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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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는 187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1866년에서 1868년 사이에 나타난 순교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우위였다는 점이다. 이 기간 중 검거된 천주교도 407명 중 남녀 비율은 남자 셋에 여자 하나였지만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수는 78명으로 남녀 비율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었다. 이는 여자의 신앙심이 더 깊었다는 증거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다.
1866년에 처형된 베르뇌는 "조선 민중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사리를 깊이 따지길 싫어한다. 성교의 진리를 가르치면 곧 감당하여 믿음에 들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쓴다. 하지만 진리를 풀이하면 잘못 알아듣는다. 특히 부녀자들과 천민층 남자들이 그러하다."고 했다.
1868년 감옥에 갇힌 학식 많은 여신도 한성임은 "미련한 여인들은 겨우 한 구절의 성서만을 외우고는 바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천당에 갈 줄 알고 기꺼이 죽임을 당한다. 마치 불꽃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들과 같다."며 우매한 부녀자들의 값싼 신앙 태도를 한탄했다.
이규태는 "이처럼 터무니없이 빈약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도 그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신앙심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96쪽

그것은 한국 여성이 대대로 감수해온 수난의 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하기 곤란하다"며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한국에 천주학이라는 신교가 들어오자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막연하게 그려오던 탈출구에 눈을 떴다.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억눌려온 '모럴'에 저항했고 또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감당해냈으며 사지를 찢기우면서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었다. 즉 교리엔 무식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한국 여성이 당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이요 저항이었다. 천주학은 말하자면 그 레지스탕스에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96 이어서쪽

-최재우의 효수와 동학 탄압-
역설적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는 건 아닐까?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없는 무능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망국의 씨앗이 싹트로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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