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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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운이 좋으면 5시, 아닐 때는 4시에 아기 밥을 먹이고 7시에서 8시쯤 잠에서 깬다. 아기가 조금 더 자다 일어나면 기저귀를 갈고 아기 밥을 주고 나서 나도 밥을 챙겨먹는다. 이틀에 한번 꼴로 아기 기저귀를 빨고 저녁마다 젖병을 씻는다. 아기는 아침 무렵 1~2시간 놀다 잠이 든다. 전에는 포대기로 업어줘야 잤는데 요새는 우유를 먹다가 잠이 든다. 가끔 다른 곳에서 잘 때 잠투정을 하기도 하지만 잠은 잘 자는 편이다. 아기가 잠든 사이 방을 쓸고 닦거나 그냥 널브러져 있는다. 아침에 응아를 한 경우에는 기저귀를 빨고 아기를 씻기기도 하면서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집안일을 하며 아기를 돌본다.

 

  오후에도 다시 비슷한 일과가 반복된다. 5시 무렵부터는 저녁 준비를 한다. 외벌이를 한다면 가사와 육아를 내가 전담하리란 예상은 했지만 너무 전담이라 가끔 협박과 한탄으로 신랑이 할 부분을 맡긴다. 하지만 이게 또 애매하다. 처음에 확고한 맘으로 일정 부분 집안일을 분담하게 하리란 다짐을 했다면 지금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온 사람에게 걸레를 빨라거나 설거지를 하라고 하기 미안하다. 그래서 지금은 은근한 압박은 하되 막 시키지는 않는다. 주인의식을 갖으라거나 향후 내가 돈 벌러 나갈 때를 대비하라는둥 말이다.

 

  아기가 비교적 순한 편이고 밖에 안 나가면 벌떡증 나는 사람도 아니라 집에서 지내는 생활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 우울증이 올만한 시기에는 가족들과 동생이 귀찮을 정도로 곁에 있어줬다. 신랑은 퇴근 후 다른 약속 잡아서 노는 것보다 아기 돌보는 걸 낙으로 생각한다. 신랑에게 아기를 맡기고 가끔 영화를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놀다 오기도 한다. 그럭저럭 이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기를 낳기 전 대단한 성취를 거두고 승승장부하던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아기와 함께 그 모든 경력과 성취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집에서 아기만 키워야 한다면? 신랑이 나보다 돈을 적게 버는데 꼼짝없이 육아를 해야 한다면 말이다. 딱히 아기를 원한 것도 아니고 갖은 고생 끝에 낳은 아기가 맹렬하게 나를 거부한다면? 그것도 모자라 주위에 나를 응원해줄 사람 하나 없는데 신랑마저 나를 아기에게 해로운 사람 취급한다면?

 

 서늘한 기운, 차갑게 굳어버린 에바의 얼굴, 빛나다 끝을 향해 으스러지는 조명.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남은 건 영상의 이미지와 큼직한 감정 덩어리였다. 결과의 도덕적 판단은 명확하지만 원인은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사건과 그 후에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는 이미지로 전달한다.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며 주인공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창동 화법은 아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관객의 시도를 매번 좌절하게 만든다. 목요일의 사건은 누구 편을 들 수 있는 사안도 아닐 뿐더러 단서 역시 부족하다.

 

  책을 읽는 건 반신반의였다. 영화로 충분히 압도당했는데 책이라니. 그런데 책이 더 좋았다. 미국의 문화를 모르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잘 안 읽히는 문장과 오역, 오탈자가 여럿 있었는데도 한동안 푹 빠져 책을 읽게 만들 정도였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 남편인 프랭클린에게 편지쓰는 형식은 탁월했다. 당사자인 에바는 긴장감 없이 넋두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남편과의 미묘한 갈등, 케빈의 비밀과 속마음을 검열하고 조정하며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동안 접한 틸다 스윈튼의 영화 속 역할은 비현실적이었는데 ‘케빈에 대하여’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 ‘에바’가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영화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피해 공사장 찾아 안도한다거나 공놀이를 하는 씬이 기억에 남는데 책 속 에바는 더 맹렬하게 집요하고 차갑다. ‘어쩌면 내가 셀리아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어’란 말이 인상적일 정도로 에바는 케빈과의 악전고투에 너덜너덜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이가 왜 그런지를 엄마에게 묻는다. 변명과 자기방어가 무색할 정도로 끈질기게 추궁한다. 에바가 할 수 있는 건 자기변명 대신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시키기. 사람들의 의혹은 더 커져간다. 무정한 엄마라면 아이가 그랬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서슴치 않는다.

 

 앞서 얘기한 것과 달리 아기를 돌보는 일은 본인이 아기를 낳기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별개로 고달프고 힘들다. 집에 갇혀 아기의 욕구와 활동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기를 통해 인식과 기쁨의 지평은 넓어지되 사회적인 나는 콩알만하게 쪼그라들고 만다. 그럼에도 앞의 이야기를 한 건 이러저러한 변수들이 고된 육아를 좀 더 가볍게 할 수도 더 무겁게 자신을 짓누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에바에게는 그런 부수적인 도움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케빈은 너무나도 영리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파악하고 싶어 쉽게 부모 자식 역할에 빠질 수 없었다.

 

“요즘에 무슨 밴드 음악 듣는지도 물어야지?” 그 애가 진지하게 말하더군. “다음엔 첫째 줄에서 날 간질이는 작고 귀여운 보지가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겠는걸. 물론 그 단계로 넘어가는 건 전적으로 내 결정에 달렸지만. 하지만 복도에서 영계를 굴리기 전에 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자, 이제 디저트도 나왔으니 약물에 대해서도 물어봐야지. 조심해, 당신도 날 겁줘서 고개를 떨어뜨리게 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당신은 당신이 그걸로 무슨 실험을 했는지 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실험을 했다는 뜻은 아니야. 결국 그 한 병을 다 빨고 나면 당신의 눈은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바뀔 거고, 함께 귀중한 시간을 보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겠지. 그리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꽉 껴안을 거야.”

“네 말이 맞아, 비평가 선생.” 난 상추를 던져버렸어. “그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이건 당신 아이디어였어. 난 이 빌어먹을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 426p

 

“... 아줌마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는 ‘무식한’이야. 그다음으로는 ‘자랑하는’이고.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면 ‘바보 천치 미친놈 개새끼들보다 내가 훨씬 잘났어.’는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거지? 그 여자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잖아. ‘믿고 있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야.’” 그 애는 이 말에 밑줄을 그은 다음,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내 눈을 바라봤어. “음. 당신이 다른 멍청한 미국인들과 계속해서 서로 닮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뚱뚱해지지 않는 거야. 당신이 독선적이고 우월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단지 당신이 말랐기 때문이니까.” 여기서 독선적이란 거들먹거리는 걸 말하는 거야. “어쩜 나한테는,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커다란 암소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더 나았을 뻔했어.” 433p

 

 하, 어떻게든 뭔가를 쥐어짜서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만 이 리뷰는 많은 물음을 남긴채 끝을 맺는다. 일반적인 도덕은 지루하고 차원이 다른 논의는 낯설다. 나는 다만 서늘한 기운과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당한 채 결코 왜 그랬는지에 답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읽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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