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자신감과는 또 다르다. 자신감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건 우울했던 20대 초반의 몇 년간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없을 거란 생각부터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존감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난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날 입증해 보이려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했던 것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바동거렸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승인을 다른 이들로부터 따내려 했다.
 하지만 그날 날, 내가 가진 자산과 능력과 상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거기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백 점짜리여서가 아니다. 부족해도 그게 있는 그대로의 나이기에. 내가 나 아닌 누군가가 될 수는 없기에.
 자존감이란 그런 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거.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엔 더 이상 타인에게 날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누구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재밌어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약 내가 서울대를 갔더라면 분명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 겨우 공부 하나 잘하는 걸 가지고 스스로 존재 자체가 우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편협하고 유치한 멘탈리티, 그걸 결코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을 게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삶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위해 내 인생 대부분을 소비하고 살았을 게다. 그렇게 누구의 기대도 저버리지 못했을 게다.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건 내 존재의 우월함을 스스로 저버리는 거라 여겼을 테니까.
  난 이제 자신이 온전히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안다. 그래서 이제 누구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 없이는, 평생을, 남의 기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쓰고 만다.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에 그만한 낭비도 없다.

 내 평면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음 중요한 건, '물끄러미' 파트. 바라보되, 물끄러미, 바라보기. 이건 뭐냐. 이건 시큰둥하란 건데 시니컬하곤 다르다. 길 가는데 쾅, 차사고 났다. 돌아봐라. 사람 다쳤으면,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거지 뭐, 무덤덤 씨불인다. 이건 시니컬. 반면, 쾅 했다. 안 돌아본다. 다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러고 그냥 간다. 이건 시큰둥.
 이제 그 차사고가 내 인생의 도로에서 났다 생각해보라. 느낌 오나? 삶의 통증 대부분은 자기만 힘든 줄 알아서 자기가 만드는 거다. 억울해서. 더구나 자기가 너무 중요한 줄 안다. 그래서 북받친다. 하지만 이, 시큰둥, 되잖아. 그럼 자기 인생 가지고 소설 안 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있는 그대로 보인다. 담백해진다고. 당연히 관점도 클리어해진다. 자, 여기까지가 자기객관화 패키지.
 자기객관화란 입체의 연속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스스로 인지하는 거다. 그리고 그렇기에 거기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세계 속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일정 거리 이상 확보되어야 제 모습 전체가 조감되는 법이니까.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뉴턴은 이건 작용-반작용이라 했다. 근데 이 말 가만 뒤집어보면, 비용 지불한 건, 온전히, 자기 거란 소리다. 이 대목이 포인트다. 공짜가 아니었잖아.

(키 작단 고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릴 만큼 견고하고 대범한 자기인식은, 그 자체로, 졸라 섹시하다. 그러니까 당신을 진정 안 섹시하게 만드는 범인은 뼈의 길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스스로 주눅 드는, 당신의 자기인식일 게다. 

(꿈과 현실) 먼저 꿈이란 말 대신 목표라고 하자. 꿈이란 단어 자체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의 어려운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의 당연한 난관이니 적당히 무시하는 게 마땅한 태도라며, 스스로를 '나이브'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게 만드는 이 자기최면이 긍정적 위력을 발휘할 때,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효과가 긍정적이려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꿈이라는 말이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에 자체 발부하는 면죄부, 스스로에게 분사하는 최면가스가 아니려면 말이다. 그러니 일단 꿈이란 단어를 목표로 바꾸고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
 첫째, 경제적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그 기회를 포기해온 것인가. 이 질문,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묻는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무능과 태만과 불안을 '꿈'이란 단어로 포장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 단어 자체가 그만큼 낭만적이다. 용서받기 수월해서 대충 기대고 비비기에 좋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실제 그렇게 한다.
 둘째, 목표와 현실이 얼마나 같이 놀고 있는가. 목표는 현실적일 때만 성취된다. 그러자면 일정이 매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냥 그 업계에 있다고 시간이 알아서 당신을 그 목표 지점에 실어 나르는 게 아니다. 당신의 목표는 얼마나 구체적인가. 그리고 그걸 이루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꼼꼼하게 계산해봤나.
 셋째, 당신이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은 어디까진가.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럼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삶에 대한 응석에 불과하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가 아니라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수입 적으면 적게 쓰라. 없으면 자신이 번 만큼만 쓰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냉정하게 답한 후 '꿈'을 말해도 말하시라. 그런 질문 생략하고 그저 꿈만 말한다면, 그 단어 뒤에 숨어 부모한테 얹혀사는 팔자 좋은 놈팽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꿈은 목표이지 핑계일 수 없다.

