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갔다.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빌딩 숲 사이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해를 보고 말았다. 햇살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이런 날씨에 어디에 박혀있는건 범죄야!
아무렴.

 걸었다. 3가에서 1가까지, 1가와 2가 어디쯤에 있는 낙원상가까지. 낙원상가 옆으로 나있는 순대국밥집과 인사동길을. 

 걸은지 얼마 안 돼 인사동 초입에 있는 가게에서 꿀타래 아저씨가 꿀로 몇천가닥의 타래를 만들어내는걸 보고 금세 신이 났다. 누군가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의욕적으로 맞아들이는 느낌이 떠올랐다. 가게에서 봉투따개며 책갈피, 비녀까지 되는 마법같은 물건을 사고, 나무 속에 심을 콕 박아넣은 연필을 구경했다. 한지로 만든 수첩이 참 예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때 탄다고 퉁을 줄거라 생각했는데 이왕 살거면 괜찮은애를 가져가라며 같이 물건을 골라주신다. 목걸이도 구경하고, 홍차도 구경하고, 닥나무 종이로 만든 옷도 구경하고, 구경하다 다리 아프면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고. 참 괜찮은 토요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마저 참 따스해보일 정도로.

 토요일의 종로는 북적대는데도 아름다웠다. 풍경만큼이나 작은 선의가 넘쳐났으니. 선의와 기분 좋은 순간의 절정은 찻집이었지만 서두가 너무 길어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못꺼냈으니 이건 간직해뒀다 나중에 써야겠다.

 약속시간 7분 전,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부리나케 나간다고 말하고선 달려나갔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젊은 분이라 놀랐다는 첫인사를 건넨다. 그럼요, 아치가 좀 젊죠. (응?) 그러면서 서재 이미지와 다르게 예쁘단 소리를 자연스럽게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듣는 소리라 그런지 쑥쓰러움이 발끝까지 전해져 몸둘바를 모르겠더라. 그런데 머릿 속으로는 아치의 예쁜 면모를 보여줄만한 페이퍼로 만남 후기를 쓸 생각에 혼자 흐뭇해져선. 앗흥! 그런데 어쩌나. 모든 페이퍼를 다 갈아엎어도 뱃살이 감춰질리 만무하며 잘 안 씻는다는 사실 역시 변함이 없는걸. 또 다른 곳으로 샜군.  

 

  우린 으슥한 을지로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꾸 날 챙긴다.

- 전 괜찮은데, 편하게 가셔도 돼요.

- 난 낯선 곳에 가면 경계되고 그래서

 그 말에 난 낯선 곳이 좋다고 했는지, 아치니까 괜찮다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두렵거나 낯선 경험을 통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날 데리고간 고깃집이 썩 내키진 않았다.(잘 집어먹고 이런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이래뵈도 나, 오래된 고깃집이야'할만한 더께가 껴있는, 불판이 왔다 갔다하고, 가끔 아저씨들이 싸우기도 하고, 냄새는 잘 안 빠져 고기 먹고 돌아가는 길에 온 몸으로 ‘난 오늘 저녁에 삼겹살을 먹고 왔단 말야.’를 뿜어내는 곳이었다. 하지만 고기보다 난 그녀를 만나러 왔으니까, 계란 노른자에 비벼먹는 파채 맛은 상큼했으니까, 그녀가 재미있었으니까 그따위 고깃집이야 어디래도 상관없었다. 실은 고기 굽는 냄새만 맡으며 이야기를 하라고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배가 고파 얼굴은 시시각각 초췌해지고, 허기로 손은 떨릴 것이며, 눈은 비루먹은 개처럼 충혈되겠지만.  


 우려되긴 했다. 남녀 사이도 아니고, 성적인 긴장감도 없이 처음 만난 사이에서 무슨 얘기를 하며, 할말 없으면 고기판만 뒤집다 오는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에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떼로 모이자고 할까란 생각도 들었고, 말바꿔서 다른 선물은 어떻겠냐고 찔러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는 우려대로 우려먹는 맛만 있을 뿐이었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거나, 미치도록 몸을 틀어대며 웃긴건 아니었다. 눈을 반짝이게 하고, 들어간 배가 쏙 들어갈 정도로 긴장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종일관 편했다. 내가 어디서 이렇게 떠들어봤나 싶을 정도로 말도 술술 잘 나왔고, 그녀의 말 역시 내 맘에 쏙쏙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하고, 웃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하고, 난 그녀에게 금세 배운대로 웃고, 다시 웃었다.

