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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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작가들과 다른 행보를 보여주는 장강명 작가의 글쓰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건 분명 이야기의 힘이다. 그의 힘찬 발걸음을 따라 가다 보면 한국 문학의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도 그러한 발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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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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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국이 싫다. 이 책이 싫어하는 방식과 내가 싫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책을 읽었다. 호주에도 낯선 행복이란 없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불행과 호주에서의 낯선 불행만 있을 뿐. 어디를 가더라도 불행은 피할 수 없다. 다만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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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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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에 관해 다룬 많은 소설 중 좀 더 잘 쓴 하나쯤으로 짐작했다. 심사평을 읽고도 큰 기대는 안 했다. 얇은 분량에 얼만큼 담아낼까 싶어서. 책을 읽고는 이기호 작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내게 놀랐다. 소설, 또는 작가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앞으로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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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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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게 베인 자국이 만드는 검은 어둠과 원색적인 노랑 바탕의 책의 표지에서부터 경계심이 들었다. 노랑과 검정으로 대비되는 배치는 컬러의 기능 중 ‘주의와 경고’라는 표지(標識)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무엇을 경고하고 있고, 나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들어 읽었다.


바늘,이 생각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늘을 잃어버린 상황이 기억난다. 다른 이들도 한번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단추를 달거나 솔기가 틑어진 부분을 꼬매겠다고 바쁜 중에 짬을 내서 정신없이 바느질을 하다가 한순간 바늘의 행방을 놓친 경험. 사라진 바늘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스스한 기분. 이 느낌은 바늘을 찾을 때까지 서서히 증폭된다. 이제 바늘은 바늘이 아니다. 항상 같은 자리에 두고 사용하기 전에는 존재감이 없던 바늘이 내 통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사라지면, 언제 어디서 나타나 나를 깊숙히 찌를지도 모른다는 환상과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된다. 환상과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오히려 칼이라면 대놓고 두려움을 나타내고 경계를 하고 도망가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된다. 그러나 작은 바늘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조심성과 불안을 지닌 채 일상 속에서 위험이 도사리는 공존이 가능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늘이 내 마음을 떠돌았다. 칼에 의한 난도질이라기보다는 작은 바늘이 쑤욱 찔러들어오는 느낌. 일상에서 난도질이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악몽의 느낌이라면 바늘에 찔리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깨어있는 느낌이다. 칼이 아닌, 작은 바늘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소설 속 환상을 환상에 그치게 하지 않고 현실의 메타포로 읽어내게 만들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직접적인 나의 일과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읽어내진 않았지만, 허구이면서 남의 일과 남의 경험으로 읽어내더라도 이미 충분히 공감 가능한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불편함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반발하는 마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길 바라지만 거리두기가 불가능해서 나를 포함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차가운 인식, 그리고 기시감 때문이다. 


이 책은 조각난 현실에 환상을 덧대어 여덟 개의 단편으로 꿰맨 책이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처럼 신화적, 동화적 모티프들이 현실의 곳곳에 신랄하고 잔혹하게 덩굴손을 뻗어있다. ‘식우’에 녹아내린 건 피부 뿐만 아니라 위선과 치부이며,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뼈와 속살 뿐만 아니라 추악한 인간의 본심이다. 어느 날, 반지하방의 거실 겸 부엌에 웅크리고 있는 정체모를 흑색 장모의 아름드리 생물인 ‘이물’은 자기자신의 공포가 타자화되고 형상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이처럼 환상을 덧대어 꿰맸다고 현실이 가려지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욱 극명히 드러나게 꿰맨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꿰매던 바늘은 책 속에 남겨졌다. 책을 읽는 동안 바늘은 ‘이물’처럼 지극히 조용한 침입자가 되어 마음 한켠에 들어와 섬뜩함과 위협의 감정을 안겨 준다. 바늘을 찾아서 찔리지 않게 간수하는 건 이제 독자의 몫이다.       


책의 표지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며칠 전 신문에 ‘“난 이렇게 잘 살고 있다”…’인증’하는 사회’’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SNS에 행복한 자신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인증 문화가 일상이 되었다는 기사다. 많은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가고, 새로 산 상품을 리뷰하고, 여행지를 갔다온 사진을 올린다. 인증샷을 올리는 이유는 자기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은근 과시하기 위한 허영이 기저에 깔려있다. 모두 죄다 행복한 모습만 올리니 자신만 불행한 것 같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우울증을 느끼는 사회가 되었다. 행복한 척 하기 위해 불행은 쉬쉬할 수 밖에 없다. 책의 표지색인 노랑은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행복처럼 화사하고 밝다. 노랑을 가르는 검정은 불행을 쉬쉬하는 듯 가늘고 얇지만 노랑 바탕에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검정의 어둠은 함몰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보인다. 보여지는 행복 가운데 불거져 나온 불행은 존재감이 너무나 두드러진다. 불행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제 책의 표지는 불행의 표지(標識)로 보인다. ‘관통’에서 미온은 검고 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검은 구멍 안은 어떤 곳일까.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하이가 사라진 곳과 같지 않을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하이는 필시 지금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오는 중이고 그것은 자기의 머릿속에서 흔들리다 주름이 진 의미 불명의 세상이 구체화된 어떤 곳일 테며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아닌, 세상 안이면서 동시에 세상 밖이리라고.(p42)

혹은, 노랑이 최소한의 온기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베어진 검은 구멍은 고무마개가 뽑힌 영혼의 배수구와 같은 지도 모르겠다. 

