욕망을 알아달라고 하루 종일 칭얼댄다.


“찾지 못하게 꽁꽁 숨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서 찾아주기를 원하는, 그래서 찾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실망스러운, 하여 괜스레 심통이 나버리는 내 심리가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숨기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나를 찾아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에 마땅한 자리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깊이 숨어들기도, 그렇다고 대충 숨기도 뭣해 안절부절못하다가 불명예스럽게 걸리느니 차라리 술래가 되는 게 속 편했다.” (222면)


결국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진실성을 보장받고자 했던 『달을 먹다』의 인물들의 말하기 방식은 유감스럽게도 ‘운명적으로’ 실패한다. 속화된 언어에 묻히기가 두려워 입을 닫은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형식에 내재된 근원적인 소통의 열망까지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침묵(沈黙)은 ‘가라앉는 어둠’이라서 늪처럼 깊고 멀어질 뿐, 이해와 오해의 간격을 좁히기에는 오히려 역부족이다. 다언삭궁의 세계에서 그들은 단지 과묵한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고, 말해지고 싶지만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실어증 환자들이다. 

 

3.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개별적 진실’의 세계

과묵한 자신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의 소유자로서 인식하는 경우는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이 ‘함께 나눌 수 없는’, ‘상대적인’ 진실을 ‘개별적 진실’이라고 불렀다. 일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어법을 개발한 것은 분명 김훈의 빛나는 성과이다. 그런데 김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살핌으로써 김진규의 작품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훈 비판에 쓰여진 “개별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개별적 진실을 맹목화하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성질의 문제다.”(고명철,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 『칼날 위에 서다』, 실천문학사, 2005, 82면.), 혹은 “‘의문문’을 만들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김훈이 삶에 덧씌우는 운명의 굴레다.”(조효원,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 『세계일보』2008년 1월 1일.)라는 문장들은 김진규의 『달을 먹다』작품론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침묵은 겉으로 표현될 수 없는 ‘내면’에서 오고, 그 ‘내면’은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숭고한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진짜 ‘진실’과의 숨바꼭질을 제안하지만, 실제로 이 작가가 하고 있는 것은, ‘말없이 초연하고 쿨한’ 자신의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고귀한 아우라에 대한 끝 모를 도취이다. 이 작가는 진실은 ‘개별적’이라는 것만을 강조할 뿐, 그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차별성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진실은 상대적, 개별적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오직 ‘나’ 만이 ’진실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편적인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정신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개별적 진실의 맹목화는 곧, 내면의 맹목화이다. 그 ‘개별적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내면의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타인의 내면에 대해서는 오해를 하거나 거짓말을 하기 쉽다. 이 작품에서 개별성이 ‘자기중심성’으로 환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별적 진실은 ‘일회적 진실’에 불과하게 되는데, 이것도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진규, 그녀가 만든 고풍스런 세상은 말없고 멋진 외경(畏敬)의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천박하고 가벼운 자들로 꽉 찬 세상만큼이나 위험하고 비극적이다. 이해와 오해의 간격은 여전하고, 소통 가능성 역시 요원하다. 그래서 이 작가는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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