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에서 나의 말에 온 존재를 모아 귀 기울여주었던 사람을 내가 가진 적이 있었을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서 눈물이 났던건 아마 그때문이었을지도. 영화는 배우들의 이미지로 채색되어 있었다. 으~ 저건 아니야 대체 날 언제 울린건데란 푸념이 쏟아지고 영화보는내내 왜 저렇게 풀어나가는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한번쯤 끔찍하게 실컷 울고 싶을 때 선택한 영화치곤 내용이 상투적이고 밍숭밍숭해서 정말 울고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몸이 떨리고 얼굴에 덜덜 경련이 일 정도로 난 울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얘기들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순간. 그런 순간을 난 가진적이 있었던가? 온 존재를 모아 귀 기울여주었던 사람을 내가 되어준적은 있던가.

 학교 다닐땐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고, 남자친구를 사귀었을땐 땡깡놓듯 악다구니만 피워댔고 위로해주는 친구에겐 정색하며 그 정도로 심각한건 아니라고 일갈했다.

 난 지금, 나 상처받은 사람이에요. 애정결핍 중증이라고 이실직고 고백하는게 아니다. 간절하게 타인과 소통하길 바라는 것만큼 내 온 존재를 바쳐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지를 묻는 것이다. 나와 당신에게.

 잭 니콜슨이 나와서 눈길이 갔던 ‘성질 죽이기’란 영화. 애덤 샌들러가 약간 거짓말을 섞어 잭 니콜슨에게 엄마가 심각한 병으로 수술한다는 말을 전한다. 잭 니콜슨은 얼굴까지 빨개지며 오열한다. “아, 우리 엄마는 내 전부였는데. 엄마가 만들어준 요리며......” 신기했다. 나이든 남자가 우는게. 저렇게 즉각적으로 슬픔에 반응하는게.

 나였다면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거나 사람은 누구나 죽고 엄마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거니까 별거 아닐거란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큰딸로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가 우선일테고 그러한 고민을 나타내는 다시없을 심각한 표정을 드러내는건 추가옵션이었을거다. 엄마가 심각하게 아프다. 어쩔 수 없는 죽음 때문에 다신 엄마를 볼 수가 없다. 엄마, 엄마, 이건 아주 나중에 주억거릴 혼잣말이 될테고. 물론 극적인 반응보다 건조한 표정이 슬픔을 더 오래 반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한 감정적인 반응을 건너뛰곤 했던 난 누구 말대로 위악을 떨고 있었던건 아닐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나서 들여다본 책엔 이런 말도 나온다.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거 그거 창피한거 아니야.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하는 법이야...... 위악을 떠는 사람은 그래. 자긴 사실 착하고 약한데 이럴 수 밖에 없는거라고. 언젠간 알아줄거란 기대까지해.

 소통을 막고 있는건 나였다. 왜 내게 맘을 안 털어놓는데 그런식으로 하면 나 종교에 귀의한단식의 위악만 떨어댔다. 누구하나 말리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하란 식의 반응에 다시 상처받았다며 땅굴파고. 귀엽지도 않게 유치한데다 갸륵할 지경까지 처절했다.

 알았으니까 바뀌는건 시간문제야라고 콧방퀴 뀌지만 아플만큼 깨닫진 못했다.

 아직 갈길이 너무 멀다고 똥싼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진 않겠다. 내 똥은 깨끗하다거나 이편이 편해서라고 날 속이는거 말고, 어그적거리며 일어서서 그들 존재에 귀 기울여 내밀한 말들을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