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지루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처럼 짧은 치마를 입어 다리는 시렵고, 좀전까지 마구 먹어댄 바람에 배는 무거운 상태여서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오늘 본 블로그의 주인이 예전 남자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짤막하게 써놓은걸 보고선 '왠 주책'인가 싶었다. 그가 여지껏 헤어져서 잘 됐다던가, 안 맞는 사람이었다라고 떠들었던건 둘째치고, 다 끝난 관계에서 하필이면 사과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밤엔, 나도 전에 만났던 분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할때면 보이지 않는 눈이 나타나 '네 진면목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까불지마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이제는 그런건 잊어주라고 혹은 상관없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졌다. 상대방이 아무런 얘기도 안 했고, 어떠한 낌새도 없는데 혼자 찔려서, '왠 주책'처럼. 왜 연애할때마다 병증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극성인지 모르겠다. 이건 친구가 말한 것처럼 연애젬병으로 자신을 길들이는 수작일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나는 길치'로 자신을 규정해 길을 알려는 노력마저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아무튼 생각들을 차곡차곡 포개가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누구? 

- Where are you going?

 보니까 유색, 백인이 아닌, 아니 그저 남자? 이것도 아닌 어쨌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분이 나와 보폭을 맞춰 걷고 있었다. 대체 백인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지칭해야한단 말인가. 황인종, 흑인종, 유색 인종. 정희진의 말처럼 피부색이 없는 인종이 어디 있다고. 

 밤이고, 안전한 인종이 아니란 생각에(이런 몹쓸) 무시할까하다 그의 눈이 머루처럼 새까매서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 집에 가는 길이야.  

- 왜 벌써 집에 가? 

- 왜? why라고 말한거야? 

- yeah. 난 너랑 얘기를 나누고 싶어. 

 지금은 밤이고, 나는 자야해. 브라질에서 온 산디는 여자친구가 없으니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브라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은 어떤지 내게 물었다. 봐서 알겠지만 기초적인 것에서도 아주 핵심만 골라잡은 단어만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형편으로 그에게 제대로된 답변을 해줄 수가 없었다. 도리어 계속 잠, 잠을 외치거나 go home만 골라잡아 얘기를 하자니 약간 맥이 빠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 왜 친구가 된다고, 다시 보자고 하지 않았던거니?  

 안전한 대답은 있다. 밤이고, 남자고, 에 그리고 지어낼 수 있는 이유들은 퍽 많았다. 하지만 그런건 별로 염두해두지 않았다. 그렇게 피곤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그가 see you라고 할 때 bye라고 단정을 지었고, 나 스스로도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다란 생각을 했다. 그래, 내가 봐버린건 그가 think를 딩코로 발음한 것과 우리보다 못사는 브라질에서 왔다는 것, 피부색이었다. 아, 졸라(이런 말을 쓰는 것은 졸라 창피하다.) 창피하다.  

 여기서 좀 더 생각을 넓혀보자면 발음 뿐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미국 등 영어권 나라 사람들의 발음이 조금씩 차이가 나고, 케이의 경우도 d발음이 강하게 나는걸 알고 있다. 일본식 영어가 있는 것처럼 나라마다 다른 악센트가 있고, 작정하고 영어를 배우는게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거라면 발음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산디를 거부했다. 그가 흰색 피부에 유럽에서 온 사람이라면 과연 그랬을까?  

 나보다 더 갖거나 부당한 것에는 항의하고 불만을 얘기할 수 있지만 만약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굴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의 성찰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산디의 경우에서 나온 생각이지만 이 경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건 아니다. 외국인에 대해 막연하게 갖고 있던 감상과 실제가 마주치는 것에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단면을 엿보긴 했지만 거부 자체의 속성 때문에 좀 더 문제적이란 생각이 없는건 아니다. 다만 나보다 약자에게 취하는 행동이 가끔씩 문제적이란 생각은 든다.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에서 나온 구절처럼, 

 이건 그저 헌팅일 뿐이라고. 미니스커트가 만들어낸 아주 드문 상황이었다고.  

 연애를 하고 돌아온 주인공에게 친구가 오늘은 얼마를 썼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이 '그저 연애를 한 것 뿐'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이번에는 '그저 헌팅일 뿐이라고.'로 끝을 맺어야겠다. 낯선 상황이 가져다준 파동은 좀 더 지켜본 후에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내가 남미 쪽에 어필하는 얼굴, 아니 뒤태라니! 아치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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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4-0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재밌는 체험기이군요.^^

Arch 2009-04-01 15:46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