 그리고 이제부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야겠다. 앞서 했던 소리도 서두란 얘기다. 미안, 나도 당신도 재미없는데다 길기까지한 글을 싫어한다는걸 알고 있으나, 어때! 내 서재인데. 아무렴.(그녀가 이런 소심한 뉘앙스는 안 풍겨도 된다고 했건만, 괜히 찔려선)

 난 어디 가서든 성적인 얘기, 야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꺼내는데 있어서 늘 선두를 뺏기지 않았다. 분위기든 상대든 상관없이, 어렸을땐 흥미로, 지금은 탐구 정신으로 자꾸 물어대고 찔러보고, 말하곤 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같은 식으로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첫경험이니, 너에게 섹스는 뭐니 이런 뻔한거 말고, 좀 더 농밀하고, 야릇하고 충격적인 질문들, 질문에 걸맞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혼자 얼굴이 벌개져선 어쩔줄 몰라하는 얘기들을 하고 싶었다. 

 고기가 몇 점 익기도 전에 무슨 말의 끝엔가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런’ 얘기를 들려줬다. 갑자기 내 눈이 반짝여져 숨길 생각도 못한채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했노라고 고했다. 그녀는 그런건 문제될게 없다는듯 그녀의 비린 남자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악하악. 

 내가 만났고, 호감을 갖게 되는 남자들이 갑자기 팬시하고 말랑말랑한 사람들로 느껴지는게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확고했고, 진실로 비린 맛을 원했으며, 그건 보통 사람들이 규정할 수 있는 비림의 성질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초니, 위버 섹슈얼이니, 토이남이니 여성만큼이나 남성을 가로짓는 규정들 속에서 그녀만의 독특한 비린 남자론은 어찌나 생기가 넘치던지. 오랜만의 음주로 뱃속이 요동을 쳤지만, 늦은 밤, 남몰래 짚어든 빨간책을 야금야금 읽어내려갈때처럼 극도로 흥분이 돼 ‘자 어서 계속 말해봐.’ 눈빛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꾸 보챘는데 자리를 옮겨서도, 맥주를 먹으면서도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녀가 부러 감질나게 하는거라고 생각했다. 비린 남자의 구체적인 사항과 살떨리는 경험에 대해 말을 안 해줘 내가 애가 타는걸 보고 싶어하는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비린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는 달랐다.
- 언젠가 나만 추억할 수 있는 비밀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당연히 내 조급증 전의는 사그러지고 말았다. 응,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거야.  

 맥주를 먹으며 눈알이 핑핑 굴러가는걸 느꼈다. 나쁘지 않았어. 가사 얘기도, 서로의 입장도, 그녀가 날 보고 달리 할 말이 없는 듯 ‘우직한 사람 같다’고 했던 것도. 생생한게 좋지 않냐고 그녀를 자꾸 꼬셨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우직하게 ‘우직’을 고집했다. 실은 생생보다 내가 더 탐났던건, 그녀의 직관 어린 인물평 중에 그저 ‘좋아요’에 해당되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좋아요’란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정말 좋은건, 따로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니까.  

 요즘 들어 다른 분들의 서재에 엎드려 그들을 쭉쭉 그려나가다보면 아, 이 사람은 이런 면이 있구나, 이건 정말 나도 해보고 싶은 말이다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녀와의 만남을 쓴 이 글의 마지막을 그분에게서 빌리기로 했다. 
 ‘좋아요’란 분의 서재에 있는 말을 인용하자면,
그녀와의 만남이 나에게는 오르골 같단 생각이 들었다. 테엽을 돌리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지만 테엽이 멈추면 그 자리에 오르골이 없었던 듯 공간 안엔 소리의 여운만 미세하게 감지된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일정하게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그녀는 그렇게 철썩 내게로 부딪힌 후, 소리없이 사라졌다. 
  

여전히 서재의 그녀는 우물에서 건져올린 우아한 목소리를 들려주곤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명랑하고, 재치있으며 더할나위없이 친절하다. 그래, 그거면 됐어.

 얼마 전에 노정태씨를 누군가 인터뷰한 글을 읽다가 내가 다른 누군가를 편협한 잣대로 재단하고 있는건 아닌가란 생각을 한적이 있다. 무슨 모임에서 어떤 누구씨, 무슨 역할의 누구누구, 웃기는 사람이면 누구.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특성을 MC의 역량에 의해 정해버리는 쇼프로처럼. 그래서 모임 후기는 지양하려 했고, 맘씨 고운 알라디너라 내가 한 말이 별로여도 별다른 말씀을 안 하는걸 알지만, 아치 버릇 남 못준다고, 또 쓰고야 말았다. 혹여,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란 생각이 들거나 재미없으니까 그만 썼으면 좋겠단 생각을 지닌 분들이 있다면 심심한 배꼽인사를 올린다. 하지만 난 아마도 좀 더 쓰게 될 것 같다. 내가 보는 면이 그 사람의 티끌만한 점에 불과하다는걸, 양파처럼 벗겨도 벗겨도 알 수 없는게 사람 맘이라는 것을 읽는 분들이 더 잘 알것이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고도의 자기합리화 인가?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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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0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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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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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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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1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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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2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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