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새로 만나기 시작한 C. 그 전에 헤어진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며 그녀에게 전화를 했단다. 호기심이 발동한 난 걔가 아직도 널 귀찮게해서 새로운 여자가 생겼단 쐐기를 박으려고 한거냐고 물었다.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그가 말했다. 전에 자신이 빌려줬던 책을 받으려고 전화했다고. 택배로 받는다고 했다며 송장번호가 문자로 왔단 그의 해맑은 얼굴을 대하자 난 아연해지고 말았다.
 

 관계 후에 남는건 정서적인 결핍감이 아니라 일테면 고작 우체국 송장번호란 말인가.
 
 할일없이 CD케이스를 뒤지다 문득 오리엔 탱고의 곡이 생각났다. 경쾌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바이올린 연주와 딱 맞아 떨어지는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찰랑거렸다. 얼른 찾아서 들어봐야지. 헌데 없다. 한번 꽂힌 물건이 제자리에 없을 때 사람들은 집을 들었다 놓는다. 다행히 난 콩알만한 방만 뒤지면 됐다. 그런데도 없다. 눈먼 우르술라는 물건이 없어진걸 직관으로 찾아냈지만 난 택도 없었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거지. CD가 없을거라곤 상상도 안 한 1분 전에 비해 욕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누가 감히 담배는 의지력으로 끊을 수 있다고 했단 말인가. 맘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그 CD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간적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아! 전에 만나던 양반에게 들어보라고 준적이...... 그래서 케이스도 안 보였구나. 어수선한 방 한 가운데에서 난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안 만난지 오래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척 안부를 물은 후에 CD를 받아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CD는 옷더미 사이에서 발견됐다. 대관절 얘가 왜 이 틈에 껴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헤어진 양반에게 전화하려던 이유가 일테면 고작 CD때문이었던 내 속을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연애를 하고 헤어짐을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것보다는 물건이나 음악이 더 기억에 남는다. C를 의아하게 볼 이유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대개는 난 절대로 저렇게 안 한단 장담인데 나도 그보단 음반을 더 먼저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내 맘이 차가워지고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나서 약게 말하면 돈이 아까워서 그랬다곤 생각지 않는다. 변덕 심하고 제멋대로인 내 맘처럼 급물살 타는 관계에 몰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같은건 죽어도 받지 않겠단 장담인데 장담의 특성상 무너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관계 후에 남는 것들이라......


 진득한 관계 후의 남는 것들을 떠올리자니 '미국의 송어 낚시'에 나온 애액으로 만든 베개와 포근한 정액 담요가 생각났다. 기분은 솜털인데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삭발을 실행에 옮겼을 때 난 이미 연애 중이었다. 남자에게 여자의 머리가 어떤 의미인지는 지금이나 그때나 관심 없었다. 그때 난 화풀이를 해야할데를 찾고 있었다. 뭔가를 때려부수자니 나중에 그걸 치울 생각을 하니 더 화가 뻗쳐 엄두도 못내는 중이었다. 자해를 생각했지만 엄살이 심해 실현 불가능 쪽으로 밀어두고 이리저리 헤아리자니 화는 가시는데 이렇게 넘기자니 껄쩍지근한 상황. 고심 끝에 머리 자르기를 생각했다.


 남자 친구는 처음에 내 말을 듣곤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보더니 의외로 담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체념의 웃음이었다. 그리곤 그냥 내 머릴 받아들였다. 지가 안 받아들임 또 어쩔거야. 녀석은 밤톨같이 까칠한 머릴 손으로 쓱쓱 문지르더니 이젠 예쁜 옷 못입겠네란 얘길했다. 예쁜 옷의 기준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옷장은 내가 입을 수 있는 옷과 입을 수 없는 옷으로 나눠졌다. 여성임을 드러내는 옷과 머리 스타일은 맞지 않았다. 그렇게 서툰 구분은 사람들의 시선을 거치면서 짜증과 귀찮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될대로되란 더 남자같이 주워입고 다니는 오기를 발동시켰다. 
 

 오기의 꼭대기에서 마구잡이로 패악을 부려대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날 살짝 불러냈다. 녀석은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낸 그야말로 예쁜 옷을 선물해줬다. 그 녀석이 그 옷을 산다고 얼마나 궁상을 떨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 옷을 입곤 그 애 손을 잡고 오랜만에 남자와 여자처럼 데이트를 했다.


 관계 후에 남는건 이젠 촌스러워 더 이상 입고 다닐 수 없는 옷,

 나프탈렌과 함께 옷장 깊숙히 잠든 옷.

 내가 회수하고 싶은건 CD나 책이 아니라 그때의 그 맘이었음을. 제각각의 환상과 뭉글거리는 감정들의 덧칠에도 꽤 그럴듯했던 유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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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6-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유명 작가가 되어버려서 가볍게 블로그에 올린 글도 바로 화제가 되어버리는 그런 스타 작가의 글을 슬쩍 와서 읽고 가는 느낌이에요. 시니에님의 글의 조각조각들이 예쁘게 박혀요.

Arch 2008-06-30 15:26   좋아요 0 | URL
윽, 마노아님 완전 꿈같은 얘기인걸요. 딱 고정도예요. 조각조각 가끔 예쁜. 다른식의 글쓰기와 내용담기를 생각하려구요. 그래도 마노아님의 칭찬이 참 감사한건 아시죠?

Mephistopheles 2008-06-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야하다~! 라고 생각하는 저는 "야동중년"인겐가요???

Arch 2008-06-30 21:03   좋아요 0 | URL
메피님^^ 제목이 야한가? 야동중년이라 그러신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