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좀 불편한 A라는 친구가 있다. 며칠 전, 친구들끼리 놀러가는 얘기를 하면서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A가 자기는 어디 가든 못노니까 아무데로 가도 상관없단 소리를 했다. 순간 모두들 합죽이가 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누군가 나서서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들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까지는 아니길 바라지만.

 내가 느끼는건 이런거야, 난 조금 다르니까.
당연하다. A가 말하는 것에서 빈틈을 찾기란 내게서 장점을 찾는 것 만큼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편했다. 

 한번은 말을 잘 못하는 B가 자신은 입이 장애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때도 A는 나같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는 소리를 했다. 불관용, 혹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얘기할 수 있는 차이. 그런데 이때도 난 불편했다.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난 그가 호소하는 '나를 알아봐줘, 나는 이런 사람이야.'란 선언이 불편했던 것 같다. 

 친구 중 한명은 A가 산에 가든 강에 가든 땅굴을 파서 거기 들어가 있든 우리가 알아서 배려할텐데 말의 앞뒤를 잘라먹고 얘기를 해서 싫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방관하거나 모른척하는게 얄밉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자기 입장을 얘기하는게 왜 싫은지, 그럼 우리 눈치를 보면서 행동하길 바라냐고 물었지만 말을 하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생각했으니까. 

 나는 왜 누군가의 적극적인 도움 요청에 냉담해질까.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난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준다. 선의는 나 자신의 뿌듯함을 담보한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고, 지금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몸짓을 보이면 도와주려던 맘이 깨끗이 사라진다.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도움도 아니면서 말이다. 선의는 자족과 동반해야만 하는걸까?

 얼마 전에 다른 친구는 중국 사람들은 더럽고 시끄럽단 얘기를 한적이 있다. 친구는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친구 말에 따르면 자신이 겪어봐서 다 안다는 식이었다. 네가 이유없는 편견으로 피해를 봐도 괜찮겠니, 그러는 너는 잘 씻니 정도는 맞받아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건 중국 사람들이 정말 그런지, 친구의 생각이 틀린건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였다. 직접 겪어봤다는 것에 대해선 달리 반박할게 없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꾸준히 친구를 설득하려고 했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 쉽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현명한 나의 친구는 말해줬다.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다보면 그 자체가 불관용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각자 다른 이유로 차별을 받을 수 있고, 그 차별에 대해 설명해야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면 난 A처럼 내 입장에 충실하기만 한 대답을 할지, 아니면 알아서 배려할 수 있도록 가만히 일을지 모르겠다.

 여자가 이렇네, 저렇네라는 말에는 발끈해서 죽을 듯이 덤비는 주제에 자기로선 최선인 방법을 쓴 A에게는 불편한 느낌을 갖는건 정말 병맛이다. 불편한 느낌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타인의 불편함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강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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