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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평점 :
“결혼할까 말까? 한다면 누구랑 하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혼에 대해 가지는 미혼남녀의 질문은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결혼은 왜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하는 걸까?”라는 질문은 빠져 있기 십상인데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이유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온 탓일 것이다. 나부터 결혼이라는 제도의 발생에 대해 의문이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음을 시인해야겠다. 이 책은 결혼 제도의 발생부터 오늘날까지의 변천을 살펴본 후, 위의 두 가지 질문이 가지는 중요성과 거기에 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결혼을 논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주제는 ‘사랑’과 ‘성’이다. 이 책은 특히 ‘성’을 비중있게 다룬다. 가장 먼저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 그리고 각 가족의 형태가 원시적인 성윤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고,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한 초기 개신교와 카톨릭교의 왜곡된 성윤리를 바탕으로 한 결혼 제도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종교와 금욕주의의 억압으로 생겨난 ‘낭만적 사랑’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왜곡된 기대와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며 낭만적인 결혼관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러셀은 성매매와 성행위, 성교육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다룬다. “성을 주제로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질책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절대로 성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들에게 그 주제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난을 퍼붓는다.(p254)”라고 언급한 대로 1929년에 출간한 이 책은 러셀의 노벨문학상 수상(1950년)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당시 금기시되던 도발적인 성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1940년 뉴욕시립대 임용이 취소되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자녀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의학적 사실을 품위 있는 문체로 설명하며 소책자를 집필한 메리 웨어 데넷 부인이 음란 문서를 보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니(p88),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성에 대한 가치관이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도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놀랄 정도였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다고 해도 자녀의 성교육 문제를 놓고 보면 아직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성에 관련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질문 앞에서, 사춘기 자녀의 호기심 앞에서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성교육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여 당황하거나 둘러대거나 덮어두고 꾸지람을 하는가. 러셀은 특히 자녀의 성교육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녀들이 성에 대한 자신의 본능과 무의식적 충동으로 인해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은 금기하고 감추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바르게 인식하고 다루어야 할 대상임을 충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가 악의와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과학이 발달하면 더더욱 무서운 재앙이 빚어질 것이다. 따라서 악의와 증오를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진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악의와 증오는 대부분 그릇된 성윤리와 부적절한 성교육에서 야기된 것이다. 미래의 문명을 위해서는 새롭고 충실한 성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성윤리를 개혁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p236)
포괄적인 성윤리는 성을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로, 또한 위험이 탄생할 수 있는 원천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도 중요하긴 하지만, 성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요소들과 결부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으뜸가는 요소는 낭만적인 사랑과 행복한 결혼, 그리고 예술, 이렇게 세 가지이다.(p260)
사랑과 결혼은 원시인들의 본능이 아니다. 잘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 책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인 사랑이 단순히 개인 간의 감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두 남녀가 만난 결혼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근간을 지탱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동시에 “인생이 제공하는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인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볼 여지를 남겨준다. 이 책을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의 부모님도 이 책을 읽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신 앞으로 아이들이 커가는 동안 사춘기를 겪고, 누군가를 사귀고,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