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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퀴즈쇼’가 청춘의 은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맥락에서다. 퀴즈의 두 가지 메카니즘, ‘질문’과 ‘편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말했듯, 질문자는 권력자다. 백과사전에서 ‘질문’의 의미를 검색하면, 으레, ‘질문의 화살을 던지다’ 라는 공세(攻勢)적인 용례가 열람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질문이 권력이 되는 것은, 인터뷰에서 그러하듯 퀴즈쇼에서도 마찬가지다. 질문하는 사람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며, 그러기에 주눅 들지 않는다. 김영하의 『퀴즈쇼』에서 당장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좁은 고시원에 앉아 유일한 창인 빌게이츠의 창을 통해 퀴즈를 출제하는 이민수의 옹색함은 오로지 그가 출제하는 퀴즈를 통해서만 은폐될 수 있다. 퀴즈는 그에게, 낮은 곳에 처해 있어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방안을 스윽 둘러보며 퀴즈거리를 찾는 출제자의 모습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조물주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즈쇼가 한낱 ‘쇼’로 취급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퀴즈쇼의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쇼’를 위해 던져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수가 참가했던 휘황찬란한 퀴즈쇼의 쇼비지니스적 세팅이 그러했듯, 퀴즈는 ‘보이기’ 위한 것이고 ‘드러냄’을 위한 것이다. 퀴즈의 탄생부터가 그러하다.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서적을 통독하는(절대 정독이 아닌) 출제자들의 독서편력을 보자. 퀴즈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잡학다식’이다. 특정 분야에서 탁월하게 전문적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루저‘라는 선고를 받은 이민수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지식에 대한 편력과 강박으로부터 비롯된다. 비블리오매니아적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원 아버지의 서재는, 한편으로 그러한 서재를 구상하고 상상하는 이민수의 머릿속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허영과 편력의 욕망은 ’계급‘보다 더 중요하며, 더 본질적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서적과, 잡지 코스모스 등을 탐독한 후, 블로그에 후기를 몇 줄 끄적이는 이십대들은 똑똑하기 이전에 멋져 보인다. 연구자의 인생을 살고 싶진 않지만, 베스티즈와 매일경제를 아우르는 ‘교양인’이 되고 싶어하는 건 미드를 즐겨보는 대한민국 이천년대 청년들이 학습한 ‘로망’이다. 독서 편력과 지적 허영은 ‘헛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스스로 상상하는 그들 자신의 모습이 되기 위한 지난하면서도 필수적인 도정이다.
그러므로 퀴즈쇼는 ‘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생존의 장(場)이 되는 순간, 청춘들은 그것을 견디고 싶지 않다. 회사의 ‘전사(戰士)’로서 ‘게임’에 임하는 이민수가 겪는 불안과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유희’가 아닌 삶의 무게이자 고통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청춘, 그것은 답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무차별적인 질문공세가 이어지는 오랜 물음의 시기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퀴즈쇼에서와 달리, 인생은 반문(反問)의 여지를 허용한다. 스포트라이트와 부저만이 무기로 주어지는 퀴즈쇼에서와 달리, ‘쇼’가 아닌 ‘실전’에서 청춘들은 ‘반문’이라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반문한다는 건 하나의 전략이다. 물음에 답할 시간도 벌 수 있고, 잘 이용하면, 질문을 뒤집어 오히려 전세를 수세에서 공세로 역전시킬 수도 있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반문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보타주’니까.
첨언(添言)
그런데, 김영하가 도대체 왜 이십대를 ‘위해’ 그들에게 ‘바치는’ 이 소설을 썼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질문이라면, 퀴즈방에서 출제자는 누군가를 ‘위해’ 문제를 내지 않는다.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지적 편력의 정도를 확인해 보고, 약간의 쾌감이 주어진다면 그 뿐이다. 퀴즈쇼를 가능케 하는 본질적인 욕망은 자기만족이 아니던가.
다시 말하면 김영하는, ‘자신’의 이십대를 위해 썼고, 나아가 이십대를 반추하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자신의 ‘지금’을 위해 썼다. 게다가 원래 20대는 김영하식의 ‘첨단의 감각’으로만 살지 않는다!!
끝까지 솔직해지기를 거부하는 이 작가의 ‘쿨한’ 필치와 유머는, 어떤 면에서 여전히 ‘위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