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탔다. 간신히 맡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즈음 할아버지가 타는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뒷문 쪽으로 오셔서 슬로우 모션으로 허리를 굽힌 후 간, 신, 히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슬로우 모션으로 허리를 천천히 펴더니 손잡이를 잡았다. 가방이 무거워 조금이라도 앉고 싶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일어났다. 빈자리가 없는데도 할아버지는 방금 전까지 내 자리였던 곳에 앉지 않으셨다. 쭈뼛거리며 할아버지께 다가갔다. 낡은 카키색 패딩을 입고, 농사일로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는 나이 든 남자가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 할아버지, 저기 앉으세요.
- 가서 앉아. 내가 운동을 하는거야. 가서 앉아.

 운동을 하러가는거니까 서있어도 된다는건지, 서 있는게 운동이란 소린지 모르겠다. 난 할아버지 옆에 서서 뻘쭘하게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앞쪽에 자리가 나자마자 잰걸음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러실거면 내 자리에 앉으시지.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요즘 우리 동네 어른들 트렌드일까. 자리를 비워도 좀체로 앉지 않으신다. 내 몰골이 피곤해보여 차마 자리를 양보받을 수 없는가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일어나는 사람을 보자마자 잽싸게 어깨를 눌러 앉히는 분들도 몇 번 본적이 있으니. 왜들 그러실까.

  대도시에선 촉(G씨가 자주 쓰는 말인데 찾아보니 불교용어다. 주관과 객관의 접촉 감각. 근(根)과 대상과 식(識)이 서로 접촉하여 생기는 정신 작용)을 곤두세우고 자리를 물색해도 나보다 더 발달된 감각의 소유자들에게 번번히 자리를 뺐겼다. 도시 사람들은 피곤하고, 지쳐있다. 도시는 공기마저 무거워 그들 어깨를 쉽게 주저앉히고, 허리는 잦은 외로움으로 휙휙 꺾긴다.
  도시를 갈망하던 나이에는 도시로 가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대로 어느 날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거나, 다이나믹하게 문화 생활을 즐기고, 전문적이고 그럴 듯한 일을 하면서 워너비 인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에 치이면 보험사기로 걸려들지 모르고 장애가 올 수 있다거나, 막상 잘 치였더라도(응?) 그 사람이 나에게 반하기보단 미안해하거나 짐짝 취급할거란 것, 문화 생활은 애초에 관심과 돈이란 자원이 있어야 되는거고, 그럴 듯함을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꿈을 꾸는 몇천배의 질량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그 나이엔 알 리가 없었다. 나의 도시 생활은 실패였을까. 그런줄로만 알았다.


 버스 운전하는 분이 내리려고 서 있는 내게 정류장 전에 내릴거냐고 묻는다. 회사가 정류장 사이에 있어서 가끔씩 기사님들이 어디서 내려줄지 묻곤 한다. 버스 안에 뭘 묻고 그래, 정류장에 서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인 것과 거리가 먼 곳, 관광지로 이곳 저곳이 파헤쳐지면 속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뭘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할지 알 수 없는 곳, 어른들과 학생들 밖에 없어 나의 눈이 쉬이 지치는 곳, 누군가 ‘밀양’에서 봤듯이 송강호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은 지역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지랖이 퐁퐁 솟아나는 곳. 내가 사는 곳.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은건 그 때문이었다. 모든 장소와 삶의 거처가 갖고 있는 다양한 성격을 간단하게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 될 수 없는데다 나는 성공적이진 않지만 꽤 근사하고 소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니까. 물론 여전히 난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앞으로 뭘 해야 좀 오랫동안 벌어먹고 살지를 고민한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가끔은 먼 바다를 꿈꾸기도 하고, 땅 속으로 쑥 꺼지는 상상도 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지도 궁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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