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에 큰편인 내 머리보다 더 큰 배추 50포기를 차에서 내려 집까지 실어나를 때까지만 해도 '그깟 김장쯤이야' 였다. 금세 하고 엄마랑 찜질방이나 가야겠다란 당찬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시작은 토요일부터였다. 배추의 밑둥을 자르고 반으로 갈랐다. 엄마가 한대로 소금 몇번 뿌리고 물에 담그면 소금간은 끝인줄 알았다. -알았다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긴 했지만 저것만 하고 좀 놀아야지 싶었다. '저것만'은 '저거라도'에서 '내가 이 정도인가'란 자괴감의 끝에 끝을 치달으며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되었다. 처음은 물론 간단했다. 밑둥을 자를 때면 슥삭대는 칼소리마저 정겨웠고, 배추를 반으로 가를 때의 느낌도 꽤 괜찮았다. 두부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간단해보였다. 이게 한 10개까지 그랬단 소리고 그다음부터는 전쟁이었다. 칼은 천근보다 더 무거웠고, 배추들은 속이 꽉차가지고선 칼이 잘 들어가지지도 않았다. 옥찌들이 베란다에 있는 배추를 욕실로 날랐다. 모처럼 신나는 놀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한 아이들을 보면서 이단계로 소금을 잡았다. 배추 사이를 간신히 벌려 소금을 넣은 다음 욕조에 풍덩. 중간점검 나온 엄마는 배추를 물에 담궈놓으면 맛이 없으니까 우선 물에 적신 다음에 사이사이에 소금을 다 채워야한다고 했다. 욕조에 입수해있던 배추를 다 건져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어쩐지 엄마 말대로라면 소금간하고 조금 있으면 풀이 죽는다는데 얘네들은 더 팔팔한 상태였다. 밤10시가 넘어서야 배추 소금간이 끝났다. 500포기가 아니라 50포기 담는건데 벌써 퍼져버리고 말았다.

 일요일, 욕조에 얌전히 있는 배추를 씻는 작업을 했다. 욕실이 작아서 양동이 두개를 간신히 들여놓은 다음에 흙과 이물질을 물로 씻어냈다. 다행히 구원투수가 온 덕에 좀 더 수월하게 쓱쓱싹싹 씻어냈다.(평소 나의 대충대충을 아는 엄마는 차마 내겐 못맡기겠다고 만류하긴 하셨지만)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시작했는데도 3시간 넘게 걸렸다. 하염없이 배추를 물에 씻고, 배추를 옮기고, 배추가 줄어들기는 커녕 욕조 화수분처럼 점점 늘어만가는걸 보자 가사를 여자에게 분담하게 한건 정말 탁월했단 생각마저 떠올랐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일거리, 현상유지로는 폼 안 나는 잡무,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을 생각할 때면 스스로 운명에 순응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가사의 힘이 느껴져버린다. 물론 이건 권력을 쥐고 있는 다른 성이나 다른 계층이 혁명적으로 가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면 '알아서 해야하는' 시스템과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분위기가 일식될 것 같기도 하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문득 김장 휴무나 김장 연휴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이어서 양념 재료를 믹서에 갈았다. 새우, 양파, 생강을 믹서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믹서는 왜 또 말을 안 듣고, 허리며 다리며 벌써부터 쑤셔대니. 아, 눈까지 침침하다. 믹서를 잡고 있는 손이 믹서를 끄고 나서도 덜덜 떨리는걸 넘어 저리기까지하자 김장 참여자 중 그나마 최연소인 나이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버무리는 작업을 했다. 그 전에 고모랑 엄마가 양념을 다 준비해놨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한건 세발의 피도 안 됐다. 내 하는 폼을 보고선 성격 급한 고모가 저리 나오라며 협박을 했다. 아, 나 버무리고 싶다고! 김장 초보란 너스레를 떨며 계속 자리를 꿰차고 눈짐작, 어깨너머 염탐으로 배추에 양념 묻히기를 착실히 해나갔다. 나의 남다른 착실함과는 별개로 어떤 때는 양념을 너무 많이 묻혀서, 어떤 때는 너무 하얘서 결국은 '애가 안 해봐서 그래.'란 안 하는게 도와주는거란 말을 착실하게 들어먹었다.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었다. 오, 내 손으로 지금 김치를 담근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도 잠시였다. 곧, 허리며 어깨며 누가 두드려 팬것처럼 아리고 저려왔다. 내가 어깨를 뒤틀고 허리를 배배 꼬는 동안 어른들은 묵묵히 통에 김치를 담고, 간을 보고 다시 배추에 양념을 묻히셨다. 아, 저래서 어른이구나. 나는 백날 떠들어봐야 발치에도 못닿을 경지가 있는거구나. 마지막 배추까지 다 버무려지고 나서야 허리를 피면서 아구구 하시는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햇다.

 사실, 도망칠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김치 얻어먹는 근천 떨기 싫다고 엄마가 무려 50포기까지 욕심을 부렸을 때 어딘가로 나가서 며칠 안 들어왔다가 김장 다 끝나면 들어와 맛이 어쩌네 저쩌네로 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다. 매년 하는 행사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꼭 나까지 해야해란 생각, 조금 하긴 했다. 여전히 가사는 내가 한다고 하는데도 늘 내 일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토끼면 분명 노인네 혼자서 배추 절이고, 고생할게 눈에 보이는데, 나야 하자 많은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보다 젊고 늘 초반 의욕이 넘치니 괜찮을줄 알았다. 하지만 김장은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 이상이었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강도를 보여주고야마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집에서 일을 많이 해야할때면 잠적했던 짓은 이제 지양해야겠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우리 엄마 손맛'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곱지않은 눈으로 볼 것만 같다. 특히 김치 맛 운운은 정말. 백김치든 정말 맛이 없는 김치든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노고가 눈꼽만큼도 안 들어간 것을 무상으로 제공받는다는 당연하지 않은 사실에서 사람들이 고마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으면 좋겠다.

 아, 너무 피곤해서 잠도 안 온다. 계속 이렇게 페이퍼만 쓸 것 같다. 고작 김장 한번에 이 난리니 내년에 김장 한번 더 하면 페이퍼 두개는 쓸 것 같다. 이러다 김장 관련 리뷰 하나 올리는게 아닐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김장하느라, 앞으로 하시느라 애쓰셨고, 애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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