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4
제인 프리드먼 지음, 박혜경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페미니즘을 자체의 고유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즘 연구에서 제출된 다양한 논쟁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페미니즘‘들’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어떠한 이론의 개괄서가 해당 이론의 다양한 분파가 지닌 기본적 특성과 각각의 차이들을 소개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등 페미니즘의 분류와 범주화 작업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의 미덕은 페미니즘이 맞닥뜨린 여성과 관련된 쟁점에 대한 각기 다른 분석들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동질적일 수 없는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이라는 집단 주체의 상정이라는 페미니즘의 가장 근본적인 기제를 질문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는 점이다.

  저자가 제시한 페미니즘적 쟁점들을 통어하는 문제틀, 그러니까 그것들을 ‘쟁점’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바로 ‘평등’과 ‘차이’의 대립이라는 문제이다. 섹스와 젠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 그리고 흑인 페미니즘 등의 쟁점에 대해 제출된 상이한 분석들은 모두 ‘평등’과 ‘차이’에 대해 행해진 각기 다른 성찰의 결과들로 보여진다. 이미 여성과 남성 간의 위계화의 기율로 작동했던 ‘성차’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이 여러 갈래의 페미니스트들을 탄생시키는 한 가지 계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인종과 연령, 계급과 성적 지향 등을 달리하는 ‘차이’들은 분석 도구로서 ‘여성들’이라는 범주의 의미와 유용성에 대해 다시 새롭게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 책은 저자 스스로,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했듯이 논의 대상이 서구 페미니즘의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소책자라는 분량으로 다양한 이론과 문제를 소화하려다보니 저자의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등의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과 ‘차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근본적인 고민을 직접 설정함으로써 ‘보편적인’ 페미니즘의 상을 제시하기보다는 고정화되기를 거부하는 페미니즘의 기투와 그 진정성을 보여주었다는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1장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섹스와 젠더 간의 구분과 관계에 대한 것이다. 생물학적인 섹스와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라는 이분구도는 섹스를 자연화된 것으로 고착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해체의 필요성이 제기된다(43~45면). 또한 ‘성차’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 역시 남성과 여성이 같다는 주장과 서로 다르다는 주장,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하는 입장과, ‘차이’를 최대화함으로써 그 서로 다른 점 각각에 상이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는 입장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조안 스콧은 이런 식의 이원적 대립은 “남녀의 차이들이 시간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다양한 사회 속에서 인식되고 재현되는 방식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3~55면).

  2장에서는 ‘공식적 정치’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현실에 대한 페미니즘적 대응,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다룬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모두 전제로 삼고 있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이다. 페미니즘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주의 계약이론은 가부장적 권리에 기초하여 시민적 자유를 남성적 속성으로 규정했으며, 공화주의의 민주주의 개념 역시 성차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 즉 ‘차이’를 새로운 민주적 평등에 통합시킴으로써 남녀 간의 진정한 평등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생활이 공적인 요소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방식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에 남성적 논리에 의해 견고화된 공사 분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특히 권력이 공식적 정치 제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명료해지면서, ‘공적 가부장제’라는 남성 지배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공식적 정치 영역으로 진입해야만 한다는 깨달음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73면).

  3장은 세계경제라는 상황에서 야기되는 여성과 고용의 문제를 다룬다. 이와 관련하여 페미니즘 분석이 제시한 질문은 두 가지이다. “왜 노동시장은 젠더화 된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는가? 그리고 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평균적으로 훨씬 적게 버는가?”(92면)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공모’에 기인한다. 이처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관한 이중체계 분석은 양자의 두 영역, 즉 가정 밖의 세계와 가정을 분리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이중체계론은 여성억압에 대한 단 하나의 설명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하에 제기된 것이다. 그 밖에 여성의 가정 내 부불노동과 그것을 보상해야 할 주체(국가 혹은 개인 남성)에 대한 논쟁 역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며, 동시에 여성의 노동을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편 다국적 기업의 배치가 중시되는 세계경제의 도래 속에 제3세계 여성은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식민화’의 과정을, 선진화된 국가들의 여성은 제3세계 여성들의 착취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일차적 소비자로 동원되는 ‘가정주부화’라는 또 다른 착취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착취구조는 국제적 여성 연대의 기초를 와해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성별 노동 분업이 세계의 여성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장에서는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 포르노그라피와 강간 등 섹슈얼리티와 권력의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쟁점들을 논한다.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성들의 통제 결여는 여성에 대한 남성지배의 일부이다.”(112면)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논쟁은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재정의하고 변화시킬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페미니즘적 분석에 따르면 ‘강간 체계’는 여성들로 하여금 두려움 때문에 남성에게 종속되도록 하는데, 강간은 순간적인 통제의 상실이 아니라, 남성의 공격과 가부장제, 즉 우리 사회가 구성한 남성성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간 강간에 관한 분석이 인종에 둔감했다는 비판은 중요한데, 이는 인종주의와 연루된 성차별주의로부터 발생한 다른 형태의 지배와 통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한다.

  한편, 생물학적 분업에 강박되어 있던 여성 해방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기술을 통한 재생산’의 문제 역시 중요하다. 재생산과 모성을 여성들이 벗어던져야 할 짐으로 보는 입장에서 ‘재생산 기술’은 성차가 제거된 사회라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모성을 지지하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재생산을 억압의 영역으로 만든 것은 그 기술에 대한 남성의 통제라고 주장한다. ‘재생산 기술’은 과학을 통해 여성들의 몸에 대한 더 큰 통제권을 가지려는 남성들의 수단으로 복무할 수 있으며, 자녀에 대한 여성들의 권력과 주장을 감소시킬 수 있다. 또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구분을 본질화 할 위험이 상존한다. 따라서 기술이 사용되는 차별적 상황을 탐구하고 여성들이 출산 통제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스탠워스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5장에서는 민족과 젠더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이한 페미니즘‘들’의 발생을 통해 페미니즘의 본질주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주의가 성차별주의보다 덜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는 유럽중심적인 백인 페미니즘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백인 여성들의 억압에 초점을 맞춘 여성 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자매애라는 말로” “경험의 동질성”을 강요한다. (예컨대, 백인 페미니스트들에게 억압의 장소로 여겨지는 가족은, 흑인 여성들에게는 인종주의 억압에 대한 강한 저항의 장소일 수 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서로 다른 경험과 상황을 은폐하는 거짓된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이 인종주의적 사회구조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페미니즘을 서구의 창조물로 구성하는 인식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페미니즘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 국가들에 끼친 영향에 대한 논의 등에서 보듯 제3세계 페미니즘 운동은 자율성과 특수성을 지닌다.

  이처럼 민족과 젠더의 딜레마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페미니즘은 ‘특권화 된 소수가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제 하에 지속된 ‘본질주의’를 종식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예컨대, ‘여성들’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사용 여부 등) 이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성과 남성성이 고정되거나 지각 가능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며, 특정한 성질이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과정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여성들 간의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페미니스트들이 집단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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