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데도 불구하고 요새 일 끝나는대로 자꾸 손에 쥐게 되는 '워킹 푸어,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 '정글'이 사실적인 픽션이라면 워킹푸어는 소설같은 논픽션이다. '한국의 워킹푸어'가 일종의 관점을 갖고 뻔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한다면 미국판 '워킹푸어'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와 제도 전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워킹 푸어에 대한 이야기지만 복지 여왕에 대비되는 개념이라던가 인터뷰한 인물들의 사연과 제도에 대한 이야기,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그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보다보면 이 책을 통해 남는 건 사례 나열이 아닌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10년이 넘게 부침을 겪고 있는 제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려 하고 있다. 토론도 하고 인터뷰도 하면서 왜 이 제도가 처음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는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시행지침도 읽어보고 구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시행지침에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이 거의 대부분 들어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애초에 맨땅에서 시작한게 아니었던 것. 대단히 세심하고 섬세한 지침이 있었지만 현실에서 적용이 안 되고 경계가 흐려지고 당사자마다 자기 식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워킹 푸어에서는 단일한 복지체계를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모두 적용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나온다. 예컨대 저소득층에게 지원하는 분유의 경우 저체중 아이는 단백질 분해효소가 없어 지원하는 분유가 아닌 단백질을 잘게 분해한 분유를 먹어야만 한다. 이런 예외는 시스템의 수정을 요구한다. 아이의 건강을 상담한 의사는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지만 큰 틀의 수정은 더딜 수 밖에 없다. 천식이 있는 아이가 세들어 사는 집주인에게는 의사의 부탁보다 변호사의 면담이 더 효과적이다. 시스템을 잘 운용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야할지는 개별 사안에 따라 달라진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신나게 일을 해온지 2년이 좀 넘었다. 일을 배울 때 신났고 지금도 기획을 할 때면 글을 쓰는 것만큼 짜릿하다. 하지만 때때로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여 어떤 내용들을 감당하고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는 순간이 생긴다. 노력의 질을 어느 수준까지 밀어부쳐야 할지, 그게 내 역량에 맞는건지, 누가 알려주는대로만 일했으면 좋겠다란 바람까지. 이 일을 통해 내 장단을 잘 알게 됐고 내 한계도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간다.
1년 정도 쉴 예정이다. 11월에 있을 행사가 걱정되고 그런건 후임자가 알아서 잘 할거라는 주위 말에 소심하게 상처 받고,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일거라는 옆지기의 위로에 다시 팔랑귀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정리가 깔끔하게 안 된 것 같은데 손을 놓는 것 같아 걱정되고 다음에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다른 누군가가 잘해서, 혹은 잘 못해서 예전같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 10년 정도는 해야 전문가가 된다는 그분 말씀도 생각나고 요즘 같은 시대에는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메이지 않는거라는 말에도 흔들흔들. 워킹푸어 얘기하다, 기승전근황 이야기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