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서 계단을 오를 때면 가방이나 손으로 엉덩이 부근을 가린다. 행여 속옷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요즘이야 짧은 속바지를 입어서 괜찮지만 그래도 ‘왠지’ 가려야할 것 같다. 왠지 가려야할 이유에 대해선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가리는 행위의 근저에는 ‘내가 짧은 치마를 입었지만, 그렇게 헤프게 속옷을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야.’란 생각이 깔려있다. 그렇게 불편하고, 귀찮으면 안 입으면 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짧은 치마를 입고, 치맛자락을 팔랑거리거나 조금쯤은 섹시해 보이는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걸 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불편한 점을 감수하는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가리는건 여자 맘인데, 지나친 배려라거나 불쾌한 친절로 보인다고 하는건 약과다. 자신을 잠재적 치한으로 몰았다고 억울해하니 말이다. 가리는걸 왜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기 위한 행위로 연결하는걸까? 여자들이 그렇게 오지랖은 아닐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내 옷 내가 가리고, 내 몸 내가 안 보여준다는건데. 입는 것도 내 맘, 보여주는 것도 가리는 것도 다 내 맘인걸.

  예를 들어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움직이면서 건든다고 가정을 해보자. 뭐지, 하고 뒤돌아볼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일. 하지만 여기에 성별이 개입되면 다르게 해석된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자한테 오해받고 있다고, 치한으로 몰렸다고 지레짐작 겁을 먹는다. 불편한 기분이 든다고, 아무 짓도 안 한 선량한 자신을 오해했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가해 망상 뺨친다.

  얼마 전 G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똥꼬치마’-지금은 삭제되었다.-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누가 볼 것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데, 여자들이 계단을 오르며 자기를 흘끗 쳐다보는게 불쾌하다 등등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었다. 정말 남자들은 그렇게 느낄까?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무엇을 입든 여자 맘이지만 속옷이 보일 때는 눈이 갈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걔중 평소에 기분이 나쁜걸 생리하는 것 같아 등등으로 표현해 내게 질문 공격을 당한 Ch는, 만약에 여자가 봤냐고 추궁하면 안 봤다고 우길거라고 얼굴이 벌개지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출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난 정말 궁금했다. 내 속옷, 내가 가리는거야를 넘어서 그토록 은밀하고 완고한 입장은 뭘지.

나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약간 불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고 내가 예뻐보여서 좋다.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와중에도 내 체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비난거리가 말풍선 모양으로 내 주위를 떠돈다. 신경쓰며 위축되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보다 좋은건 무시하기다. 무시면 간단하지만, 어찌나 견고한 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 재단하는지.

 가끔씩은 그저, 내 몸이고, 그 사람의 입장이고, 그 사람의 취향일 뿐이니까 너 하던대로 그냥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09년 아치 페이퍼

 

 캐치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언젠가 쓴 것 같아서 찾아보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요즘처럼 여성혐오가 본격적이기 전에 쓴 글인데 요즘 읽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금은 편한 바지, 편한 바지만 찾는데 그땐 그랬구나. 짧은 치마 입고 섹시한 느낌을 좋아했구나. 섹시한 느낌은 내 느낌인걸까, 누군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걸까. 지금은 생각이 복잡한데 글이 단조롭다면 예전엔 생각은 단순했지만 글은 촘촘했달까. 이게 다 출산의 영향인걸까.

 

 제시카 발렌티의 성적 대상을 읽고 있는데 번역 문제인지 작가가 은유적으로 글을 써선지 잘 읽히지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큰 코를 혐오했다고 한다. 작가에게 큰 코가 있었다면 나는 큰 엉덩이가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정말 엉덩이가 크다고 인식을 했을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아치는 엉덩이가 커서 아기를 잘 낳겠네'라고 했던가. 그때 나는 중학생인가 그랬을 땐데 다른 때 같으면 촌철살인? 같은 말을 곧잘 내뱉어서 발화 당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하게 윗도리를 내려 엉덩이를 가렸다.

 

 세상에나,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어른의 정신 상태는 대체 어떤걸까. 게다가 내가 아기를 낳을지 엉덩이로 이름을 쓸지 지가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나는 어렸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라 '아, 내 엉덩이가 정말 크구나.'라고 수긍하고 말았다. 얼마동안 엉덩이를 숨기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엉덩이 좌절감은 다른 신체부위? 칭찬으로 상쇄하다 유야무야 없어졌다.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내 몸을 미워하고 내 존재를 부정했던 경험, 여자들은 한번씩 있지 않을까. 오십이 다 된 언니들도 살을 빼고 피부를 좋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걸 보면 끊임없는 성적대상으로 본인 스스로를 자리매김한건 아닐까. 남자 꼬마들의 바지 앞섶을 보며 장차 섹시한 남자가 되겠네라던가의 훈수를 두지 않을걸 보면 말이다. 남자는 그냥 인간인데 여성은 대상화 된다.

 

 작가는 본인이 겪은걸 되물림 하기 싫어 간절하게 아들을 바랐다고 하는데 나는 딸을 바랐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충분히 걱정되고 염려됐지만 그럼에도 딸이었으면 했다. 내가 여자로 살면서 느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때때로 비참하지만 나 자신의 인식론적 자산이 되는 것처럼 내 딸 역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 딸이 성적 위험과 자존감의 위협을 최대한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페미니즘을 확장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자책할 정도로 창피함을 느끼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기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 다음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의 슬픈 역사라고 회한을 섞어 말하는 대신 같이 싸우며 성장할 것이다. 반성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하는거지 네가 하는게 아니라고, 스스로 자책감을 갖거나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널 사랑한다고, 꼭 얘기해줄거다.

 

 간만에 고양됐네.

페이퍼 재활용까지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