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였다. 봉사부장인 S가 봉사활동으로 고아원에 갈거라며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갈까 말까 하다가 난 안 가는 쪽으로 맘을 굳히고 S에게 얘기를 했다. S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왜냐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내겐 '왜'가 없었다. 나는 '그냥 싫어서'란 답을 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을 굴러다니면서도 불편한 맘이 가시질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싫어의 끝에서 S가 나를 비난하는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고, 난 S에게 전화를 걸어 변명을 했다. 

 - 그러니까 아이들이랑 금세 정이 들었는데 헤어지기가 어려울 것 같고,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누군가 앞에서 울거나 어떻게 헤어져야하는지 모르겠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제와 생각하니 곧이곧대로 반반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변명을 위한 변명이었다. 난 그냥 가기 싫었던거다. 내가 댄 이유에 S는 공감을 표해줬고, 난 좀 더 굳히자는 생각에 악의적으로 내가 얼마나 표현에 서툰 사람인지를 강조했었다.  

 난 내가 의무감을 갖거나 해야한다의 궁지에 몰릴 때면 항상 그때 일이 생각난다. 

 노무현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동안 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알라딘에 접속했다. 예전처럼 브리핑의 글들을 다 읽고, 화제의 서재글도 꼭꼭 씹으며 그들 슬픔에 공감하고 아파했다. 물론 달라진게 있긴 했다. 내 서재를 닫았고, 어떤 댓글도 달지 않았던 것. 처음은 추모의 표현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지만, 여전히 난 소통불능의, 어쩌면 내 스스로가 강요하는 틀 안에서 근근히 삭는 중학교 때 그 아이에서 한뼘도 자라지 않은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알라딘 뿐만 아니라 다른 사이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즐거워하는 댓글을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반감에 당혹스러워했다. 모두가 슬퍼해야할 때는 아닌데 왠지 스스로의 행위 자체의 보상심리까지 작용한 좀 더 집요한 거부감이었다. 물론 이런 감정을 표현하진 않았다. 엄연히 모두가 슬퍼할 수 있듯이 그렇지 않을 다른 쪽의 입장도 있는거니까. 게다가 일부에서 감지되는 '강요된 슬픔'의 기운이 분명히 월드컵 때의 것과는 다름에도 불편 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슬퍼할 때라고 한 페이퍼가 무색할 정도로 난 그다지 슬프지 않았던거다. 이걸 문제라고 할 수 있겠냐마는 나는 누구보다 노무현을 좋아했고, 지금 상황에서 제일 절실한건 단지 대화하려는 그 시도 자체였다는 것임을 갈망하면서도, 글쎄,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지도, 맘을 한뼘씩 내려놓을 때마다 주저앉으며 망연자실하지도 않았다. 나의 상황에 기인한 열패감 때문일 수도 있고, 죽음 외의 다른 연관된 것에 맘이 쓰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혹은 지금이 아닌 한참 후에 방학 숙제를 한꺼번에 해치우듯 속절없이 발을 동동 굴릴지도.  

 그래서 표리부동한, 슬퍼해야할 때라고 내건 맘이 무색할만치 밍숭맹숭한, 그럼에도 다른이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내 맘의 영역이 감지되자 그건 참 어떻게 다뤄야할 감정일지 알 수가 없어진거다.  

 중학교 때의 내가 모든 것을 다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어쩌면 난 값싼 동정심과 자신의 기분으로 소비되는 자선에 반감을 갖았던 것 같다. 혹은 정말 도덕적 감수성이나 베풂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거나. 혹은 그 당시의 불안한 상황에 비춰 맘의 여유가 안 난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아무도 찾지 않아서 조금은 멋쩍게 다시, 돌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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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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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2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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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1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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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2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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