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는 이유를 오십가지쯤은 댈 수 있다. 그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했으며 말만 번지르르 했다. 내가 봐도 뭐가 문제인지 뻔히 들여다보이는걸 묵과하는 꼬락서니도 환장할 노릇인데 의견을 보탰더니 어쩌고 저쩌고 개코로도 안 듣는다.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쩔줄 몰라하며 뭐가 잘못된건지를 생각했다. 튀기 싫다며 가만히 있어서일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때(그 두개를 굳이 구분한다면)보다 더 스트레스를 줘서일까, 그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일까,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아서일까,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없어서일까, 정말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짓을 꼭 해야한다는게 맘에 안 들어서일까. 씩씩대며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 2010년 대본 리딩 연습 중에 쓴 글


 창작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지 한달여가 지났다. 한달 전의 난 저녁마다 연습하는게 피곤했고, 좋아서 한다기엔 마뜩찮은게 한두가지가 아니라 좀 짜증이 난 상태였다. 특히 플롯 하나 말고는 믿을거 없는, 디테일은 제쳐두고, 캐릭터며 개연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대본에 염증이 났다. 게다가 오야붕은 내가 제기하는 문제마다 앞으로 고칠거라고, 곧 좋아질거라며 얼버부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아진건 없는데 모든게 다 열악한 지방 연극 사정 때문인 것처럼 지리하고 지겹워서 가끔 우울해지는 날들이 흘러갔다.
 
 간간히 연기와 발성 연습을 했고, 사람들을 익혀갔으며, 안무 연습을 했다. 리딩을 통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대본은 점점 구색을 맞춰갔고, 여전히 미진한 감이 있었지만 연기를 한다는 것에 감격해 애초에 갖고 있던 몇몇 문제는 흔적을 감춰버렸다. 우린 연기를 했다.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면 어땠을지. 저 사람이 하는 말을 전략적으로 받아치는건 어떤건지, 호흡으로 대사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 연기는 상상할 수 있는 가짓수를 넘길 정도로 어려웠다. 화난다고 찡그리고, 소리치는게 다인 연속극의 연기가 거시기하다는건 알았지만 그게 어떻게 거시기한지까지 예전의 내가 알리가 없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플롯과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캐릭터성이 약한데 연출자가 요구하는 분명한 연기선이 있다. 밝고 통통튀게, 상황을 갖고 놀되 드러내지 않게, 빈틈이 보이지만 천박하지 않게. 무슨 낮엔 요조숙녀, 밤엔 야생마(아, 이 호응이 아닌데)도 아니고. 전형적인 여성성을 넘어서서 남자의 시각으로 우습게 구성된 여자의 면면도 마뜩치 않은데 이 여자는 여성성의 최전선에서 무수한 감정노동을 통해 닳고 닳은 연기를 보여줘야한다. 내가 이토록 널부러져있는 사람인지, '오빠'란 말에 태생적인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지 연극을 하기 전엔 정녕 몰랐었다.
 
 무대에 계속 서보고 연기를 하면서 어느 정도 어떻게 해야한다가 정리되자 다시 새로운 단계로 넘어섰다. 반복되는 연습으로 퉁치면 와르르 쏟아지는 대사더라도 늘 신선하게 해야한다는 것. 나는 몇십번 들었을지언정 연극을 보는 사람은 처음 듣는 대사다. 매번 새로울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상대방의 말을 처음 듣듯이, 상대방과 처음 손을 잡듯이, 늘 처음처럼 한다. 다른 미션들도 수두룩하다. 혼자 대사치지 말기, 호흡을 끝까지 갖고가기, 화가난 연기가 아니라, 정말 화난걸 갖고 가기, 포인트를 줘서 정확히 집어주기 등등. 연기는 생각만큼 늘지 않는다. 나는 나름 똥배짱인지라 첫 연기에 너무 잘하면 자만해질거란 믿기지 않는 위안까지 셀프로 주고받는 중이다.

 오늘은 세트 세팅을 한 후, 페인트칠을 하고 방금 전에 들어왔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말 보람됐어요'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저 좀 피곤하고, 가끔은 따분하고, 어떨땐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란 생각에 머리끝까지 저릿거린다. 그런데 말이다. 왠지 아직 극이 시작된게 아니니까 그 전엔 이렇게 좀 떠들고 어쩌고 저쩌고 궁시렁대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거다. 그래서 좀 궁시렁대자면,

 나는 야식을 준비했다. 버섯과 멸치와 다시마, 무를 넣고 끓인 오뎅국으로 극단의 맛을 평정했다. 포만감을 핑계로 난 어제 자전거 타다 업어져서 입술이 까지고, 무릎에 피멍이 들어서 골골하고 있어 제대로 된 '시체 역할'을 못한걸 두고 누구씨가 비꼬길래 일기장에 그의 이름을 적어 놓고 주문을 외웠노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에게 '버럭 가부장 아줌마'란 별명도 지어줬다. 그는 좋아 죽겠는지 한번씩 나를 보면서 썩소를 날려줬다. 나는 시체역의 내가 넘어질때마다 나를 부축해주는 세명의 손을 안다. 연기적인 에너지가 넘쳐 그날 그날 상황에 따라 손맛이 다른 A와 늘 섬세하고 가늘게 떨리는 B, 항상 변함없이 우왁스러운 C. 그들을 손의 느낌으로 감지하는건 시체역인 나뿐이다.

 배우는 것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다. 귀찮은 것도 많고,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한번의 공연을 위한 수십번의 연습은 문제도 아니다. 생활 극단이라 여러모로 신경쓰고 고려해야할게 많다. 그런데 어쩌면 참 좋다. 열정없는 내가, 불쏘시개로도 못쓸만한 미적지근한 맘이 그들의 열정으로 데워져서. 난 잘 할 수 있을까? 막이 내리기 전엔 모르는 일이다.

 아, 앞서 말한 대본과 연극의 재미. 결국 모두가 만들어가는거다. 맘을 열고 바라볼 관객과 열심히해서 가장 최고만 보여줄 배우와 스텝들, 무대와 그날의 날씨까지. 게다가 한번하고 말거 아니니까 다음엔 얼마나 더 잘하겠는가. 나 배우답게 뻔뻔해지고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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