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결혼식장에 가신 아빠는 고향을 떠난지 몇십년만에 처음으로 어렸을 때 친구를 보셨다. 결혼식장의 뷔페 음식이 식어빠지고, 더 이상 술 리필은 없다는 얘기가 돌때도 두분은 꿋꿋히 정담을 나누셨다. 그러다가 군산에 같이가잔 제안과 인사겸 진심 몇프로의 말을 그대로 믿은 아빠 친구분은 같이 다시 술한잔을 하기로 의기투합하셨다. 두분의 반갑고 좋은 마음과 아저씨들의 넉살과 유머감각은 듣는 나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분명 집에 가시면 손바닥만큼 남은 휴일을 쉬고 싶은 엄마가 고생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엄마 속에 들어갔다 나온건 아니고 엄마가 생각난게 있으면 바로 말하는주의답게 살짝 환장하겠단 말씀을 흘리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일산에서 집까지 가는 길. 거짓말은 눈꼽만치도 안 보태고 두분은 쉬지않고 말씀을 하셨다. 주로 자식 얘기를 하셨는데 그분도 우리집처럼 자식이 셋인데 대개의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셨다. 우리 아빤 약간 달관하는 자세로 친구분의 말씀을 경청했고, 엄마는 엄마대로 남자들 수다가 더 하다며 고속도로 달리는 차 소음보다 시끄러워 귀청이 떨어져나가겠다고 속삭이셨다.

 두분 얘기 중에 여전히 순천에 사시는 친구분의 멧돼지 얘기가 있었다. 가뭄이 들고, 산에 먹을게 없으니까 요놈의 멧돼지들이 자꾸 마을로 내려와 고구마를 심으면 심는 족족 다 파헤쳐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께서 생각한게 멧돼지 우리를 만들어 잡아야 겠다는거였다. 우선은 물고기 그물처럼 우리를 신식으로 해선 들어갈때는 쑥 들어가고 거기서 재미있게 놀다가 나오지는 못하게 한다는게 있다며 멧돼지 한마리 가격이 얼마고 그걸고 한달에 몇마리만 잡으면 노후자금 문제없단 소리였다. 아빠는 인생은 한방이란 소신답게 슬몃 관심을 보이시다가 아빠가 아시는 정보도 흘려주셨다. 멧돼지는 쇳소리를 들으면 접근을 안 하고, 지금이야 힘이 딸리지만 예전 같았으면 한손으로 잡았을거란 자랑도 잊지 않으셨다. 친구분의 우리가 완성되는대로 한번 가서 봐야겠다며 땅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물어 그동안 한탕 아빠에게 호되게 당한게 많은 엄마를 당황시키셨다.

 멧돼지 얘기를 하다가 역시나 술안주처럼 빠지지 않는 이명박 얘기가 나왔다. 종부세 얘기를 하면서 누구를 위한 정치인지 모르겠다며 두분은 성토를 하시고, 얼른 하야하고 새정부가 들어서야한다는 말씀과 더 살기가 어려워져 큰일이란 말씀도 덧붙이셨다. 아주 잠깐 얘기의 틈에 아저씨께선 딸랑구가 운전을 잘한다며 칭찬을 해주셨는데 칭찬에 입탄다고 바로 대형사고 치를뻔했다. 아저씨는 그 후로 내게 운전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아빠는 최고로 격양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 운전을 해야한다며 당신의 운전 사고 경험담을 꺼내셨다. 그리고 한동안은 내가 운전할때마다 그때 아주 큰일 날뻔 했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집에 도착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빠 친구분과 아빠는 역시 내 예상대로 엄마의 노동력을 착취하며(그래, 이 표현은 좀 그렇군. 엄마의 귀찮음과 피곤함을 외면하고? ) 술자리를 벌리셨다. 엄마를 거드는 척 하면서 악착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매운탕을 먹으려고 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분은 다시 옛날 얘기를 하셨는데 아저씨는 요즘 자식들 잘 나가는 얘기에 더 열을 올리셨다. 아빠는 역시 별로 하실 말씀이 없으셨는지 옛날에 남들보다 등치가 커서 최고로 잘나갔던 얘기만 하셨다. 얼마 전에 만난 동창이 자신을 나중에 커서 보면 코뚜래를 해서 서울 온천지를 끌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 친구한테 너 누구누구 앞으로 가면 죽을줄 알아라고 윽박질러서 그 친구는 매일 지각을 했다고 한다. 맨날 지각을 하니 당연히  선생님한테 맞았고 억울했던 그 친구는 형한테 일러바쳤다고 했다. 하루는 그 친구의 형이 아빠가 학교 끝나기를 기다려 아빠를 반쯤 패놓고 다음날도 그래서 아빠가 겁도 없이 한번만 더 때리면 형이고 뭐고 없다고 딱 경고를 했다고 하셨다. 그 뒤로 또 때리려고 하자, 아빠가 막 덤벼서 친구의 형까지 제압하고 나자 더 이상 무서울게 없었다는, 전직 씨름 선수였던 아빠의 무용담. 배도 부르고 졸려서 나와 엄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누워 열어둔 창문으로 두분 얘기가 간간히 흘러들어오는걸 듣게 되었다. 막내딸이 간호사인데 어찌나 아빠를 생각하는지 매일 영양제를 가져와서 놓아준다는 자랑의 댓구로 아빠는 내가 생각해도 저걸 어떻게 생각해내셨을까 싶은 내 자랑을 하셨다. 다시 술이 몇순배 돌자, 아저씬 큰아들 빚을 갚아준 얘기며 믿고 있는 막내 아들 걱정을 하셨고, 아빠는 자식들은 자기들 지 밥그릇은 차고 나온단 소리로 위로를 해주셨다. 그리곤 다시 예의 그 멧돼지 사업 얘기를 하시고, 아저씬 고향의 밤이 익어가는 풍경을 밤이 익는 냄새처럼 구수하게 얘기해주셨다.

 시제 모시러갈 때 몇번 따라가본 아빠의 고향. 그땐 잔뜩 악이 올라서 이런델 내가 왜 따라오냐고 투정이 대단했는데 한밤중에 고향처럼 그리웠던 친구를 마주하는 아빠를 보자, 아빠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순간이 파닥거리는 심장을 달고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빠가 고향이란 공간과 친구란 관계보다 더 그리웠던건 단순하게 힘이 세서 싸움꾼으로 날리던 그때가 아니라 잃어버린 무언가. 아빠의 첫마음일 수도 있고, 배고프지만 행복했던, 뭔가가 자꾸 팍팍해져 말을 할때마다 화난 목소리를 내는 너무 늙어버린 자신이 아니라  아무것도 두려울게 없는 작은 꼬맹이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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