 '고마치 해묵었으모 됐다... 부끄러운 기라... 이제 마 대중이가 해라 케라'
 정작 자신들은 한 번도 누려본 적도 없는 허구의 기득권을 부여잡고 지역에 기생하는 정치배들이 제공한 핑계와 거짓을 주워섬기며 앙상한 선민의식으로 버티던 한 무리의 경상도 서민들 입을 다물게 한건, 그렇게 논리가 아니라 70대 노인네의 염치였다. 아, 가슴이 아팠다. 그 한마디에 담긴 경상도의 자조가, 정치꾼들이 그들 가슴에 심어놓은,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원죄의식이. 자리는 거기서 끝이 났고 그래도 그들 중 DJ에게 표를 준 이는 아무도 없었을게다. 모친이 난생 처음 기권한 게 그나마 그 말이 그해 대선에 끼친 직접적 영향의 전부였다.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네 고부 갈등의 본질은 가부장 가족 체제 아래서 육아에서 봉양까지 담당하며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가부장이 취하고 남긴 자투리 권한을 놓고 벌였던 권력 투쟁. 그리고 그 쟁투에서 승리한 유사가부장-시어머니의 후광 업고 섭정 권력을 후천적으로 학습한 이가 시누이고, 시누이의 가학성은 개인 품성이 아니라 그렇게 권력 구조의 소산이라고. 그 구조가 유효한 한 그 가학성은 사회적으로 유전되어 왔고, 시누이는 그래도 되는 법이란 진단 유전자가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거지.  

(상사가 능력없다는 고민) 능력이란 게 업무를 재빨리 파악하고 문서를 예쁘게 꾸미고 보고서 잘 만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절대 아니다. 당신 회사의 사장이나 이사가 그런 능력이 출중해서 그 자리에 간 게 아니라고. 사람들의 욕망과 갈등을 중재하는 정치력, 일의 큰 방향성을 가늠하는 통찰력, 인간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부리는 용인술, 상대로부터 신뢰를 얻어내는 태도, 자세, 외모, 말투를 비롯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분명히 있었기에 그 자리에 간 거다.

  난 이런 관계를 제목 없는 관계라고 부른다. 왜냐. 정말 제목이 없거든. 연인이냐 하면 정확히 맞는 정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친구냐 하면 그 역시 딱 떨어지지 않거든. 그럼 제목이 없으니 그런 관계는 아무 관계도 아닌 거냐. 아니지. 그냥 제목이 없을 뿐이다. 들판의 꽃이,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아니더냐.
 그럼 왜 그런 관계가 생기느냐.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이다. 0과 1의 이진수로 이뤄진 디지털의 세계에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0과 1사이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디지털에선 연인이거나 혹은 아니거나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불연속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 0과 1사이에도, 관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혼란스러운 데다 무섭기까지 하다. 왜냐.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상대의 사랑이기도 한 존재를 상상해보시라. 인정하기 싫다. 날 떠날까 무섭기도 하고. 해서 사람들은 0과 1의 똑 부러지는 관계에 대한 제목만 만들어냈다. 중간 어딘가는 불확실해서 무서우니까. 괴로우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배타적 언어, '연인'은 이번엔 거꾸로 사고 자체를 그렇게 속박한다. 애초부터 0과 1 이외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그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가 부재한다고 그 관계 자체도 존재할 수 없느냐. 결코 아니거든. 0.64짜리 애인, 있을 수 있다. 섹스도 하고 서로를 걱정도 해주지만 각자 애인은 따로 있는 관계 혹은 섹스는 전혀 하지 않지만 애인 제쳐두고 모든 영화를 같이 보는 관계,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럼 친구인가 애인인가. 존재하는 명칭만으로 설명이 충분히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신과 그 사이엔 지금 그런 제목 없는 관계가, 싹트고 있는거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적당히 칭할 제목이 없어 당황하고 있는 거고. 제목이 없으니 그나마 가장 가까운 우정이란 단어 속에 그 관계를 우겨넣고 있는 거고.
 자, 어떻게 해야 하냐. 내 조언은 그렇다. 그 관계가 그 관계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제 스스로 발전해가는 데까지 기꺼이 따라가보라고. 그게 쉬운 길이라 따라가보라는 건 아니다. 제목이 없다는 건, 당신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합당하게 설명할 방도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소리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제목에 맞는 관계로 서로를 우겨 넣으라고 하는 사회적 압력도 작용할 게다. 그런 긴장과 갈등과 알력으로 인해 결국 그 관계가 흐지부지되고 마는 게 다반사이기도 하고. 그러니 쉬운 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대가를 지불하고도, 그런 관계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의, 듣도 보도 못한 궤도를, 당신들 둘이서 돌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게다. 그리고 그로인한 즐거움은, 온전하 1짜리 연인관계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 생겨지더냐.

