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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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유석의 에세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지당한 말을 풀어놓았는데 색다르거나 깊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무려 소설인데 (소설인가? 옴니버스형 단편소설?, 책소개에는 법정 활극이라고 되어있던데) 재미있다. 대립하는 입장을 천천히 들여다본 후 전형적이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편견과 상식의 그 어디쯤에서 줄타기를 한다. 등장인물은 마냥 히어로는 아니고 현실에 단단하게 발 붙이며 통통 튀거나 묵직하게 걷는 스타일이다. 주인공은 이상적인 답으로 돌진해서 쾌감을 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며 결정을 유보한다. 직업인으로서 판사가 최선을 다하는게 무엇인지 질문한다.

 

 미스 함무라비의 주인공은 여성인데 막강하다. 현실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하면서 배반하는 캐릭터, 박차오름 판사 이야기는 그야말로 흥미 돋는다. 정의롭고 씩씩한데다 PC한 인물이라니. 물론 박차오름의 정치적 올바름은 현실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 이슈에 화이팅 하지만 문화지체 현상을 겪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버겁다. 다수가 현실(누구에 의해 규정된) 적응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박차오름 판사가 겪는 고민은 깊어간다. 상대적으로 임바른 판사의 캐릭터가 약한데 관찰자 시점으로 일정 부분 상쇄한다.

 

 활극 중 한 부분.

 답이 안 날 것 같고 서로의 피해 정도도 경미한 사건에 조정을 권유하는 부분이 있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당사자들을 보더니 박차오름 판사는 절대 조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는다. 그렇게 구비구비 이야기를 짚어가다 서로의 속내까지 풀어놓는데 그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소설가의 글이 아니라 현직판사가 있을 법한 일을 적은 것이라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법은 멀고 억울함은 지척이라 이렇게 선뜻 그 맘 읽어주는 대목만으로도 울컥해진거다.

 

  이 책은 흠집이 많지만 영롱한 빛이 나는 보석같다. 주인공들 이름이 살짝 구리고 이야기도 법정을 벗어나면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이 신선함은 떨어진다. 부장판사와 우배석 좌배석의 비기닝 부분은 살짝 낯간지럽고 서사의 이쪽 저쪽이 어색하다. 끼워맞추기 같고 허술한 구석도 많다. 하지만 맘을 끌어당기는 한 장면, 대사에 속절없이 반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이 책 좋다고, 주변에 소문내고 다닐 정도다. 결국 매력이란 건,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점 하나가 너무 빛나서 아무 생각없이 푹 빠져버리는게 아닐까.

 

 나는 모두가 각자의 일에 대해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글이야 소설가가 제일 잘 쓰겠지만 사람들이 쉽게 재단하고 넘겨짚는 각자 일의 속성, 일의 시작과 끝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란 것 말이다. 문유석은 서툴지만 훌륭하게 자신의 일을 글로 표현했다. 판사들 이야기는 기록문 읽는 씬이 다일 정도로 지루하다고 했는데 그가 그리는 법정 활극은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처럼 장면이 그려지고 미스 함무라비 2가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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