유성과 점성과 최소한의 온기로 이루어진 세계가 감은 두 눈 안에 착시의 잔상처럼 펼쳐졌다가 곧 흔들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형태는 기묘했으나 따뜻했고 세상이라는 산포도 안에 찍힌 그 어떤 점보다도 합리적이며 생성과 소멸의 시기를 잘 아는 세계였는데, 그것이 다 녹고 나자 가슴 어딘가를 막고 있던 고무마개가 뽑혀 나가면서 온몸이 영혼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심장이 소용돌이쳤다. 하이가 가끔,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의 풍경은 어떠했는지 나는 궁금했다.(p45)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세상 안인가, 세상 밖인가. 아니면 세상 안이면서 동시에 세상 밖인가, 세상 안도 세상 밖도 아닌가. 삶은 불가해하다. 진실은 모호하다. 삶의 불가해와 진실의 모호함 사이에서 환상이 배태된다. 구병모의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났고, 환상을 차용하지만 현실에게 빚지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하게 값을 지불했고, 읽는 이에게도 대가를 요구한다. 읽는 이는 마음을 내어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이더라도.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당신은 바늘은 찾았는지. 책을 읽는 동안 나처럼 몹시도 불편했고 이곳저곳 찔려서 상처투성이가 되었는지. 그랬다면 함께 바늘을 부러뜨려 버리자고 말하고 싶다. 다시는 마음속에서 돌아다니지 않게.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나만이 아니라 누구도 아니기를 바라는 선의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바늘로 검은 구멍을 꿰매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멍이 더 커지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구멍으로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게. 꿰매는 솜씨는 서툴지만 그렇게라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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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7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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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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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이 말했듯이, 문학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경험으로 바꿔서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생생한 느낌과 경험이야말로 내가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공감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 ('작가란 무엇인가2'의 역자 후기 중) 


나는 역사책이나 지식인의 책을 통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나치 정권과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정권 지배 하에서 살아 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도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러하다. 나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아직은 운 좋은 세대이고, 우리나라 독재정권 당시도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격동의 시대를 알지 못한 채 지나갔다. 그래서 내게는(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경험으로 바꿔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문학이 필요하고,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필요하다. 이 책은 나치 정권 하에 산다는 게 무엇인지 , 제2차 세계대전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는지 등장 인물들을 통해서 아는 것을 넘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는 나치 정권의 피의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독일 소년 베르너와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인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를 두 축으로 진행된다. (번역서를 두 권으로 분권한 것에 대해 유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있긴 하지만, 나는 이 책만큼은 분권이 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주된 서술자이자 비중을 차지하는 소년 소녀를 각각의 표지로  삼은 것이 원서의 표지보다 책의 분위기에 너무나 잘 어울려서 책을 읽기 전부터 마음에 와닿았고, 게다가 분권은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주 절묘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소설의 목차는 연도별로 구성되나 순차적이지 않고 시간을 넘나든다. 내용들은 주어진 연도 안에서 제목들을 달고 짧게 진행된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들이 교차하면서 스타카토처럼 짧고 빠르게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신기한 건 전혀 정신 사납거나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페이지마다 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이 머리속에서 저절로 잘 이어졌다. 이게 바로 퓰리처상과 카네기 메달상을 동시에 받을 만한 작가의 능력인가 싶을 정도로. 처음 읽을 때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 구조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읽을 때는 비로소 놓친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빛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문장들. 죄다 옮겨 쓰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그러면 서평이 아니라  필사 수준이 될테니까. (옮겨 쓰는 건 내 노트북엔 이미 다 했음.) 

이야기의 구조와 빛나는 문장들 못지않게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소재다. ‘불꽃의 바다’라 명명한 보석과 라디오. 두 가지 소재가 얼마나 이 소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적절하게 제공하는지 이야기를 직조하는 작가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 예정이라고 들었다. 얼마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가 될 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게 고민한 것은 소설의 제목이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주파수’였다. 주파수는 소리의 전파에 관한 개념으로 자주 언급하지만, 빛의 진동수를 나타내거나 측정하는 단위로써 주파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란 주파수를 나타내는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고 베르너와 마리로르를 이어주는 라디오 방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떠오른 것은 살아 남아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다.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희망을 언제나 빛으로 인식한다. 절망을 어둠으로 인식하듯. 전쟁과 나치 치하에서도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빛이 나중에는 전쟁의 종식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게 만든다. 지금도 지구의 한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나고, 기아와 재해가 일어나지만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으로 삶은 회복하고 지속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희망의 주파수라고 이해했다. 이 책이 내게 희망의 주파수를 보내었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수신했다. 감동적으로. 


얼마 전에 읽었던 [황금방울새]의 서평을 쓸 때, 퓰리처상 수상작과 나의 기호가 맞지 않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금방울새]에 이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연달아 읽고 나니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다. 올여름은 두 책으로 인해 최고의 여름으로 기억할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 퓰리처상 수상작이 기대된다.



밑줄 그은 곳이 무진장 많지만, 하나만 올려봅니다.

p181
헛소리, 무시무시한 헛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곧장 도관을 뚫고 들어온다. 흡사 솜으로 꽉 찬 자루에 손을 뻗었다가 그 속에서 면도날을 발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한결같고 정도를 지키고 있는 줄 알다가, 너무도 예리해 살을 갈라도 미처 느낄 수 없는 어떤 위험한 것과 맞닥뜨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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