 만약 당신이 허전하고 미안해서,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다면, 불행해질 확률 매우 크다. 그건 '제리맥과이어'식으로 말하자면 "being polite"하려는 거니까. 상대를 이렇게 아프게 하면서까지 그의 감정을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정도의 예의 바른 마음으로 시혜적 연애를 시작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거, 여자는 재깍 알아본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을 구걸했단 의식을 항상 갖게 된다고. 관계 균형의 추가 결코 평형에 오질 못한다고. 불행하지.

 당신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할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선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지금 당신의 진짜 문제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게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기 싫어 아예 선택 자체를 피해버린다. 그렇게 선택으로부터 도망가면 결국 다른 사람이나 시간이 당신을 대신해 선택을 한다. 결과라는 건 그렇게 당신이 선택을 하든 않든,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닥치기 마련이다. 그 경우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 어느 쪽이 됐건 반드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시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고백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망설이다 그냥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당신이 그 고백을 유보하기로 결심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후회될 땐 잘못된 선택을 되돌아볼 때가 아니라 그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었다는 걸 알았을 때다.

 연인관계를 자발적 구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우 방점은 자발적이란 데 찍혀야 하는 거거든. 방점이 구속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래서 안달하며 구속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게 바로 관계의 생리거든. 몸 묶는다고 마음 묶이나.
 그러니 그냥 냅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좋아하기나해줘. 이 여자가 이러다 날 떠날지 모르니 그럼 여태 내가 준 건 다 헛수고가 될 텐데, 이러다 낙동강 오리알 되면 남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까, 내가 뭐가 못하다고 따위의 본전 의식, 자존심, 공포심은 떨쳐버리셔. 그런 생각에 신경 뺏기지 말고 오로지 당신과 그녀가 지금 당장 주고받을 수 있는 연애의 즐거움에 최대한 집중하라고. 그렇지 않고 약게 하는 연애는 얕아서 완전연소가 안 돼요.
 완전연소. 서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남김없이 주고받아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정서적 충만감에 다다른 연애를 말하는 건데, 그런 걸 경험하고 나면 상대가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붙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기원해줄 수 있게 돼.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태워버린 거니까. 그런 거 흔히 겪는 일도 아니고 누구하고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연애의 절정이란 그런 거야. 시시한 연애 열 번보다 그런 연애 한 번이 백만 배 낫다. 그러니 당신이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그래도 그녀가 떠난다? 그럼 인연이 거기까진 거야.

 내짝 독점+남짝 찬탈 욕망이 제짝 피탈 공포와 합의 본 절충안, '한 번에 한 넘만'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의 주류 규범일 순 있어도 절대 선은 아니다. 안전과 안정 대신 불안과 이별 위험 감수하며 맥시멈 쾌락에 베팅하는 선택 자체는, 곰곰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의 영역이다. 다만 연애라는 도전이 응하는 제 방식이 그러하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미리 고지하고 합의를 봤어야 했고, 저간의 사정으로 고지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사후 발각되는 결계는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사전 고지 생략은 비겁하고, 사후 발각은 무능하다 하겠다. 

신정환은 공인인가. 답, 아니오. 연예인, 그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공복이 아니라 공공연한 영역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직업인이다. 국민투표로 그들 선발해 성금 각출로 그들 무명 시절 자금 조당해주고 반상회에서 순번 정해 그들 출연하는 프로 의무 방청한 게 아니다. 그들의 영업 내용이 퍼블릭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업 장소가 마침 퍼블릭할 뿐인게다. 하여 그들에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평균 이상의 공적 가치를 지향할 의무, 없다. 각종 연예인 사건 때마다 공인 운우하며 연예인은 더욱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언론의 주장에 그래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단 점, 일단 짚어두련다.

 몰래 그녀 핸드폰에서 번호 알아낸 당신, 전화한다. 그러나 그 남자(여자친구의 옛남자), 당신 전화 받을 일 없다며 단박에 끊어버리고 그 사실을 안 여친 역시 당신을 추궁한다. 당신은 황당하다. 잘못은 지들이 했는데. 이런 상황, 흔하다. 어디서 잘못된 거냐, 당신이 화는 낼 수 있다. 기분, 나쁘니까. 인정.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왜냐. 그녀와 당신의 관계가 그와 무관한 만큼이나, 그들의 관계 역시 당신과 무관하게 그들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그에겐 당신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그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듯. 그런데 당신은 왜 당연히 개입 권한이 있다고 여긴 거냐. 왜냐. 사랑하니까. 사랑의 권리가 그 정도는 되니까. 그녀와 다른 사람 사이에 나와 별개의 관계는, 사랑한다면, 존재하지 말아야 하니까. 그렇게 믿는 거다. 자신과 별개의 노정이 연인의 삶에 존재할 수 있단 사실을 수용하기 힘든 지금처럼 말이다.
  이런 오판은 왜들 하느냐.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탓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말자.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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