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쉬었다. 해가 잘 드는 방에서 뒹글거리며 책도 보고, 과자도 먹으며 놀았다. 허리가 아프면 책상 앞에 앉아 이면지에 끄적끄적거리기도 했다. 눈이 침침해지면 다시 자고, 또 잤다. 그렇게 지내는 휴일은 너무 달콤했다.

 A가 방으로 들어설때만 해도 나는 나름 야무진 생각을 했다. 자는 나를 놀래켜줄라고 하나보다, 그래서 내가 한술 더 떠서 ‘왁’하고 놀래켜야겠다란 계획까지 세웠더랬다. A가 가까이 다가오길래 왁하며 번쩍 일어섰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A에게도 이 도시가 낯설었다. A는 직장에서 생긴 일을 얘기하며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제도 어제도 들었던 얘기였다.

 달콤한 사탕을 물고 있는데 누군가 뒷통수를 쳐서 사탕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다음달엔 방세를 내야하고, 그동안 우리가 계획했던 일들이 있는데. A는 왜 일을 잘 못해서 나까지 걱정을 시킬까 싶은 미덥지 못한 맘과 그 몇 배의 가책이 밀려왔다. 말을 하던 A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시 일어났다.

 삶을 대할 때 네비게이션처럼 확신에 찬 태도가 싫다고 했지만 나 역시 사는 게 정답을 맞춰야하는 시험지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내가 적은 답이 틀릴 것 같으면 조바심을 내고, 내 생각만큼 점수가 안 나왔다며 툴툴댔다. 사는건 시험지에 있는 문제를 푸는게 아니라 시험 문제는 커녕 답도 없는 과정이란걸 몰랐을까. A는 내게 생활비 걱정을 시키고, 달콤한 휴식을 방해하려는게 아니었다. 그저 잠시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난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어쩌면 내 잘못이 더 컸을 일들을 놓고 점수가 잘 안 나왔다며 떼를 써왔다.

 A를 토닥이며 A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이 너무 순해보여서 사람들이 덤비는거라면서 인상쓰는 법을 알려줬다. 그리고 내가 능력이 되니까 정 힘들면 쉬고 싶을만큼 쉬라고 말해줬다. A는 아치 허풍에 감지덕지하는 대신 인상을 어떻게 써야 먹히겠냐며 인상파인 아치의 조언을 구했다.

 A가 나가고 나자, 잠도 달아났다. 후다닥 일어나 내복에 츄리닝을 입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선 자전거를 탔다. 30분 거리에 있는 시장에서 A의 모자를 사고, 겨울 내내 몸을 따뜻하게 해줄 감초를 샀다. 할머니께서 손수 손질하신 파릇한 시금치와 너무 맛있어서 자꾸 오게 될거라고 장담한게 꼭 들어맞는 맛난 젓갈을 샀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흑미를 넣은 밥의 밥 냄새를 아주 오래오래 맡으며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갈색의 쌀알이 점점이 박힌 흑미보다 조금 더 비싼 새까만 흑미를 보고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얘는 왜 조금 비싸요? 더 맛있나? 둘 다 국산인데. 품종이 달라요?”
 할머니는 아주 까만 흑미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것이 더 이쁘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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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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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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